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결정하고 실천하는 길목에서 두 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하나는 전농 내부적으로 민주노동당 지지에 대한 확고한 의견 일치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농민들에게 민주노동당은 낯선 존재였다는 사실이다.

전농의 중요한 한 축인 전남도연맹쪽이 민주노동당 지지에 대해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었고, ‘찬성’하는 쪽도 확신을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2003년 11월의 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동당 지지를 밝히는 정치세력화 안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전농은 표결을 감수해야 했다.<상자기사1 참조> “중요한 문제를 두고 만장일치가 아닌 표결로 처리한 것은 전농 역사상 유래 없던 일”이라는 전농 관계자의 말처럼,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의 길은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일단 민주노동당을 통해 정치세력화를, 좁게는 4월 총선을 돌파하겠다는 쪽으로 의지를 굳힌 전농 지도부에게, 농민 출신 국회의원을 당선시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과장한다면, 전농이 미는 농민 출신 민주노동당 국회의원후보가 당선되느냐 마느냐는 당시 전농 지도부에 대한 재신임의 성격까지 갖고 있었던 것이다.

배수진을 친 농민들. 절박한 심정. 전농 지도부의 마음은 무겁기만 했다. 농민들은 민주노동당의 ‘새내기’였다. 민주노동당의 ‘대주주’인 민주노총 출신의 단병호, 심상정 후보, 창당 때부터 지도부를 꾸렸던 천영세, 최순영, 노회찬 후보, 당권자의 50% 가까이를 아우르고 있는 ‘자민통’ 계열의 ‘1순위’ 후보인 이영순 전 울산 동구청장 등, ‘기라성’ 같은 후보들이 앞서 있는 상황이었다. .

당시 지지율로는 당선 안정권은 최소한 4~5번. 농민 후보가 이 안정권 순번을 얻을 수 있을지 전농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농민을 우선 배려해 달라”

비례대표 경선방식을 정했던 2월20일 중앙위 전날 저녁, 당 지도부와 전농 및 전여농 지도부가 간담회를 가졌다. 당사 부근 한 식당에 둘러앉은 양 조직 지도부의 관심사는 당연히 비례대표 경선방식이었다.

“사실 아무것도 요구하고 싶지 않다. 당원 직선으로 선출되는 당적 질서를 존중한다. 하지만 현장을 설득하려면 뭐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농민후보에 대한 배려를 해 달라. 농민후보가 국회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 농민후보가 앞 순번에 우선배정 될 수 있도록 해 달라.” 문경식 전농 의장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문 의장은 마침 이날 전남도연맹을 방문하고 상경해, 회의에 참석한 터였다. 당초부터 민주노동당 지지에 탐탁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전남도연맹을 방문한 자리. 문 의장은 동지들로부터 ‘험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민주노동당 경선에 들러리 서는 거 아니냐.”, “아무 보장(비례대표 우선순위)도 받지 못하고 지지를 결정한 것은 잘못.” 전남 보성 출신으로 지역농민운동을 일구고 이끌었던 문 의장의 심경이 어떨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동지들을 설득하던 문 의장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당 질서는 존중한다, 우리 입장도 편한 것은 아니다, 어떻게 배려해 줄 수 없겠느냐….' 문 의장이 당 지도부에게 최소한 농민 의원을 한 명이라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싶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당원 직선 이외에 비례대표 순위를 결정할 다른 방법은 아무 것도 없었다. 민주노동당에서 ‘배려’는 ‘원천봉쇄’ 돼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보장해 드려야지요’라고 대답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더라도, 당 지도부는 아무 것도 약속할 수 없었다. “당원들이 현명하게 판단할 것은 기대한다.” 당 지도부의 답이었다.


‘결단’ 그리고 ‘눈물’

전농은 비례대표 경선을 정면돌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발목을 잡는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후보였다.

농민운동의 역사가 녹녹치 않아서일까? 농민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은 하나같이 피선거권이 제한돼 있었다. 정광훈, 정현찬 전 의장 등 민주노동당 당원들에게도 잘 알려진 농민운동의 ‘대표선수’들이 모두 그랬다. 후보등록 마감인 3월1일 직전까지 전농은 비례대표 후보를 정하지 못했다.

2월28일 밤, 전농 상무위원회, 각 도연맹 의장들과 총연맹 지도부가 모여 앉았다. 이 자리에서 문경식 의장은 결단을 내렸다. “강기갑 부의장을 후보로 내보내자.” 사실 이 결단은 대단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민주노동당 지지를 놓고 전농 내부에서 이견이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현직 부의장을 출마시킨다는 것은 또다른 반발을 불러올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도연맹 의장들은 즉각 반대 입장을 보였다. “2004년 당면한 쌀투쟁을 앞두고 두 명뿐인 부의장 가운데 한 명을 당으로 보내면 어떻게 투쟁을 이끌어 갈 수 있겠느냐”는 게 주된 반대 이유였다.

“전농은 지난해 11월 민주노동당 지지를 결정했다. 그리고 우리 후보를 국회의원으로 만들 것을 결정했다. 우리 내부도 어렵다. 현직 부의장을 보내는 것이 잘못된 결정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전농이 정치세력화를 결정했으면 전농답게 결정하자.”

문 의장의 호소에 도연맹 의장들이 결단을 내렸다. 어렵게 결정된 정치세력화. 조직 내부의 반발을 추슬러야 하는 부의장으로서의 책임감, 투쟁을 앞두고 당으로 ‘차출’되는 미안함, 그리고 비례대표 경선에서 당선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감. 강기갑 당시 부의장은 결정 과정에서 적지 않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한복? 수염? “저 이가 누구지?”

우여곡절 끝에 강기갑 당시 부의장을 후보로 내세웠지만, 문제는 여전히 산적해 있었다. 전농이 당내 질서, 정확히 표현하자면 당내 정파질서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어차피 조직선거가 될 수밖에 없는 비례대표 경선을 농민들이 치르는 데 있어서 최대의 ‘불안요소’였다.<상자기사2 참조>

게다가 대부분의 당원들은 사회과학 책에서나 농민 문제를 봤을 뿐이었다. 한복, 그리고 긴 수염. 강기갑 후보는 그 지명도만큼이나 전통적인 ‘운동권’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전농 지도부의 입은 바짝 타들어갔다. 농민 국회의원 배출에 실패할 경우, 전농 지도부에 대한 불신임으로까지 비화될 상황이었다.

선거 결과는 일반명부 3등, 전체 6등. 여성명부로 출마한 현애자 후보는 여성명부 4등, 전체 7등이었다. 강 후보와 일반명부 2등이었던 천영세 후보의 표차는 불과 21표. 다시 말하지만, 당시 일반적인 관측은 4등, 최대한 5등까지가 당선권이라는 관측이었다. 전농쪽 관계자들의 표정에선 만감이 교차했다.

“당원들은 강기갑이 누군지 모른다. 그저 농민 정치세력화가 중요하고, 전농을 신뢰하기 때문에 5,031표나 몰아주신 거고. 감사할 일이다. 그래도, 21표…. 당에서 오래 동안 헌신한 분이 많이 득표한 것이 당연하긴 한데,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당시 개표를 지켜보던 전농쪽 관계자의 말이다. 하지만 예비경선일 뿐, 본 게임은 아직 시작되기 전이었다. 전기환 전농 정치위원장은 이런 말을 남기며 현장으로 표표히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10%면 한 명(강기갑 후보), 12%면 두 명(현애자 후보) 아닙니까.”

<상자기사 ①>


당시 합의의 주요 내용은 △민주노동당은 차기 정기당대회에서 당명개정 여부와 재창당을 포함한 확대발전방안을 결정하며 이를 위한 추진기구를 설치한다 △민주노동당 강령과 당헌에 농민의 중요성을 적극 반영하고 당헌과 당규는 오는 11월1일 임시당대회까지 개정한다 △민주노동당 대의기구와 각급 기관에 농민부문 대표성 반영 및 농민대표 의회진출을 위해 적극 노력한다 △농민위원회를 신설하고 농민위원장은 전농이 추천한다 등이었다.


이 합의안은 민주노동당쪽에서는 10월23일 중앙위와 11월1일 임시당대회에서 승인됐으며, 전농쪽에서는 11월4일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승인됐다. 이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쪽에서는 ‘당명 개정여부를 포함한 재창당’이라는 합의안의 문구를 두고 좌우파 간에 논란이 벌어졌지만, 최종적으로는 압도적 찬성으로 합의안을 승인했다. 반면 전농은 ‘쌀투쟁을 앞두고 특정 정치세력만 지지하는 것은 전술상 맞지 않다’, ‘농민대표 의회진출이 보장돼 있지 않다’ 등의 문제제기가 잇따르면서 상당한 진통을 겪었다.


당시 협상단은 민주노동당쪽에서 천영세, 김형탁 당시 부대표, 노회찬 당시 사무총장, 김준기 당시 농업회생운동본부장, 김창현 당시 울산시지부장이 참여했으며, 전농쪽에서는 이승열 당시 부의장, 박흥식 당시 사무총장, 전기환 당시 정책위원장, 채경희 당시 경북도연맹 정치위원장이 참여했다.
<상자기사 ②> “중앙파가 뭐예요?”
“그러니까, 중앙파와 화요모임이 누구누구를 밀고 있고, 진정추그룹이 누구를 밀고 있고, 국민파가 누구누구를 밀고 있고, 연합 쪽에서 누굴 밀고 있으니까…, 강기갑 후보는 포지션을 이렇게 이렇게 잡아야 하는 거죠.” 당시 경선과정을 취재하던 한 기자는 답답한 마음에 강기갑 경선본부의 한 핵심관계자에게 ‘기자윤리’까지 무시하고 조언을 던졌다. 그런데 그 핵심 관계자의 대꾸가 ‘걸작’이었다.


“근데, 중앙파가 뭐예요?”


전농 내부에는 정파조직이 ‘실제로’ 없다. 중요한 결정을 표결로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단결’은 전농 내부질서 최대의 가치였다. 그런 전농이 비례대표 경선에 뛰어들며 최초로 보인 반응은 “당은 뭐 이렇게 복잡해”였다.


‘정파연합’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민주노동당은 물론, 국민파, 중앙파, 현장파의 경쟁이 ‘거의’ 공식화 된 민주노총의 복잡한 내부질서가 전농쪽의 입장에서 생소하다 못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심한 경우엔 ‘혐오증’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런 전농이 경선에 뛰어들며 웃지 못 할 에피소드들을 남겼다.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의 강기갑 후보에 대한 추천글을 놓고 벌어진 ‘소동’이 대표적인 경우였다.


전농쪽에선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당이니까, 노동자 대표인 민주노총 위원장의 추천이 있으면 득표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민주노총 대협실을 통해 추천글을 받았다. 그러나 민주노총 내에서도, 각각의 정파가 다른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으며, 현직 위원장의 추천글이 분란의 소지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전농은 몰랐다. 추천글이 공개되고, 각 선거본부에서 추천글의 진의를 파악하느라 난리가 나고 있던 시간에도, 전농쪽은 사태파악은커녕 안도의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남미영 당시 전농 총무국장(현 민주노동당 농민위원회 국장)의 말이다. “추천글을 받고 흐뭇한 마음에 당 홈페이지 게시판에 올렸죠. 그랬더니 난리가 난 겁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당 선거에 개입한다’는 말에서부터, ‘전농이 ‘XX파’와 붙었다’는 말까지. 얼마나 당황했는지, 하루 종일 게시판에 해명 쪽글 다느라 하루를 다 보냈습니다.”

<상자기사 ③>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이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결정한 것은 2004년 1월대의원총회에서다. 여성농민후보를 출마시킬 것을 결정하고, 상대적으로 정치사업에 진척이 빨랐던 제주여농 소속 현애자 남제주군 여성농민회장이 후보로 추천됐다. 전농과 마찬가지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정치세력화’를 결정하고, ‘무명’에 가까운 후보를 내세워 경선을 치르는 과정은 당연히 순탄치 않았다.


전여농은 회원이 1만명 정도 되는, 크지 않은 조직이고, 당도 전여농도 서로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전여농은 당내 경선을 치르며 선관위 차원의 유세 등 공식일정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비명을 질러야 했다.


또 하나 걸리는 것은 ‘돈’이었다. 1,500만원의 선거기탁금과 현애자 후보측이 써야 할 최소한 선거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전여농 입장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전여농의 각 지역조직은 수익사업을 벌이며 돈을 모았고, 순전히 회원들의 발품으로 마련된 돈으로 현애자 후보는 경선을 치렀다. 전남쪽에서 활동하던 한 전여농 회원은 총선 당시 이렇게 말했다.


“휴지하고 딸기잼 팔아서 1,500만원을 마련했다. 150만원도 아니고, 1,500만원을 그렇게 마련했다. 여성이 농민운동하기 위해선 집에서 ‘싫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 밀린 일거리와, 살림살이, 시부모 봉양까지 해야 하는 여성농민들이 집회라도 한번 나가려면 ‘미친년’소리까지 들어야 한다. 여성농민들은 총선에서 정말 헌신적으로 뛰었다. 어렵게 결심한 만큼 정말 열심히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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