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이 끝나고 민주노동당은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을 보냈다. 집중되는 국민들의 관심, 국민적 스타로 부각되며 매일 언론을 통해 거명되는 10명의 당선자는 민주노동당의 달라진 위상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비록 원내 3%의 소수정당이었지만 국민적 관심은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힘이었다. 국민적 관심. 그것의 실체가 무엇이든 2004년 5월 현재 민주노동당은 창당 이래 처음으로 ‘열매’를 손에 쥐었다.
당직공직 완전분리
이날 중앙위에서 당직공직 분리 여부의 핵심 쟁점은 국회의원의 당대표 겸직 허용 여부였다. ‘사회운동정당’의 원칙을 주장하며 완전분리를 외친 이들. 대중정당의 상식을 주장하며 겸직허용을 주장한 이들. 갑자기 커져버린 (예비)원내권력에 막연한 불안감을 느낀 이들. 총선 이후 의원단에 쏟아진 언론과 국민의 관심을 지켜본 뒤 원내권력 통제의 필요와 효용이란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낀 이들. 중앙위에서는 이들이 한데 모여 한바탕 설전을 벌였다.
“당이 성장하는 단계에 있는 만큼 당대표만큼은 (당직공직 분리에서) 열어두고 가자”(강승규 중앙위원·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
“당내에 인물이 부족하다. 새로운 인물을 육성하기 위해서라도 겸직금지를 해야 한다. 진보정당다운 새로운 실험이 필요하다.”(정창윤 중앙위원·현 울산도당 대표)
“대중 속에서 더많이 운동을 해서 그 대중적 힘이 국회의원에게 뒷심이 돼야 한다. (국회로) 파견된 의원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겸직허용은 안 된다.”(김혜련 중앙위원· 서울중랑구지역위원회 위원장)
“역으로 겸직금지가 책임지지 않는 권력을 만들 수 있다. (국회의원들이) 최고위원회에 들어와서 같이 아우르는 것이 책임 있는 권력과 영향력을 만들 수 있다.”(신장식 중앙위원·현 대표 비서실장)
논쟁 끝에 당직공직 완전분리 안건은 156명의 중앙위원 가운데 89명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당 대표에 한해서 겸직을 허용하자’는 수정안은 부결됐고, 이 수정안에 대해 찬성한 중앙위원은 70명이었다.<상자기사1 참조>
‘1인7표제’
당시 중앙위는 최고위원 선거규정과 관련, ‘1인7표제’를 통과시켰다. 그러나 2005년 8월 현재 이 ‘1인7표제’<상자기사2 참조>가 옳은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당직자를 찾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 2004년 5월 민주노동당은 최초의 집단지도체제를 도입하는 선거에 ‘1인7표’를 선택했을까.
이 선택은 엄밀한 계산 아래 이뤄진 것은 아니었다. 이를 반증이라도 하듯이, 당시 당내에서는 ‘1인7표제’가 민주노총의 선거방식과 비슷하기 때문에 민주노총 출신 중앙위원들이 큰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는 이야기도 나왔다.<상자기사3 참조>
실제로 중앙위 표결 과정에서 ‘중앙파’와 ‘국민파’를 막론하고 민주노총 출신 중앙위원들의 상당수가 ‘1인7표제’에 손을 들어줬다. 민주노동당 부문할당 원칙은 지역대의원·중앙위원 대비 30%를 민주노총에 보장하고 있고, 이외에도 지역에서 선출된 중앙위원 가운데에서도 민주노총 출신이 적지 않아, 민주노총 출신 활동가들은 민주노동당 전체 중앙위원의 1/3 이상을 점하고 있다는 게 당 안팎의 집계다.
민주노총 중앙파의 한 주요 활동가는 “민주노총 출신 중앙위원들이 자신들에게 익숙한 방식을 선택했던 것 같다”면서 “그것이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민주노총의 경우) 대중조직의 특징상 한쪽이 ‘독식’ 한다고 해도 편향된 사업을 진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지만 정치조직인 당에서 독식은 위험할 수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았다. 투표방식이 당에 미칠 영향을 좀더 면밀히 검토했어야 했다.” 중앙파 출신 다른 활동가의 말이다.
그러나 ‘1인7표제’는 민주노총과는 별반 관련이 없다. 진짜 배경은 따로 있었다. 앞의 활동가가 증언한 대로 중앙위원들은 ‘독식’이 가져올 위험에 대해 충분히 고려할 시간이 없었다. 원내진출은 그만큼 당에게 많은 과제들을 안겼다. 설사 시간이 있었다 하더라도 ‘독식’의 위험이 충분히 논의될 만한 구조도 아니었다.
선거를 코앞에 놓고 ‘조직표’를 확보하고 있던 정파들은, 적어도 ‘자신을 제외한 독식’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고, 비례대표 경선의 경험이 이를 다시 부추겼다. 그러나 지명도가 높은 당내 유력인사들이 이미 의원단으로 빠져나간 상황이었다. ‘무명’끼리 붙느냐 ‘유명’끼리 붙느냐에 따라 ‘조직표’의 위력은 천양지차라는 사실을 이들은 잠시 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독식’을 ‘차선’으로 생각했던 세력이 있었다.
자민통쪽에서는 이날 중앙위 이전에 자파의 후보군에 대한 ‘밑그림’을 대략적이나마 그려두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자민통쪽 핵심 조정자의 말이다.
“적당히 균형이 맞춰지되 우리가 과반을 차지하는 결론을 바랬다. 하지만 지역별 조직과 부문조직들을 배려하다 보니 자리는 적은데 (우리가) 챙길 사람은 너무 많았다. 그래서 7명을 꽉 채워서 후보군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자칫 독식구조로 결론날지 모른다는 우려를 했고,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선거과정에서 적당히 이기고 적당히 질 것이라고 생각했지 독식할 것이라고 예상한 것은 아니었다.”
‘독식’을 차지할 수도 있던 정파에서도 예상되는 위험에 대한 고려가 많지 않았음은 이 조정자의 다음 말에서 드러난다. 그는 대표만큼은 당직공직 겸직금지에서 빼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 온 바 있다. “사실 당직공직 완전분리가 결정된 이후 너무 속이 상해 중앙위 자리를 떠났다. 1인7표로 정해졌다는 것은 중앙위가 끝난 다음에 들었다. 표결방식을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다.”
강도는 약했지만, ‘좌파’는 ‘독식’을 우려했다. “1인7표가 독식구조를 가져올지 모른다는 것에 대해 이미 좌파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검토하지 않았다. 또 몇몇 ‘철없는 좌파’들은 우리가 독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명부별 1인2표를 주장했던 좌파쪽 조정자의 말이다. ‘계산’은 많았지만, ‘계산 안 된 것’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많았다는 것이다.
진통 끝에 답 못 내린 부문할당
사실 이날 중앙위원회가 원내진출 이후 당의 권력구조, 더 정확히 말하면 당 권력 ‘분점’의 룰을 정하는 자리였음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안건은 부문할당에 대한 것이었다. 이 안건을 처리하며 중앙위원회는 두 번의 정회를 거치는 등 장시간을 토론에 바쳤다.<상자기사4 참조>
총선 이전 민주노동당-전농 간의 정치협상 과정에서, 노동과 농민의 부문할당비율은 2대1로 합의된 바 있다. 이에 따라 노동 30%, 농민 3%였던 부문할당비율의 조정은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 문제를 놓고 당과 민주노총 그리고 전농의 입장은 각각 달랐다. 우선 민주노총은 “농민의 부문할당비율을 늘리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그로 인해 노동부문의 할당비율이 줄어드는 것은 반대한다”는 입장이었고, 전농은 “합의에 따라 할당비율을 늘릴 것”을 요구했다. 반면 민주노동당은 “노동부문 할당을 그대로 두고 농민을 늘릴 경우, 전체 대의원 및 중앙위원 중 부문할당비율이 40%를 넘어서게 된다”면서 “선출직과 부문할당의 비율이 2대1을 넘어서는 것은 대의민주주의 원칙에 맞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쉽게 말하면, 선출직과 부문할당의 비율을 2대1 수준으로 맞추고 여기에 농민 부문할당비율을 높이기 위해서는 노동부문 할당을 줄여야 하지만, 이는 민주노총이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노총은 ‘당의 노동자 중심성을 지키고, 민주노동당 창당과정에서 기여도를 생각할 때 노동부문의 할당을 줄이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날 중앙위는 명확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전체 중앙위원 가운데 선출직과 부문할당의 비율을 2대1로 맞추고 △노동과 농민 할당비율을 2대1로 하되 △전체 부문할당비율 조정은 3자(당-민주노총-전농) 기구에 위임하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이 과정에서 소수자를 배려하는 장치로써 부문할당, 비정규직 등 미조직 잠재 지지층을 포섭하는 의미로써 부문할당은 진지하게 고려되지 않았다. 당사자운동이 아직 미약하다는 상황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진보정당으로서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었다. ‘열매’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사람’에 비해 ‘열매’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었을까.
화요모임쪽의 한 활동가는 “자민통그룹이 주판알을 튕긴 것이 일을 그르쳤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자민통쪽 활동가는 “정치토론을 해야 할 문제를 두고 좌파쪽에서 우리를 개량주의자 취급을 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 자민통쪽 활동가는 “기존 대표 겸직을 주장했던 자민통의 일부 세력이 (자기 세력 출신의 의원을 만들지 못하자) 완전 분리로 돌아섰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구설들은 사실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사실일 수도 있고, 단순한 험담일 수도 있다. 어쩌면 계산된 역정보를 흘리고 다닌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구설의 ‘영향력’만큼은 사실이 됐다. 당 지도부의 권위가 선거를 시작하기도 전에 훼손될 위험에 처했던 것이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구설’을 양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당직공직 완전분리’ 결정이 내려졌다는 것이다.
당직공직 겸직허용 여부를 5월로 미뤘다는 것은 4월 총선이 끝나고 난 뒤 얘기하자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총선이 끝났다는 것은 원내권력의 세력분포가 이미 드러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렇게 되면 당직공직 분리의 문제는 당사자들의 본의나 선의와는 무관하게 당내 세력관계에 수렴하게 된다. 어떤 제도가 당의 정치활동과 의사결정 및 집행시스템을 위해 올바른 것인지에 대한 논의는 상대적으로 뒤로 밀리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만일 2월 중앙위에서 당직공직 분리 여부를 결정했다면 (5월 때와) 달랐을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부분의 당직자들은 “그렇다”라고 답했다. 당의 원칙에 대한 해석의 차이, 향후 정국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가 각 정파들의 이해관계와 뒤섞였다. 그런 점에서 2004년 5월은 원칙과 현실에 대한 고려를 중심으로 제도를 결정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은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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