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통-국민파의 완승, 분열된 좌파의 패배

결과부터 이야기해 보자. 원내진출 이후 민주노동당호를 이끌 새 지도부를 선출한 6월의 당직선거. 그것은 이른바 ‘자민통’과 민주노총 ‘국민파’의 압승으로 끝났다.

‘자민통’과 ‘국민파’ 연합함대는, 당 출신으로 김창현 후보(사무총장)와 최규엽 후보(일반명부), 김미희, 유선희, 이정미 후보(이상 여성명부) 그리고 민주노총 출신으로 이영희 후보(일반명부), 박인숙 후보(여성명부), 이용식 후보(노동부문), 여기에 ‘친자민통’으로 분류되는 전농 출신의 하연호 후보(농민부문) 등 13명의 최고위원단 가운데 무려 9명의 당선자를 확보하는 기염을 토했다.

‘범좌파’는 4월 총선 때 대변인으로 활약했던 김종철 후보(일반명부) 한 명만 당선됐을 뿐이다. 이어 정책위의장 결선투표에서 진보정당운동의 산 증인이라 불리울 수 있는 주대환 당시 경남 마산합포지구당 위원장이 이용대 당시 경기도지부장을 꺾고 당선돼, 좌파의 ‘체면’을 지켰다. 의원단 호선으로 선출되는 의원단대표에는 천영세 국회의원 당선자(비례대표)가 됐다.

‘독식’의 우려는 현실이 됐고, 이에 따라 ‘9대2’의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다. 당시 당 안팎의 집계에 따르면 당내 좌우 세력분포는 4.5대5.5 내지 4대6 정도로 보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렇다면 선거 결과는 당내 의견분포를 정확히 대표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결과”

당직선거 개표 결과를 발표할 무렵, 좌파쪽에서 선거운동을 하던 활동가들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 돼 있었다. “당이 망하는 길을 택했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다. “밀리고 있었다는 건 알았지만 이렇게 크게 질 것이라는 생각은 안했다”는 한숨이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당시 중앙당 ‘요직’에 있었던 상당수의 좌파 활동가들이 ‘떠날지 말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민통쪽 활동가들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 “결과를 보는 순간 ‘큰일 났다’는 생각부터 했다. 물론 선거 막판에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독식체제로 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과는 우리에게도 충격이었다.” 울산연합의 한 활동가의 말이다. ‘세팅’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고, 그것은 모두에게 충격이었다.

5월 당직선거 결과는 불과 두 달 앞서 있었던 비례대표 경선 결과와도 큰 차이가 났다는 점에서 당내 활동가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상징성’이 큰 단병호 국회의원 당선자의 경우를 제외하면 양대 정파가 총력전을 벌인 후보들의 득표수에는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실제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단병호 후보를 선택한 당원은 ‘좌파’만이 아니었고, 강기갑 후보를 선택한 당원 역시 ‘우파’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압승과 완패’라는 결과는 당원들의 정치적 성향의 분포를 정확히 반영한 것이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볼 때 논란이 됐던 1인7표제(여성·일반명부)의 패해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었다.


또한 평가의 장으로써의 선거라는 측면에서 봐도 4월 총선을 성공적으로 이끈 전 집행부를 책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총선 선대본의 총괄을 담당했던 선대본부장, 기획조정실, 조직실, 총무실, 대변인 및 홍보실의 핵심 실무자들은 대부분 ‘좌파’ 성향이었다. 이들은 4월 총선을 승리로 이끌었다. 즉, 자민통의 압승을 ‘좌파의 무능과 실책에 대한 당원들의 평가’라고 해석할 여지도 없는 것이다.

승패를 가른 변수는 비례대표 경선과 비교할 때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지명도를 비롯한 각 후보들의 ‘무게’. 또 하나는 각 정파의 ‘총력전’. 그렇지 않고서는 이같은 결과는 나오기 힘든 것이었다. 그리고 한쪽의 조직력이 다른쪽의 그것을 압도했다. 당직선거 과정은 실제로 그랬다.

‘올세팅’ 총력전=‘자민통’과 ‘국민파’

민주노동당  당직선거 결과
최종 투표율 62.15%. 총 당권자 2만6천2백78명 가운데 1만6천3백36명이 참여.


◇ 대표

김혜경 10,702표(64.36%)-당선
정윤광 4,116표 (24.75%)
김용환 1,469표(8.83%)


◇ 사무총장
김기수 6,825표(41.04%)
김창현 9,481표(57.01%)-당선


◇ 정책위의장

1번 주대환 4,882표(29.36%)-결선투표 진출-당선
2번 이용대 6,686표(40,21%)-결선투표 진출
3번 허영구 4,098표(24.64%)
4번 성두현 690표 (4.15%)


◇ 농민부문 최고위원

하연호 14,525(87.35%)-당선


◇ 노동부문 최고위원

이용식 14,091(84.74%)-당선


◇ 최고위원(여성명부)

1번 김미희 9,611(57.80%)-당선
2번 홍승하 5,255 (31.30)
3번 이정미 8,524(51.26%)-당선
4번 유선희 8,353(50.23%)-당선
5번 김진선 2,799 (16.83%)
6번 박승희 3792 (22.80%)
7번 박인숙 7,726(46.46%)-당선
8번 김은주 5,261 (31.64%)
9번 황혜로 3,269 (19.66%)
10번 정현정 5,077 (30.53%)
11번 김혜련 3,401 (20.45%)


◇ 최고위원(일반명부)

1번 김용한 2,434 (14.64%)
2번 양연수 1,948 (11.71%)
3번 박창완 2,121 (12.75%)
4번 최규엽 7,216 (43.39%)-당선
5번 이영희 6,400 (38.49%)-당선
6번 이부영 2,573 (15.47%)
7번 차봉천 1,739 (10.46%)
8번 김종철 6,308 (37.93%)-당선
9번 김해근 1,625 (9.77%)
10번 김형탁 4265 (25.65%)
11번 민동원 1,840 (11.07%)
12번 남만진 1,269 (7. 63%)
13번 김성진 5,872 (35.31%)
14번 신보연 2,213표 (13.31%)
경선방식이 정해진 직후부터 자민통과 국민파는 치밀하게 준비했다. 내부적으로는 최소출마 방침, 다시 말해 ‘주요직책만 확보하자’는 방침이 서 있었지만, 이는 지켜지지 못했다. 자민통쪽 선거 실무를 담당했던 한 활동가는 “자천 타천으로 추천되는 후보가 무려 26명에 달했고, 부문별 지역별로 추리고 배분하다 보니 ‘올세팅’은 불가피했다”고 말했다.

자민통쪽의 후보군 선정은 ‘위’에서부터 차례로 정해졌던 것으로 전해졌다. 일단 대표 경선에서 김혜경 후보(현 민주노동당 대표)의 지지가 정해진 이후, 사무총장과 정책위의장을 놓고 자민통 내부에서는 ‘내전 수준’의 경쟁이 있었다.

사무총장 후보로 울산연합의 리더인 김창현 당시 울산 동구지구당 위원장, 정책위의장 후보로 동부연합의 ‘맏형’격인 이용대 당시 경기도지부장을 확정됐다. 그 다음으로 여성과 일반명부 최고위원 후보가 정해졌다. 이 과정에서 울산, 인천, 경기동부 등 자민통 계열 각 지역연합의 핵심 활동가들이 직접 조정을 담당했고, 여기에 자민통쪽과 가까운 부문운동 대표자와 지역연합에 속하지 않았던 자민통 인사들이 함께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조정 테이블은 선거를 앞둔 시기 빈번하게 열렸다.

또한 조직표만 놓고 볼 때 자민통쪽의 표가 좌파쪽의 표를 상회하는 상황에서, 민주노총 국민파와 당내 자민통 계열이 손을 잡았다. 이 연합은 선거판도를 완전히 지배했다.

민주노총 현직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는 국민파는 공개적으로 활동하진 않았지만, 자민통-국민파의 선거연합은 당시 선거에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민주노총 집행부쪽의 ‘추천’을 받았던 이영희, 박인숙 최고위원 후보는 자민통 공동선본 사무실에 자주 드나들었으며, 유세 일정 등 선거운동 기간에도 공조체제를 유지했다.

이미 비례대표 경선을 치르며 상당한 신뢰관계를 쌓아 왔던 당내 자민통 그룹과 민주노총 국민파는 최고위원 경선에서 좀더 긴밀한 협조관계를 구축했던 것이다.

갈라진 좌파=‘무능’ 또는 ‘무기력’

반면 좌파쪽은 이합집산을 거듭하고 있었다. 사무총장 후보로 김기수 당시 대구시지부 위원장을 내세우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정책위의장의 경우는 공동후보를 내지 못했다. 급기야 여성과 일반명부 최고위원의 경우는 각각 2명의 후보만 지지후보로 정하는 수준에서 선거전을 치렀다. ‘범좌파’의 역량이 총집결돼 치른 선거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세팅 ‘실패’였고 당시 상황으로 보면 세팅할 생각도 없었다. 내부에서도 ‘선출자의 수보다 당권자 1인당 주어진 표수가 절반 이하가 되지 않으면 독식선거가 될 수 있다’는 지적이 있었고, 이것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로 선거전을 치렀다.” 화요모임쪽 주요 활동가의 말이다.

(좌파 쪽에서도 긍정하는 사람이 있고 부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난 비례대표 경선에서 노회찬 후보를 지지후보로 정하는 문제를 두고 이견을 조정하지 못한 여파는 작지 않았다. 당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상황에서 진정추 계열의 일부는 ‘17인 모임’과 분리해 독자행동을 시도했고, 이는 다시 최고위원 선거구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진정추 계열은 사무총장 후보를 놓고서는 다른 좌파 그룹들과 함께 김기수 후보를 지지했지만, 정책위의장 후보 문제에 있어선 주대환 후보를 독자 후보로 내세웠다. 화요모임, 민주노총 중앙파 등 좌파들은 정책위의장 후보 가운데 허영구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에 대해 ‘심정적 지지’가 있었지만 합의된 지지 후보로 선정하지는 않았다. 결국 정책위의장 경선은 결선투표까지 가게 됐다.

여성·일반명부 최고위원 선거에서는 진정추 계열과 화요모임, 중앙파가 공동선본을 꾸리지 못했고, 각 명부당 2명씩 지지후보를 정하는 수준에서 선거를 치렀다. 이런 상황에서 갈라진 좌파들이 공동선본을 만들어 조직을 총동원한 자민통-국민파와 경쟁하는 것은 처음부터 결과가 뻔한 하나마나한 싸움이었다.

발목잡힌 기회, 퇴행적 정파관계

원외 시절 민주노동당의 입장과 활동을 관심 있게 바라보던 사람들의 범위는 사실 ‘진보진영’으로 한정돼 있었던 게 사실이다. 현실정치에 개입력이 약했던 만큼 민주노동당의 ‘정치활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당내 정치’였다.

4월 총선을 거쳐 원내진출을 이루면서 민주노동당의 정치영역도 국민을 대상으로 한 것으로 바뀌기 시작했지만, 이 변화가 당시 당직선거에 반영되기에는 관성이 더 컸다. 그러기에는 시간도 부족했고 인물도 부족했다.

첫 원내진출이었고, 새로운 지도체제를 도입하던 시기였던 만큼 당시 당직선거는 간극을 해결하며, 새로운 리더십을 발굴하는 계기가 됐어야 했다. 총선 전후 상황을 거치며 장기적으로 볼 때 대중정치에서 실력을 보이는 세력이 당내 권력 또한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당시 당직선거의 가장 중요한 변수는 ‘내일에 대한 비전’보다는 ‘지난 시기의 세력관계’ 즉, 정파들의 조직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민주노동당에 닥친 새로운 정치환경 역시 ‘지난 시기의 세력관계’를 중심으로 해석됐다.

바뀐 정치적 영향력과 정세, 민주노동당 창당 이래 최대의 도약기에 ‘운동권 교리논쟁에서 출발한 머리수 싸움’을 한달 동안이나 벌였다는 것은 어찌 보면 ‘구민주노동당’과 ‘신민주노동당’의 싸움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난 1년 동안 민주노동당이 최고위원제도를 안착시키지 못했던 원인을 ‘처음의 미숙함’에서 찾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답이 나오게 된다. 문제의 핵심은 퇴행적 정파경쟁이었다.

<인터뷰>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
원내진출 1년을 즈음하여, 민주노동당 부설 진보정치연구소는 당내 시스템에 대해 활발한 의견개진을 하고 있다. 꼭 진보정치연구소뿐 아니라, 당내 시스템의 문제를 거론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퇴행적 정파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정책기획실장에게 당시 당직선거에 대한 평가를 들었다.


- 당시 당직선거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대국민 정치에서는 소수인데 민주노동당 내에서는 다수를 점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국민들의 지지에 의해 원내진출을 한 대중정당의 입장에서는 (정파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당시의 선거역학구도는 퇴행적인 것이었다. 세력 대 세력의 표싸움이 없을 순 없겠지만 당시 출마후보 간의 차별성이 없었던 것이 문제였다. 각 정파는 유권자를 의식한 후보선정을 했다기보다 정파질서에서 후보로 내세우기 적당한 사람을 후보를 내세웠다. 이러다보니 당시, 경선과정에서도 중장기 전략을 제시한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심지어 최고위원선거에 나온 후보가 ‘아직 당을 몰라서’ 식의 용감한 발언을 한 경우도 있었다.”


- 당시 경선 과정에서 후보자들이 가장 많이 했던 말이 ‘의원단에 대한 통제’였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어땠나.
“대언론 통로를 가지고 있고, 대국민 정치에서 주도권을 갖고 있는 의원들은 애당초 선출될 최고위원들에게 통제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원들이 당 정책조차 숙지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들에게 통제 당하려고 하겠는가?”


- 원내 소수파였던 자민통 세력이 최고위원 선거에서 사활을 걸었지만, 좌파들은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분석도 있다.
“의원수로 봐도 좌파는 다수가 아니다. 하지만 단병호, 심상정, 노회찬, 조승수 의원 등 지명도가 높은 의원들은 (당내 정파로 보면) 좌파로 분류되는 사람들이었고, 발언권도 컸다. (당내 정파관계에서 좌파라고 보기 어려운) 권영길 의원과 천영세 의원은 이전 지도부의 일원으로 의견을 조율하고, 협의해 온 경험을 공유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당선자들 내부에서도 정치적 경험, 당내외의 정치력, 인지도의 격차가 분명 존재했다. 정치적 능력과 권력 상에 우위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좌파는 의원단 내에서 다수였다.”


- 당직공직분리로 인한 문제라고 보는가.
“문제는 분리제가 아니었다. 정파 단합구조 때문에 발생한 문제다. 분리에는 명분이 있다. 새로운 지도자군을 만들고, 지역활동가들의 중앙정치 진출의 계기가 돼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보 선정과정은 정파라인에서 다 조정했다. 분리제의 문제의식이 반영된 선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 정파담합으로 인한 폐해를 제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당원직선제 자체를 문제 삼아야 하는 것인가.
“당발전특별위원회 논의과정에서도 최고위원 선거의 간선제냐 직선제냐를 놓고 논란은 있었다. 당원들 사이에 당원 직접선출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마치 정당정치의 최고선인 것처럼 인식됐다. 하지만 당시 최고위원선거에서는 공개적 인물경쟁이 정파적 담합에 의해 막혀 있던 상황이었다. 정파적 친소관계만 힘을 발휘한 것이다. 최고위원들은 대의인 동시에 집행을 담당해야 하는 사람이다. 직선제를 통해 드러난 문제들을 해결해가야 한다. 세금을 통해 국고지원을 받고 있는 정당인만큼 국민참여경선제 등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당내 정치와 대국민 정치의 간극을 줄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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