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아침부터 당사로 몰려와 기자회견을 기다리던 기자들은 사진을 찍고(대부분의 언론은 민주노동당 주요인사들의 사진을 확보하고 있지 않았다), 말을 받아 적느라 북새통을 이뤘다. 넓지 않은 민주노동당사. 그야말로 기자 반, 당직자 반이었다.
당선 첫날, 당선자들의 정신없는 일정이 시작됐다
권영길 당선자(당시 당대표)는 당선 첫날에만 무려 17개 언론과 인터뷰를 하며 강행군을 소화했고, 민주노총 위원장 출신으로 언론의 이목이 집중된 단병호 당선자 역시 꼭두새벽부터 모란공원에서 전태일 열사의 묘소를 참배한 뒤 언론의 인터뷰 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최순영 당선자는 토론회 준비를 하느라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이영순 당선자는 당선 첫날부터 청와대 앞에서 열린 ‘딕체니 미 부통령 방한 반대 집회’에 참석했고, 농민 출신인 강기갑 당선자는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집회를 하다 구속된 농민들의 면회를 갔다.
이 무렵, 민주노동당 당선자들 주위에는 항상 4~5명의 기자들이 붙어 일거수일투족을 받아 적고 있었다. 정치적 견해는 물론, 옷차림부터 말투, 추억꺼리까지 기사화 되지 않는 게 없었다. 진보정당의 원내진출이 4·15 총선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는 사실이 곳곳에서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임기 말 당 대표단의 과반수가 의원 당선자
하지만 축제 분위기에 들떠 마냥 언론 인터뷰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 같았다.
그러나 바뀐 환경, 바뀐 위치에서 당을 안착시키고, 원내진출 이후를 준비할 책임주체가 불분명했다. 당시 당 대표단은 권영길(당대표), 천영세, 최순영, 김혜경, 김형탁(이상 부대표) 그리고 노회찬(사무총장) 등 6명으로 구성돼 있었다. 이 6명 가운데 4명이 국회의원 당선자가 됐다.
선거는 끝났지만 당은 아직 선거 이전의 일상적 집행체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선거 뒤의 들뜬 분위기, 회계 정산 등의 뒷정리들이 남아 있었고, 선거 기간 동안 중앙당 집행기구 역할을 했던 선거대책위원회는 선대위일 뿐 당의 일상적 집행기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선자들은 자신에게도 처음이자 당에게도 처음인 국회의원 활동을 준비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당이 총선 때문에 미뤄두고 있던 지도부선거가 코앞에 닥쳤다는 사실이었다. 당직과 공직의 겸직을 금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사실상 이때는 이미 당내에 겸직 금지의 큰 줄기는 세워져 있던 시점이었다) 역시 미묘한 문제였다.
이렇듯 원내진출을 성공리에 마친 시점에서, 민주노동당은 곤혹스러운 딜레마에 빠져 있었다. 매일매일 결정하고 집행해야 할 일들은 산적해 있는데, 정작 그것을 책임지고 집행해야 할 사람들은 당선자의 신분이었던 것이다. <상자기사1 참조> 대표단에 속하지 않던 당선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책임과 권한은 아직 명확하게 정해진 바 없었다. 이는 본격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 권력의 일시적인 ‘공백기’를 맞았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리하여 원내 활동을 준비하는 민주노동당의 일상활동은 자연스럽게 당선자회의로 그 무게중심이 옮겨갔다. 매일 터지는 현안에 대한 민주노동당의 입장을 정하는 문제와 더불어 상임위 배정, 의원과 보좌관의 급여 수준, 의정지원시스템 등 향후 당의 구조와 전략에 따른 핵심적인 사항들이 당선자 간담회에 올라 왔다. 기획조정실과 정책위원회가 당선자 간담회를 준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고, 초안을 잡아 나갔다.
당의 원내 활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상임위 배정 문제는 4월23일 당선자 간담회에서 틀이 마련됐다.
당시 당선자 간담회는 우선적으로 배정되야 할 상임위로 환경노동위, 보건복지위, 교육위, 통일외교통상위, 농림해양수산위, 문화관광위, 행정자치위, 재경위로 꼽았으며, 장기적 정책과제 실현을 위해 배정해야 할 전략상임위로 산업자원위, 법제사법위, 국방위를 꼽았다. 또한 기획 상임위로 과학기술정보통신위, 건설교통위, 정무위 등이 정해졌다. 상임위 배정은 5월 초 당선자 연수와 중앙위를 거치면서 확정됐는데, 이날 당선자 간담회에서 정해진 틀은 중요한 근거로 사용됐다.
또한 개원국회가 코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보좌관과 정책지원 인력의 선발 문제는 당장 결정을 내려야 할 일이었다. 또한 의정지원시스템 즉, 의정지원단에 대한 논의도 활발히 진행됐다. 의정지원시스템은 중앙위에서 당규 제정을 거쳐야 할 문제였지만, 초안을 잡아내는 것은 당시 정책위 실무자들과 당선자들의 몫이었다.
의원과 보좌관의 급여문제를 다룬 것도 당선자 간담회였으며, 이는 정책위 규모 문제와 연동돼 중앙당의 직제와 규모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국회의원 세비를 당에 반납하고 노동자 평균임금(180만원)만 받겠다’는 것과 ‘(100명 수준의) 공동정책보좌관 풀(pool)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힌 것은 4월 총선을 앞둔 3월24일 열린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 서약식’에서 처음 거론이 됐다.
사실 세비와 보좌진 숫자 문제를 처음 거론한 것은 선거에서 정치적 선언의 성격이 강했지만 총선 이후 이를 구체화 하는 것은 ‘행정적인 문제’로 전환돼 있었다.
권한은 무엇이며,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문제는 당선자들 사이에서조차 “우리들의 책임과 권한이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다는 점이다. 당장, 민주노동당 중앙당에는 당선자들의 직무공간도 마련돼 있지 않았고, 일정을 관리하는 기본적 보좌 시스템도 구축돼 있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차분히 개원국회 문제만 신경 쓰며, 함께 일할 보좌관만 물색하고 다닐 조건이 당선자들에게 주어지진 않았다. 결정 권한은 책임을 수반하는 법이나, 이 시기 결정은 있었으되 책임소재는 불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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