2004년 7월23일 아침의 이 냉랭했던 분위기. 이날을 기점으로 민주노동당에 ‘민주노동당 원내와 원외의 이원화’라는 말이 생겨났다. 의원단과 최고위원들은 왜 진지한 토론도 힘을 모으는 '부흥회‘도 하지 못하고, 서로 할 말도 못한 채 헤어졌을까.
‘체감속도’의 차이
이라크에서 고 김선일씨의 피랍 사실이 알려진 6월21일, 원 구성을 놓고 ‘아웅다웅’ 하던 보수양당도 즉각 비상을 걸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내진출과 함께 “이라크파병 반대 결의안을 제출할 것”이라고 호언하던 민주노동당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발빠른 대응이 필요했다.
김선일씨의 비극적인 죽음이 알려지기 직전인 6월22일, 당 의원단은 국회 본청 농성에 돌입했다. 한동안 철야농성을 벌이던 당 의원단은 6월30일, 정치권이 김선일씨 죽음과 관련한 국정조사에 합의한 것을 계기로 농성을 해산했다. 권영길 의원이 국정조사위원으로 참여했고, 파병반대 의제 외에도 당 의원단에게는 시급한 정치과제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김선일씨의 죽음이 사회의 핵심 의제로부터 조금씩 멀어져가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뒤인 7월18일,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는 돌연 광화문 철야농성을 결정하고, 20일부터 농성에 들어갔다. 23일부터는 김혜경 당대표가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날짜로만 봤을 때 ‘뒷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파병반대투쟁을 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을 언제 조직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다. 정세 판단이 늦었거나 정세 판단이 고루했거나 둘 가운데 하나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의원단은 당초 개원국회가 열리기 전부터 파병반대 정국을 민주노동당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당선자 시절, 당대표였던 권영길 의원이 “민주노동당이 원내 들어가서 첫 번째로 할 일은 이라크파병 철회 결의안을 제출하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리고 6월 개원국회가 열리고 난 뒤 의원단은 파병반대 의원을 모으는 작업에 들어갔고, 이를 통해 원내에서 반대 목소리를 조직해나갔다. 6월10일에는 각당의 파병반대 의원들과 시민단체 대표자들이 모인 가운데 조찬모임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파병 반대까지는 아니지만 ‘재검토’에 서명한 의원들은 91명에 달했고, 의원단은 이 숫자를 원내 과반인 151명 이상으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잡고 있었다.<상자기사1 참조>
김선일씨 피랍 소식은 이 와중에 날아들었고, 의원단은 곧바로 국회 본청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선일씨의 피랍은 전쟁에 대한 ‘공분’도 일으켰지만 전쟁의 불가피성에 대한 ‘양해’도 키웠다. 사람들은 김선일씨의 피랍을 보면서 그의 불행을 동정하는 한편, 전쟁이 현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한국 도시 중산층에게 이라크전쟁은 도덕이나 캠페인으로 막기에는 너무나 먼, 그리고 오일라인이 걸려 있는 ‘먹고 사는’ 문제였던 것이다.
이를 제일 먼저 감지한 것은 역시 열린우리당이었다. 청와대가 직접 설득에 나서자, 열린우리당의 파병반대 의원들은 이탈하기 시작했다. 23일, ‘파병 중단 및 재검토 결의안’이 국회에 제출됐을 때, 최종 서명 의원수는 50명(민주노동당 10명, 열린우리당 27명, 민주당 7명, 한나라당 6명)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또한 6월 임시국회가 끝나갈 즈음, 보수양당의 관심은 이미 ‘파병’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180명이 넘는 ‘초선’ 의원들에게는 파병도 중요했지만 ‘국회 공부’가 더 중요했다. 이는 민주노동당 의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의원단은 각자 상임위 활동과 정기국회 준비쪽으로 주력을 돌리고 있던 중이었다.
“민주노동당, 뭐하고 있냐”
그런데 마침 이 시기는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가 막 구성돼 본격적인 활동을 준비하던 때였다. 첫 최고위원회가 열린 날이 6월14일이었고, 이후 약 열흘 간 최고위원들은 각 최고위원의 역할 분담 등 최고위의 기본 구성에 힘을 쏟고 있었다.
김선일씨 피랍 사건이 터지고 나서, 23일 최고위원회는 비상중앙위원회 소집을 결정했다. 그리고 24일 열린 비상중앙위 자리에서 최고위원들은 중앙위원들의 적지 않은 '쓴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 시국에 민주노동당은 뭐 하고 있는 거냐!”
하지만,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입장에서는 선택할 전술이 많지 않았다. 원내에서는 이미 농성 전술을 펼치고 있었고, 최고위원들은 아직 당직자 이름을 외울 시간도 갖지 못했다. 더 큰 문제는 민주노동당에 최고위원이라는 제도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대부분의 국민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앙위원들에게 ‘기합’을 받았으니, 최고위원회의 마음은 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행정적 과제들은 산적해 있었고, 마음과 달리 몸은 여전히 굼뜰 수밖에 없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6월말에서 7월초, 파병반대국민행동과 공동보조를 취하며 투쟁계획을 잡던 당 최고위가 꺼낸 카드는 “민주노동당이 나서서 투쟁을 선도하자”는 것이었다. 이미 2003년을 지나면서, 파병반대운동은 대규모 대중운동의 불씨가 사그러든 상태였다. 파병이 임박했지만 대중은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선택은 당이 선도투쟁을 통해 대중운동의 밑불이 되되, 원내진출에 성공한 진보정당에 걸맞게 웬만한 규모는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대규모 농성이었다. 이래서 시간이 더 걸렸다. 7월 중순이 넘어가자 파병은 이슈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현장에 와서야 당대표 단식이 결정된 것을 들었다"
“당시에 원내 정치를 담당했어야 할 의원단대표는 (의원단이 뭐하냐는 비판에 밀려) 농성장 등 국회 바깥에서 주로 활동했고, (각계각층의 여론주도층을 설득하고 다녔어야 할) 당대표는 오히려 여야 정치권을 만나서 (파병안 철회를 위한) 임시국회 소집을 요구하고 다녔다.”
당시를 회상하며 심상정 의원이 한 말이다. 의원단과 최고위가 제 자리를 잡기에는 아직 시간이 모자랐다. 행정적 질서도 완비된 상태가 아니었다.
이러한 가운데 의원단은 서서히 이라크 문제에 대한 원내외의 정세판단과 전술운영이 엇나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소통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연석회의가 예정됐던 7월23일, 의원단은 이날을 최고위원들과 파병반대 전술에 대한 시각을 교환해야 할 시점으로 보고 있었다. 또한 대규모 농성 ‘전술’에 대한 비판을 준비하고 있던 의원들도 여럿이었다. 또한 연석회의를 끝내고, 국회로 들어와 40여일간의 원내활동을 정리하는 의원단 워크숍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판’은 의원단의 의지와 무관하게 이미 꾸려져 있었다.
의원단이 연석회의를 하기 위해 농성장을 찾았을 때 제일 먼저 들은 이야기는 김혜경 당대표가 단식농성을 시작한다는 ‘통보’였다. 의원단은 그 사실을 연석회의 현장에 와서야 알았다. 당시 연석회의 석상에서 회람된 회의자료는 딱 한 장. 향후 당대표 단식과 연동된 투쟁일정이었고, 그 속에는 의원단이 적극적으로 농성투쟁에 결합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또한 같은 날 11시에는 당대표의 단식 시작을 알리는 기자회견까지 잡혀 있었다. 농성 전술에 대해 이런저런 쓴소리를 할 생각을 갖고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의원 몇몇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이미 결정된 자당 대표의 단식을 앞두고 군말을 다는 것이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불만스런 표정의, 입을 다문 의원들. 냉랭한 분위기 속에 약 한시간 가량의 연석회의는 끝났다. 결국 김혜경 당대표와 전임 지도부를 이끌었던 권영길, 천영세 의원 등이 나서 상황을 정리했다.
“당대표가 단식을 하는데, 외롭게 시작해선 안 된다. 곧 있을 기자회견에 기자들이 많이 안 올 것 같다. 의원단 다음 일정이 있지만, 당대표의 단식 기자회견까지 광화문에 같이 있자. 대표의 단식 기자회견이 외롭게 시작해서야 되겠나.”
엇나간 원내외 전술운용
몇몇은 당대표 기자회견 때까지 광화문 농성장을 지켰고, 몇몇은 다른 일정 때문에 자리를 떠났고, 몇몇은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때문에’ 자리를 피했다. 이렇게 의원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의원단의 불편했던 심기는 국회에 돌아와서 마침내 터졌다. 점심 무렵, 그날 예정된 워크숍은 이미 할 시간도 없었고, 그럴 분위기도 아니었다(이 워크숍은 3일 뒤인 26일에 열렸다).
의원들이 둘러앉은 가운데 몇몇 의원들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 처리”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심지어 한 의원은 (상당히 격앙된 목소리로) “이제 당쪽에 지원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며 “뭘 기대하지 말고 우리는 우리 힘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은 원내 의원단과 원외 지도부가 어긋나기 시작한 날이었다.
물론 광화문 농성 전술은 성과가 없지 않았다. 각 지역의 당원들이 지도부의 단식농성에 함께 했고, 종교단체 등 여러 단체에서도 연대와 지지가 이어졌다. “당시 선택은 옳았다”(최규엽 최고위원)는 주장도 대중동력을 기대할 수 없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당시의 광화문 단식농성은 꺼져가던 파병반대운동의 불씨를 살리는 것이었다기보다는 마지막 불꽃을 상징하는 것이었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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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가 선택한 방식은 ‘광화문 농성’이었다. 또한 당대표의 단식 투쟁이었다. 농성은 동선을 제한한다. 여기에 단식까지 겹쳐지면 더 그렇다. 물론, 농성의 주체가 정국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있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83년 YS는 신문에 한 줄도 안 나왔지만, 20일이 넘는 단식농성으로 전두환을 굴복시켰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은 YS가 아니었다.
찾아가는 정치를 해야 할 시기에 찾아오기를 바라는 방식의 투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다. 왜 그랬을까. ‘운동권’의 관성과 기획력 부족도 한몫 했을 수 있다. 더불어 당내 여론도 상당한 역할을 했다.
6월24일 김선일씨의 피살 소식이 알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당은 비상중앙위를 열어서 총력대응을 결의했다. 이날 중앙위에서는 “당이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된다”는 요구와 함께 “당 지도부가 발빠른 행보를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당시 당의 정치적 상상력은 집회와 유인물 뿌리기, 농성, 단식, 삭발, 점거 등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 여론은 당시에 상당한 부담이었고, 마음도 급하게 만들었다. 지도부의 철야농성 돌입과 당대표의 단식은 이런 여론에 떠밀려 선택한 측면이 분명 있다.” 한 최고위원의 말이다. 여기에 더해 7월22일에는 파병반대국민행동 대표단이 단식에 돌입했다. 당은 국민행동의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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