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의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진보정당 이념과 노선의 실험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장점이자 존재 이유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형식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확장돼 왔지만, 이 과정에서 권력의 가장 큰 배경이었던 노동자-농민-서민들에게 돌아온 대가는 ‘양극화’였다.

탄핵과 열린우리당의 원내과반 의석 확보에서 출발해 열린우리당의 원내과반 의석 상실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으로 이어진 최근 1년에 걸친 ‘개혁세력’의 정치적 실험은, 민주노동당이 우리 사회에 왜 필요한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마치 ‘도돌이표’처럼 회귀하는 이 ‘성장 없이 분배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치울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민주노동당이라는 사실은 이제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됐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실험은 비단 이념과 노선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진성당원제, 당원직선제 등 정당개혁-정치개혁의 최선두에 섰고, 이 실험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게도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민주노동당이 역사적 원내진출을 달성한 지 1년하고도 4개월이 넘었다. 물론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동권’의 정당에서 ‘대중’의 정당으로, ‘선언’에서 ‘대안’으로, ‘계몽’에서 ‘참여’로. 민주노동당의 확장자는 오늘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매일노동뉴스>가 민주노동당의 실험을 정리한다. <편집자 주>




2003년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날, 단병호 당시 민주노총 위원장은 오랜 기간 함께 노동운동을 한 후배와 서울 근교 저수지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나란히 앉아 있었다. “위원장님, 내년 4월 총선에서 어떻게 하실 겁니까.” 후배의 질문에 단 위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위원장님, 정치하지 마세요”

“내가 감옥에 있으면서 편지를 천통 넘게 받았어. 그 편지 중에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는데, ‘위원장님 제발 정치는 하지 마십시오’라는 편지야. 기억에 남더라고….” 후배는 틈을 주지 않고 이렇게 되물었다. “천통 넘는 편지 중 왜 그것만 기억에 남습니까?”

4월 총선을 앞두고 가장 관심을 모았던 것 가운데 하나가 단병호 위원장의 출마 여부였다. 금속노조 사무처장을 마치고 민주노동당쪽으로 방향을 일찌감치 정했던 심상정 의원은 자연스럽게 비례대표 출마로 방향을 굳히고 있었다. 하지만 단 위원장의 거취 문제는 당시 많은 당원들과 노동운동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단 위원장의 지인 가운데에서는 비례대표 출마를 강력하게 권하는 사람도 있었고, 4월 총선 이후 당직선거에서 당대표로 출마를 권하는 사람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단 위원장의 결심. 단 위원장은 총선을 불과 두 달 남긴 2월 중순까지는 가타부타 입을 열지 않았다.

민주노총 집행부선거 기간 중이었던 2004년 1월 제4회 세계사회포럼 참석차 인도 뭄바이에 갔을 때도 위원장은 출마 여부에 대해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2월 초, 한 진보언론 기자들과의 술자리에서도 단 위원장은 “잠시 쉬고 싶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그러던 그가 어떻게 출마를 결심하게 됐을까. 2월20일 중앙위원회를 앞두고 단 위원장에 대한 출마 권유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단 위원장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노동운동을 해 왔던 이른바 ‘중앙파’ 계열의 활동가들이 단 의원의 거취를 놓고 분분히 의견을 교환하고 있던 상황에서, 당쪽 인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2월14일 오전, 단 위원장은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사무총장)을 만났다(이날은 양인의 회동 이외에도 다른 중요한 일들이 여럿 있었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후에 다루기로 한다). 일단 출마 결심 당시를 회상하는 단병호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2003년 말 지역본부장들의 송년회 자리에 꼭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마침 민주노총 위원장 임기가 끝나는 때이기고 하고, 인사나 할 겸해서 갔는데 그 자리에서 ‘출마를 결심하라’는 본부장들의 요청을 받았다. 사실 그때부터 출마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하며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다녔다. 2월에는 주로 당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의견을 들었고, 중순경에 출마 결심을 한 것 같다.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중요하다는 것은 사실 토론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 길에서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해서는 당시만 해도 고민이 있었던 때였다.”

부부 동반 출마는 득일까 실일까

2004년 2월초, 민주노동당 울산동구 지구당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이영순 전 동구청장의 비례대표 경선 출마 여부를 두고 잠시 논쟁이 있었다. 이영순 전 동구청장이 후보로 나가는 게 지역구 선거운동 과정에서 걸림돌이 될지 모른다는 우려였다.

이 전 동구청장의 남편인 김창현 당시 동구지구당 위원장(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이 이미 출마를 확정한 상황에서 부인까지 비례대표 후보로 총선에 나서는 게 지역주민들의 눈에 곱지 않게 보일 수 있다는 ‘걱정’이 선거를 치를 지역의 활동가들 사이에서 나왔던 것. 하지만 길지 않은 논쟁 끝에 이 전 동구청장이 비례대표 후보로 나서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당내 ‘자민통’ 계열의 활동가들은 주로 울산과 인천 그리고 경기도를 중심으로 활동해 왔다. 지역에 일찍부터 뿌리를 내리고 활동해 왔던 특성 때문인지, ‘대표급 선수’들은 이미 지역구 출마를 일찌감치 결정했던 상황이었다. 당내 ‘자민통’ 운동을 대표하면서 당원들에게 대중적으로 인지도를 확보한 사람 가운데 지역구 출마를 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최규엽 현 최고위원, 김창현 현 사무총장, 정형주 현 경기도당대표 등은 이미 출마 경험만 해도 두 번 이상씩 됐다.

<1회>에서 지적했듯이, 비례대표 경선에서 각 정파나 의견그룹의 핵심과제는 역시 ‘컨소시엄’ 구축을 통한 후보단일화였다. 이는 ‘자민통’ 계열이라고 예외는 아니었고, 이영순 전 구청장의 출마 여부 역시 여기에 연동돼 있었다. “이영순 전 동구청장이 출마를 결심하기까지에는 주변의 권유가 많았다.” 울산쪽 핵심 관계자의 말이다. 인천과 경기쪽에서 조정 역할을 맡았던 관계자들도 “이영순 전 동구청장의 출마에 대해 이견은 없었다”고 말했다. ‘자민통’ 그룹은 자파의 단일후보 가운데 한 명으로 이 전 구청장을 선택한 것이다.

이영순 의원의 말이다. “지역구 선거에 미칠 영향 때문에 우려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동구청장을 역임하며 쌓은 경험들을 당을 위해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성 진보정당 활동가로서, 구청장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한 사람으로서, 비례대표 경선에 나가 국회에서 뜻을 펼칠 마음이 있었다. 주변의 추천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남편인 김창현 당시 동구 후보도 나의 비례대표 출마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당시 지역구선거 승리에도 기대가 컸던 만큼 (부부 동반당선이라는) ‘새로운 역사’를 쓸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이제 세상을 관조하며 살고 싶었지만…”

‘중앙파’와 ‘자민통’만 바쁘게 움직인 것은 아니었다. 2월24일 마포의 한 고깃집, 천영세 당시 선대위원장(부대표·현 민주노동당 의원단대표)와 이원보 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 윤효원 당시 사무국장, 민주노총 정치국장으로 내정돼 있던 오동진 현 민주노총 사무차장이 모여서 천 위원장을 설득하고 있었다.

천영세 의원과 이원보 이사장은 70년대부터 함께 노동운동을 해온 ‘30년지기’, “이제 세상을 관조하며 후배들에게 조언하며 살고 싶다”는 천 당시 선대위원장을 이원보 이사장이 끈질기게 설득했다. “70년대부터 이어온 민주노조운동의 정통성을 지킬 사람이 누구냐.” 결국 이날 천 의원은 출마에 동의했다.

다른 한 축에서는 박순희 민주노총 지도위원이 최순영 당시 부대표의 출마를 설득했다. 또한 당시 새로 꾸려진 민주노총 집행부도 천영세, 최순영 두 부대표의 출마를 바라고 있었다. <상자기사 참조>

천영세 의원의 말이다. “오랜 시간 재야운동을 해 왔다. 출마를 결심하면서 고민이 많았다. 어쩌면 마지막 운동의 장이 제도권 국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가 일관되게 지켜온 원칙과 부합되는지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하지만 국민승리21 때부터 당을 만들어오는 과정에서 중요한 한 축으로 역할을 해 왔다. 첫 원내진출이라는 어려운 과제를 풀어가는데 내가 할 역할이 있다면 혼신을 다할 각오를 했다.”

최순영 의원 역시 “당선되느냐 마느냐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고 말했다. 최 의원의 말이다. “사실 내 관심사는 당선 여부보다 비례대표 경선이었다. 당원직선으로 비례대표 순위를 정하는 과정이 축제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고, 출마가 그것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26일 마포의 한 식당에 30여명의 사람이 모였다. 대부분이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이끌었던 노동운동의 원로들이었다. 천영세, 최순영 두 후보의 경선 준비는 이날부터 본격화 됐다. 이날 모임을 끝낸 뒤 후보 등록서류를 마련하는 실무 작업에 들어갔고, 27일 아침, 천영세, 최순영 두 후보는 첫번째로 비례대표 후보 등록을 마쳤다.

“지역구 출마보다 선대본부장이 옳았다”

2003년 12월, 총선을 불과 넉 달 앞둔 노회찬 당시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의 고민은 간단치 않았다. 지역구냐 비례대표냐. 노회찬 총장은 오래 전부터 서울(강서을)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그러나 울산이나 창원을 제외하면 지역구에서 민주노동당 후보로 출마한다는 것은 당선보다는 ‘희생’을 의미했다.

실제로 민주노동당 후보들은 몇차례의 선거에서 당선보다는 당을 알리고 당의 외연을 확장하기 위해 승산없는 전투에 나섰다. 이 때문에 당내에서는 당 지도부가 지역구 출마를 꺼린다는 비난 여론마저 있던 상황. 또한 권영길 당시 당대표가 지역구에 출마하는 상황에서 사실상의 ‘2인자’인 사무총장의 지역구 출마를 압박하는 여론이 적지 않았다.

노 총장의 주변에서도 “비난을 받을 바에는 (승산이 없더라도) 지역구에서 출마하는 게 장기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하는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1월 출범할 당 선거대책위원회의 선대본부장을 맡을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지역선거를 뛰면서 총선 전체를 진두지휘 한다는 것은 당의 역량을 감안할 때 여러가지로 어려운 일이었다.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의 말이다.

“일단 지역구 출마는 하지 않는다는 결심을 세웠다. 2월초, 강서을 지구당에 내가 지역구로 출마할 수 없음을 알렸다. 중앙당이 비례대표 선거를 이끌고 가야 했고, 선대본부장을 맡아 잘할 자신도 있었다. 지역선거를 하면서 선대본부장을 맡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일단 경선에 출마를 하되, 내가 높은 순위를 받는 것에는 욕심을 버렸다. 나는 선거에서 민주노동당 바람이 일어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승리로 이끌 자신이 있었다. 좀더 많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탄생하도록 최선을 다할지에 대한 선택의 문제였다.”

(강기갑, 현애자 의원 등 농민 출신 후보들의 출마과정은 다음회로 이어집니다 - 편집자 주)


물론 단병호 전 위원장과 심상정 전 사무처장이 ‘민주노총 선거에서 져서’ 당으로 방향을 잡았던 것은 아니다. 90년대 후반부터 민주노총의 중심축을 이뤘던 두 사람은 4기 임원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민주노총이라는 ‘틀’을 떠나는 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단 위원장은 비례대표 경선 출마, 당대표 출마, 외곽 연구소쪽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었다. 심 처장 역시 민주노총의 주축인 금속, 그 중에서도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금속노조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공로를 인정받는 대표적 노동운동가로서, 집행부선거 이전에 이미 ‘당행’을 결심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양인의 결심은 민주노총 신임 집행부의 고민을 전혀 덜어주지 못했다. ‘입장’이 다르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 게다가 신임 집행부는 당선과 동시에 총선체제로 들어가 민주노동당을 지원해야 할 의무가 있었고, 이미 기정사실로 된 원내진출 이후에도 민주노동당과 함께 해야 할 사업이 산적해 있었다.


민주노총 신임 집행부는 비례대표 경선에서 ‘올인’ 할 수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를 ‘관객’으로 만들 수도 없었다. 천영세, 최순영, 두 의원의 당선은 이같은 민주노총 신임 집행부의 고민이 가장 강력한 배경이 됐다. 오동진 현 민주노총 사무차장의 말이다.


“민주노총 선거가 끝나고 민주노총의 정파갈등이 첨예화 되고 있었다. 민주노총의 정파갈등이 당으로 옮아가는 것을 우려했고, 민주노총 신임 집행부 입장에선 피하고 싶던 상황이었다. 노동운동의 여러 세력들을 의견을 절충하고 조율할 수 있는 선배 운동가들이 국회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판단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