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안법, 언론개혁법, 사립학교법, 과거사법 등 이른바 ‘4대 개혁 입법안’을 두고 2004년 9월23부터 10월20일까지 유지됐던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 그리고 민주당(이하 의석순)의 ‘3당정책조정회의’를 3당은 ‘개혁공조’라고 불렀다.

이 개혁공조라는 개념에 대해, 1년이 조금 지난 지금 속편하게 받아들이는 민주노동당 내 인사는 드물다. ‘개혁공조’라는 표현 자체가 적절치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004년 정기국회에서 민주노동당의 정치사업을 관통하는 가장 큰 변수가 개혁입법과 관련된 열린우리당과 공조였고, 세상은 이것을 ‘개혁공조’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공조는 1달도 지나지 않아 ‘깨어졌고’, 이후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을 ‘압박’한다며 연인원 몇백명이 참가한 농성을 벌였지만, 개혁입법은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이리하여 이 개혁공조는 민주노동당 내부에서 일종의 ‘금기’의 영역으로 치부됐다. 당사자들로서는 다시 입에 올리기도 불편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입을 다문다고 세상이 귀를 닫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공조 파기 서둘지 말자”

2004년 10월18일 저녁, 민주노동당 최고위원들과 의원단이 중앙당 회의실에서 연석회의를 시작했다. 이날 연석회의의 주요쟁점은 4대개혁 입법안과 관련한 당의 정치적 선택의 문제였다. 바로 전날인 17일, 열린우리당은 정책의총을 통해서, 4대 개혁입법안과 관련된 당론을 정한 바 있다. 어느 하나 민주노동당 입장에선 받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특히 핵심 쟁점이었던 국가보안법의 경우는 열린우리당이 ‘형법보완’으로 기울어지면서 이미 공조 파기는 기정사실화 된 상태였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공조를 깨느냐였다.

논의에 앞서, 정책위와 기획조정실 실무자들이 열린우리당의 안과 민주노동당의 안의 핵심 차이점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했다. 실무자들의 다수의견은 파기를 선언하고 독자행보를 시작할 때라는 것이었다. 이어진 논의. 원내의 정서를 이해하고 있는 의원단은 열린우리당이 결코 개혁입법 특히 국가보안법의 문제로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최고위원들에게 설명했다. 하지만 몇몇 인사들은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민주노동당이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쉽게 결론을 낼 것 같았던 논의는 3시간 가까이 늘어졌다. <상자기사1 참조>

‘성급한 공조파기 선언은 당의 운신의 폭을 좁힐 수 있다’는 명분을 공유하며, 시민사회단체 들과 연석회의,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회동 등을 추진하는 것을 정리하는 선에서 이날 연석회의는 끝이 났다.

다음날부터 민주노동당의 행보는 ‘지체’를 거듭했다. 시민단체들과 연석회의는 의례적인 수준을 넘지 못했다. 수구 대 개혁의 대격돌 와중에 10석의 진보정당은 그냥 3.3%의 미니정당이었을 따름이었다.

열린우리당은 20일 개혁법안을 독자발의 했고, 민주노동당은 서둘러 공조파기 선언을 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의 파기 선언을 가슴아파 하지 않았다. “(독자)발의 이후에도 (민주노동당, 민주당) 양당과 계속적 협력을 해가도록 노력하겠다”(천정배 당시 원내대표의 독자입법발의 기자회견)는 속편한 소리를 했을 따름이다. 다음날인 21일, 민주노동당은 자체 입법안을 독자발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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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단추는 ‘야4당공조’

민주노동당의 본격적인 원내공조의 시작은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이었다. 2004년 7월14일 예결위 상임위화 문제로 시작된 야당끼리의 ‘손잡기’는, 8월 중반이 지나면서 △예결특위 일반 상임위 전환 △노사관계 진단 및 해법 △연기금관리방안 등에 대한 논의를 이어갔고, 카드대란 국정조사 추진에 합의했다. 8월말에는 야4당 경제대토론회까지 개최했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모자라는 대여 압박의 명분을 민주노동당으로부터 수혈받았고,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자당의 정책을 주장할 수 있는 ‘마이크’를 확보한 셈이었다. 이른바 ‘연단론’의 시작이었다. <상자기사2 참조>

그러나 이 야4당공조는 오래 가지 못했다. 9월 정기국회가 시작되고, 열린우리당이 4대 개혁입법안을 내세우자 민주노동당은 급속히 개혁 이슈로 빨려 들어갔다.

야4당공조 때까지만 해도 공조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듯 보였던 민주노동당은 개혁공조로 접어들면서 국면조정 능력을 급격히 상실했다. 9월 중순 공조 틀을 만드는 과정에서 4개 개혁입법과 함께 민주노동당의 요구로, 재벌개혁, 정치개혁을 함께 다루기로 합의했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한번도 다뤄진 적이 없다. 사실, 4대 입법과제 자체가 열린우리당이 제기한 ‘전선’이었고, 주도권은 철저히 여당에 있었다.

목욕탕에 들어갈 때도 발가락부터 담가보는 법. 왜 민주노동당은 첫 원내진출 이후 첫 정기국회에서 자당의 조정권을 상실할지 모르는 위험한 선택을 했을까. “여론의 압박이 있었다. (야4당공조 때) 왜 ‘한나라당하고 공조하냐’는 당내 비판이 부담이 됐던 것도 사실이다.”(천영세 의원단대표) 심상정 의원단 수석부대표도 이와 비슷한 증언을 하고 있다.


통제 불능은 어디서 왔나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 사이에는 실개천이 흐르지만 민주노동당과 양당 사이에는 장강이 흐른다”는 말은, 2002년 대선 이후에 민주노동당의 명제로 자리 잡았다. 이 명제는 열린우리당과 공조하면 ‘선’이고, 한나라당과 공조하면 ‘악’이라는 이분법을 상당 부분 교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위 천 대표나 심 수석부대표의 말은 야4당공조를 깬 핵심적인 배경은 아니다.

문제는 오히려 ‘연단론’에 대한 이해의 차이에서 나왔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심상정 부대표의 말이다. “내가 말한 연단론은 야당공조가 중심이었다. 개혁공조는 사실 ‘원내대표급’에서 시작됐고, 나는 실무조정을 했다. 개혁공조를 내가 추진했다고 보는 것은 사실관계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미 벌어진 판에서 수습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또한 모든 과정을 의원단총회 등 공식절차를 거쳐서 진행했다. 실무를 책임진 수석부대표가 책임질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단론’을 주창한 심 수석부대표지만, 그 역시 ‘연단’과 ‘개혁’이 만났을 때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지 못했다. ‘연단’은 통제되고 특히 ‘생중계’ 될 때에만 위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개혁’은 민주노동당의 의제가 아니었다. ‘연단’에 ‘개혁’ 의제가 올라오게 되면, 그 ‘연단’은 더 이상 민주노동당의 것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정기국회가 중반을 넘어가고, 날씨가 추워지면서 민주노동당의 정치행위는 통제 불능 상태에 빠졌다. 진보정치연구소의 정책브레인그룹을 중심으로 거친 반대여론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상자기사3 참조>


“어차피 우리의 독자 의제는 공조가 불가능하다. (열린우리당과) 공조가 가능한 것은 노무현 정부가 말하는 개혁과제들이다.” 심 수석부대표는 개혁공조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이렇게 말해 왔다. 즉, 원내 정치의 중심 행위자는 정치권의 현실을 냉정히 보고 있었다는 말이다.

또한 개혁공조는 분명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개혁공조는 열린우리당의 개혁이 허구를 폭로했다. 또한 개혁정당이 쉽게 개혁을 포기하지 못하도록 다잡은 측면이 분명 있다. 이에 대한 평가는 아직 이뤄지지 않고 있다.”(김용신 원내기획실장)

하지만, 원내정치의 중심 행위자들이 안이하게 본 것은 다름아닌 당내 정치였다.<상자기사 참조>이것은 민주노동당의 실력과 독자성에 대한 과대평가였을지도 모른다. ‘목불인견(目不忍見)’의 사태는 개혁공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벌어졌다.

<상자기사 ①> “열린우리당 가서 물어보셔야죠”
모두에게 책임이 동일하지 않다. 선출된 권력은 모두 책임을 수반하지만, 더 능력 있는 사람은 더 책임져야 하는 게 정치집단의 ‘상도의’일 것이다.


18일 연석회의에서 실무자들의 브리핑이 끝나자, 한 최고위원은 이렇게 질문했다. “그런데 왜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힘을 실치 않는 것이죠?” 이 ‘우문’에 대한 실무자의 ‘현답’이다. “제가 답하기 적당하지 않은 질문 같습니다. 열린우리당에 가서 물어야 될 질문 같습니다.”


이미, 열린우리당은 개혁법안의 처리를 위해 모험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매일 아침, 신문만 봐도 알 수 있는 정국이었지만, 당시 연석회의에 참석했던 몇몇 ‘선출된 권력’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나고 나서는 더 확실하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열린우리당이 개혁법안에 힘을 쏟을 것’이라는 정세분석은 정치적 패착(敗着)을 부르는 지름길이었다는 사실이다.


두 가지 시사점이 있다. 하나는, 개혁공조를 추진하되 좀더 책임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당의 정치적 지형의 수준을 파악했어야 한다는 점이다. 설사, ‘열린우리당의 개혁의 허구를 폭로하는 것’이 개혁공조의 목적이었다고 해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을 ‘선출된 권력’이 당내에 있음은 이미 주지된 사실이었다. 자칫, 호랑이 등에 올라타게 되는 상황이 올 경우 그 책임은 호랑이의 것이 아니라 실은 올라탄 사람의 것이라는 말이다.


또 하나는 당시에 정치적 판단을 잘못한 ‘정치인’에 대해 민주노동당에선 책임을 묻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당원 직접선거를 통해 지도부를 선출하는 것은 힘들고, 돈도 많이 드는 일이다. 이걸 감수하고, 어렵게 지도부를 선출하는 이유는 그들이 확보한 대의성을 근거로, 정치적 선택을 하고, 그 선택을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다.


이날 연석회의 자리는 아직 날이 서기 전이었다. 거의 비슷한 주제로 격론이 벌어진 연말 논의 과정에서는 책임져야 할 정치적 언사를 한 당내 정치인이 적지 않다.

<상자기사 ②> 연단론이란?
‘연단론’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정치의 기본 전술을 이룬 것이었다. ‘(보수)정치의 쟁점국면에서 민주노동당의 주장을 밝힐 연단을 확보하자’는 주장인 연단론은 민주노동당의 원내협상, 대언론 사업 등 원내정치 전반에서 중심 기조를 이뤄왔다. ‘정책 사안이라면 어떤 정당과도 공조가 가능하다’고 호언해 온 민주노동당의 총선 때부터의 방침이 원내 정치 과정에서 구체화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부동산 문제, 카드국정조사 문제, 연기금 문제 등은 야4당 공조(사실상 한나라당과의 공조)를 통해 여당을 압박하며, 민주노동당의 주장을 부각시키고, 개혁입법의 문제에서는 열린우리당과 협력해 한나라당의 압박하는 형태로 이뤄져 왔다. 이 중심에는 원내협상의 실무조정을 총괄한 심상정 의원단 수석부대표가 있다. 이 연단론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는 측면이 있다.


“연단론의 결과가 어떻다고 말하기 전에 배경이 무엇이었나를 먼저 봐야 한다. 10석, 전체의 3%밖에 확보하지 못한 상황에서, 사실상 상원의 역할을 하는 교섭단체의 전횡과 싸워야 할 상황이다. 우리의 의견을 국민에서 전달할 통로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목받는 공간을 이용해서, 우리 이야기를 전하려고 했던 것이다. 연단론은 사실상 ‘생존전략’이었다고 봐야 하며 여전히 유효한 전략이다.”(김용신 의정정책실장)


“민주노동당은 주요 사안에 대해, 병합심리 전술을 썼다. 4대 개혁입법 관련 공조가 그런 것 중 하나인데, 그것은 실패한 전술이다. 당의 존립근거와 불일치하는 전술이며, 당의 지지기반을 축소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빈곤과 양극화를 해결하라는 국민적 요구로 원내에 진출했다. 하지만 그건 하지 않고, 거의 모든 당력을 공조에 쏟아 부었다. 이것이 문제다.”(김정진 법제실장, 이와 관련한 자세한 인터뷰는 후에 다시 소개할 예정이다)


이같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연단론의 옳고 그름을 떠나) 원내전술과 관련된 논쟁이 과거 민주노동당의 주요 논쟁 지점인 ‘운동권 교리논쟁’보다는 훨씬 더 진보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현실 정치에서의 민주노동당의 처세, 더 나아가서는 장기적인 진보정당의 성격 규정까지를 포괄하는 ‘포지티브’한 논쟁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는 뜻이다. 이 논쟁에서, 과거 정파 즉 자민통-좌파, 국민파-중앙파의 구분은 이미 희미해진다.

<상자기사 ③>

최소한 3가지 일은 벌어졌을 것이다. △마치 ‘사람이 개를 문 것처럼’ 뉴스가 됐을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아무도 민주노동당이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며 △열린우리당은 민주노동당과의 교섭을 준비하며 좀더 많은 정치적 예산을 잡거나 아니면 한나라당 설득에 더 힘을 기울였거나 했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에게 국가보안법 폐지는 ‘관에 못질을 하는 일’이었지만, 집권당에게는 ‘재집권’의 초석을 닦는 정국개편 카드였다(결국 151석을 쥐고도 실패했고, 2005년 가을에는 연정이라는 좀더 민망한 정국재편을 카드를 꺼내들었다). 누가 더 마음이 급했을지 답은 뻔하다. 너무 허황된 상상일까. 좀더 구체적인 상황을 들어보자.


민주노동당이 열린우리당과 공조가 한창 무르익던 시점이었던 9월16일부터 22일까지, 7일간 전국비정규직연대회의(준)(이하 전비연)은 “정부여당의 비정규직 입법안의 폐기”와 “비정규권리입법(민주노동당 단병호 의원 대표발의안) 쟁취”를 요구하며 열린우리당 당사 농성에 들어갔다. 점거 농성자의 태반은 민주노동당원이었다. 당시 전비연은 5일간 단식농성 끝에 이부영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을 면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점거 당일 간단한 논평 이외에는 말을 아끼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다음날인 23일 3당 수석부대표 회담을 시작으로 ‘개혁공조’의 막이 올랐다.


‘YH무역 노동자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했을 때, YS는 박대하지 않았다’고 말할 상황은 아니었을까. 전비연의 점거를 대여 압박카드로 사용하며, 비정규 입법전술과 개혁공조 전술을 짤 여지는 없었을까.


“국회 나름의 원리가 있다. 그걸 다 부정할 순 없는 것이다.”(천영세 의원단대표)


“공조와 당시 점거는 별개의 사안이었다.”(단병호 의원)


당 의원들의 말이다. 하지만 최초 개혁공조를 시작하면서, 또한 공조가 진행되면서 민주노동당 원내전술의 기본전제는 “개혁공조는 어차피 깨질 공조”(심상정 수석부대표)라는 것이었다. 무엇이 아까웠을까.


“개혁 공조의 문제점은 결코 전술의 잘잘못 여부가 아니다. 우리에게 전략이 없다는 것, 이것이 진짜 문제다.”(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상임연구위원, <진보정치> 197호 기고문 중)

<상자기사 ④> 중심을 잃고 빨려 들어갔다
 최근 유행하는 말 중에 ‘블루오션’과 ‘레드오션’이라는 말이 있다. 블루오션은, 틈새시장 개척이 아니라 경쟁자 없는 거대 무경쟁 시장에서 싸우지 않고 이기는 대승전략을 뜻하는 말이고, 레드오션은, 이미 만들어진 시장에서 타기업(정당)과 경쟁해서 이익을 쟁취하는 것을 뜻한다.


사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처럼 성공적으로 첫발을 내딛은 블루오션 전략이 없다. 한국사회에서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의제들을 성공적으로 개발하고 안착시키면서 10석이라는 적지 않은 의석까지 확보한 것이기 때문이다. 부유세, 무상교육, 무상의료라고 말하면서, ‘빨갱이’ 소리 듣지 않게 된 것도,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을 민주노동당이 성공적으로 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내진출 이후 첫 시험대라 할 수 있었던 개혁공조의 와중에서 민주노동당은 드넓은 자기 땅을 개간하기보다 ‘개혁’이라는 레드오션에 당력을 집중했다는 것을 부정하기 어렵다.


이미 집권당이 ‘국가보안법의 철폐(또는 개정)’을 이야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개혁’은 군부가 몰락한 ‘87년체제’ 이후 주류 정치권이 가장 진부하게 하는 말이다. 개혁의 완수는 개혁세력이 주력할 일이고, 이와 관련해 민주노동당이 해야 할 일은 유능한 당직자 한 두명이 촌철살인 논평 쓰고, 말솜씨 좋은 의원이 입장발표 브리핑 정도만 열심히 하면 충분한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힘을 보태 주려고 해도, 민주노동당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10석 더해주는 것 이상은 어렵다. 이미 노출된 의제, 명시된 쟁점인 만큼 신선한 정치세력의 역할로 비춰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말은 이렇게 표현되기도 한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되지 않는 것처럼 민주노동당의 국가보안법 폐지 입장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노회찬 의원, 2004년 7월21일 <난중일기> 중)


두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하나는, 개혁세력과 연대를 통해서 ‘민주주의를 완성하는 것’을 민주노동당의 중요한 임무로 보는 당내 세력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 적절한 정치감각과 기동성, 확실한 중심만 있었다면 포트폴리오 완성의 차원에서 환영해야 할 일이다. 현실정치의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한다는 차원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요소였다. 문제는 ‘정치감각과 기동성, 확실한 중심’, 이 세 가지가 모두 부족했다는 점일 것이다.


여기서 두번째 문제가 돌출된다. 서 있는 위치의 좌표도 불확실했고, 전략도 부정확했다. 현실정치에서 가장 힘 있는 두 정치집단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싸움 와중에 원내소수정당은 중심을 잃고, 빨려 들어갔다. 마치 고공비행 중이던 비행기에 구멍이 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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