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즈음부터 시작된 노회찬 의원의 ‘폭로정치’는 약 6개월간 치밀한 기획사업으로 진행됐으며, 신문 1면을 오르내리며, 용산기지 이전 문제와 관련한 국민적 인식을 바꿔버렸다. 당시 당은 국가보안법 투쟁에 올인하느냐 마느냐를 놓고 설전을 벌어고 있던 상황이었다. 노 의원은 당내 정치에서는 변죽을 울렸을 뿐이지만, 대국민정치에서는 중심고리를 잡았다.
창당 이래 가장 신문에 크게 난 사건
2004년 7월22일, 민주노동당 노회찬 의원들 비롯한 여야 의원 63명이 ‘용산기지 이전비용 감사청구안’을 제출할 때까지만 해도, 이 문제가 정가의 핵심 이슈로 떠오를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9월21일 노 의원이 “외교부, 국방부 등 용산기지 협상팀이 미국과 굴욕적으로 협상했다”고 주장하며 ‘청와대 직무감찰 보고서’를 공개하면서 파문은 시작됐다. 10월7일에는 직무감찰보고서를 작성한 이석태 청와대 전 비서관이 국회 법사위 국정감사의 증인으로 출석했고, 여론은 이 사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10월15일에는 용산기지 이전과 관련한 포괄협정(UA) 문서가 공개되면서 정부의 이전협정과 관련한 한국정부의 굴욕외교의 실체가 그대로 드러났다. 이 공개는 당일 석간 <문화일보> 1면 톱으로 실렸으며, 관련기사로 6~7면 전체가 할애됐다. 또한 KBS 9시 뉴스 헤드라인에 포함됐고, 방송 3사가 모두 이 폭로를 주요뉴스로 다뤘다. 이날은 (4·15 총선을 제외하면) 창당 이래 민주노동당의 활동이 언론에 가장 크게 실린 날이었다.
11월11일, 대정부질의에서 노회찬 의원은 “C4I(전술지휘자동화체계) 도입은 대북한 선제정밀타격을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국방부는 “비밀열람 권한 제한을 포함해 수사의뢰까지 검토 중”이라며 엄포를 놓았지만, 노 의원은 “허위사실을 수사하겠다는 것은 국방부 장관 스스로가 위증을 고백한 셈"이라며 "국방부 장관은 미국에서 달러로 월급을 받는 사람인지, 국민에게서 월급을 받는 사람인지 모르겠다"며 장관을 아예 묵사발로 만들었다.
이어 11월16일에는 여야의원 67명이 참여하는 ‘용산 LPP 철저검증을 위한 의원모임’이 발족했으며, 노 의원의 의제는 본격적인 원내 세 불리기에 나섰다.
|
미국 국방부도 움직이게 만들었다
노회찬 의원의 폭로전의 결정판은 11월30일 ‘주한미군 지역역할 수행 대비책’이라는 정부문서를 공개한 것이다. 이 문서는 미 2사단의 평택 이전이 주한미군의 광역기동군화, 동부아 신속기동군화를 위한 것으로, 기존 한반도에만 국한되던 주한미군의 역할이 주변 분쟁까지 확장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평화운동 진영에서 지속적으로 제기되던 주장이 정부 공식문서로 확인됐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이날의 폭로 역시 일간지들의 1면을 장식했다.
또한 이날 노회찬 의원은 이미 삭감된 차기유도무기사업(SMA-X) 사업 추진예산 100억원이 슬그머니 정부 예산안에 들어가 있으며, 이 사업이 추진될 경우 6조원의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는 것도 폭로했다.
노회찬 의원의 연이은 폭로는 미국 정부까지 나서게 만들었다. 12월7일 미 국방부 대변인은 한국정부에 ‘우회적 유감’을 표명했다. 이는 진보진영이 정보전을 통해 미국정부를 움직인 최초의 사건이었다.
하지만 결국 한미 연합토지관리계획(LPP) 비준동의안과 주한미군 용산기지 이전협정 비준동의안은 12월9일 국회 본회의에서, 30여표가 못되는 반대표밖에 모으지 못한 채 통과됐다. 노회찬 의원은 “LPP, 용산기지 이전 협정, 둘 중 하나는 부결시킬 것”이라며 이 사업을 6개월여간 끌고 갔지만, ‘한미동맹’이라는 울타리에서 안주하는 보수양당 의원들을 결집시킬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미 노 의원은 '승리한 자'였다.
여론을 치밀하게 조직했다
6개월간의 용산기지 이전 문제에 대한 폭로정치는 사실 진보정당이 지향해야 할 폭로정치의 전형으로 평가될 수 있다. 권력자에게만 편리한 ‘국익’과 ‘안보비밀주의’를 여론전을 통해 공략해 나갔다는 것이다.
‘국익에 반하는 폭로’라는 정부 주장에는 “누굴 위한 국익이냐”며 맞섰고, ‘수사를 의뢰’ 하겠다는 협박에는 “할테면 하되, (폭로가 거짓이라면) 허위사실을 왜 수사하는 것”이냐며 정부의 입장을 옹색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한창 날을 세우던 국방부는 막상 폭로의 핵심이었던 주한미군 지역역할 문제를 꺼내들자, 사태가 잠잠해지기만 기다렸다.
또한 이 사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사업이 개원국회 이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것이며, 폭로한 순서와 말하고 싶은 주제가 역순으로 배치됐다는 점이다. 폭로의 순서는 △용산기지 이전 비용의 문제에서 △대미 굴욕외교의 문제로 △마지막에는 한반도 평화와 직결되는 군비와 주한미군 지역역할의 문제로 이뤄졌다.
여론이 쉽고 강하게 불러올 수 있는 이전 비용의 문제와 굴욕외교의 문제로 터를 잡은 후, 핵심 사안인 주한미군 지역역할 문제를 꺼내든 것이다. 이는 이 사업이 기획단계부터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된 것인지를 가늠케 한다.
언론 사업 역시 치밀하게 기획됐다. 특히 UA 전문을 공개한 10월15일과 지역역할과 관련한 미래한미동맹정책구상회의(FOTA) 속기록을 공개한 11월30일에는 석간신문을 이용한 여론화 작업을 사용했다. 유일한 석간 종합 일간지였던 <문화일보>와 사전협의를 통해 주요 면을 확보하고, 폭로 당일 9시경 보도자료를 발송해 인터넷 신문이 받게 만든 뒤, 이후 방송뉴스가 다루면, 다음날 조간신문에서 다루게 만든 것이다.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당은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했나
노회찬 의원의 ‘폭로정치’가 맹위를 떨친 시기는 10월부터, 12월초까지다. 이 시기 민주노동당은 개혁공조와 ‘2중대 문건 파동’, ‘국가보안법이냐, 비정규직이냐’를 두고 내홍을 겪고 있었다. 개혁공조 파기 이후 원내 정치는 길을 잃고 있었고, 당 최고위원회는 ‘국가보안법 연내처리를 위한 진보-개혁의 대승적 협력’을 주창하던 시기였다.
주한미군 이전 문제와 관련해 민주노동당은 창당 이래로,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해 왔지만 막상 여론이 들끓고, 정가의 중심이슈로 올랐으며, 자당의 의원이 그 중심에서 연일 폭로의 주력하는 동안 당은 '태풍의 눈'이었다. 평택에서는 당 지역조직의 주도하에 이전반대운동이 조직돼 있었고, 2003년 국방예산 분석을 통해 군축운동을 주도했던 민주노동당의 조건에 비춰볼 때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자주와 평등’이라는 당의 중심 슬로건 중 자주의 문제에 정확히 부합되는 사업이었고, 한반도 평화 문제와 군축 문제에 대한 핵심을 찌르고 있었지만, 정작 당, 그리고 당의 '자민통' 계열 활동가들은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확보를 통해 만들어진 정국인, 국가보안법 개정·폐지가 연말 정국의 중심 사업으로 배치돼 있었다.
“당 자주평화통일위원회가 종합적으로 인식해 쟁점화 계획을 세우고, 대중투쟁을 견인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안 됐다. 당시 당의 주된 동력이 국가보안법 문제에 집중돼 있었고, 여의도에 단식농성단이 모여 있던 상황에서, 용산기지 문제의 대중적 확산을 조직할 조건을 만들지 못했다.”(이정미 당 최고위원, 자주평화통일위원장)
2005년 정기국회에서 ‘검찰의 삼성장학생’을 노회찬 의원이 폭로한 이후, 당은 연일 삼성을 맹타하고 있다. 사업 기획의 솜씨는 차치하더라도, 당력이 집중되면서 ‘민주노동당 삼성 집중 공략’이라는 기사가 언론에 심심치 않게 나온다.
삼성 때리기에선 당과 의원이 함께 ‘윈윈’하고 있다. 의원도 유명해지고, 거대 재벌에 대항하는 진보정당의 이미지도 날이 서는 데 성공했다. 무노조 경영의 문제, 위치추적 문제, 족벌경영의 문제, 공정거래법 위반의 문제 등 뻗어나갈 사업이 하나둘이 아니다.
하지만 2004년 용산기지 이전 문제에 있어서는, 의원은 유명해졌지만, 그것이 민주노동당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심공약이라는 점을 부각하는 데 얼마나 성공했는지를 뒤돌아봐야 할 것 같다. 튀는 의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당은 당시에 다른 사업에 집중하고 있었고, 최소한의 사업 포트폴리오 관리를 못하고 있었다.
2004년 정기국회에서 민주노동당은 어떤 기준으로 정세를 판단하고, 어떻게 당력을 배치했는지, 다시 한번 곰곰이 따져봐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