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적지 않다. 4월 총선의 판세를 완전히 지배했던 탄핵도 그랬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민주노동당은 지배개입을 할 능력도 없었고, 위치도 아니었다. 그것은 호재라기보다는 곤혹스러운 이슈였다.

2004년 3월12일,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이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킨 뒤, 여의도와 광화문,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연일 대규모 촛불집회가 열렸다. 대부분의 유권자들이 노무현 정권 지지 여부를 떠나 탄핵에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강자의 오만에 대한 약자의 동병상련, 광주와 6월의 기억, ‘(개혁이 잘했든 못했든) 미워도 다시 한번’…. 국회 경위들에게 끌려나오는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구겨진 모습에서 유권자들은 자신을 떠올렸다.

이미 유권자들은, 특히 밑바닥의 유권자들은 자신이 개혁정권에 의해 어떻게 당했는지는 잊은 지 오래였다. 그것은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한 ‘줄세우기’였다. 노무현 정권의 비정(秕政)에 대해 시시비비를 가릴 때에만 유권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표로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나 탄핵이라는 파도가 이성을 덮쳤다. 2003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의 ‘재신임 묻겠다’는 발언이 ‘줄세우기’의 소프트코어 버전이었다면, 탄핵은 하드코어 버전이었다. <상자기사1 참조>

포말은 민주노동당에게도 밀려들었다. 정세는 면도날 같았다. 민주노동당 총선 전략의 수정은 불가피했고, 민주노동당은 선택을 해야 했다.


“탄핵은 보수정치 공동의 책임”

일단 중앙 선대본의 대응은 나름대로 침착했다. 3월12일 당일, 탄핵 통과에 대한 비판성명을 낸 뒤 당은 그날 오후 긴급 선대위 회의를 열었다. 창원에서 선거 준비를 하던 권영길 당대표가 급히 서울로 올라왔고, 선대본은 탄핵사태를 “보수정치 공동의 책임”이라는 입장으로 정리했다. 13일에 나왔던 민주노동당 대국민성명의 일부다.

“민주노동당은 현재의 탄핵정국을 오는 4·15 총선에 이용하려는 어떠한 시도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합니다. 오는 4·15 총선은 친노무현-반노무현 논쟁의 장이 아니며, 탄핵찬성-탄핵반대의 장도 아닙니다. 4·15 총선은 지난 4년간 국민에게 절망을 안겨줬던 보수정당들에 대한 심판의 장이자 부패와 보수, 기득권 야합의 정치행태를 심판하는 장입니다.”

당시 민중운동은 탄핵 반대와 ‘친노무현’을 정치적으로 구분할 만한 현실적인 힘이 없었다. 민주노동당은 민주노총과 전농 등 주요 지지단체에 당의 입장을 알리고, 설득 작업에 들어갔다. 사실 여기까지가 당시 민주노동당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인터뷰 참조>

탄핵 폭풍 앞에 민주노동당이라는 촛불이 꺼지지 않고 심지에 불이 붙어 있는 게 오히려 가상할 정도였다. 무엇을 태우고 무엇을 밝히려는 것인지도 불분명한 촛불들이 광화문 네거리를 환히 밝히는 동안, 당내 활동가들은 혼란을 겪고 있었다.

당 지역조직의 일부가 동요하기 시작했고, 밖에선 ‘양비론’ 논란이 당을 압박했다. 당 홈페이지는 지난 대선 때의 ‘고해성사’ 부대보다 훨씬 더 적대적인 입장을 밝히는 ‘양비론 비난’ 글로 메워지기 시작했고, 거친 말들이 오갔다. <상자기사2 참조> 이 위기감은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이 썼던 ‘선대본일기’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노무현을 아옌데(칠레의 좌파 대통령, 1973년 군부 쿠데타로 살해됐다 - 편집자 주) 정도로 착각하고 그를 구출하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임무인 양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탄핵정국을 ‘6·15정신’을 파괴하려는 미국의 음모로 보는 시각까지 등장하였다.…(중략)…오랜동안의 소외감은 많은 사람들에게 광화문(당시 탄핵반대 촛불집회는 광화문에서 열렸다 - 편집자 주)에 가고 싶은 유혹을 자극시킨다. 그러나 먼 길을 가는 사람은 때론 외로움도 견딜 줄 알아야 한다.”(3월15일자 ‘선대본 일기’)


“양비론이 맞았다”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의 ‘신경’을 가장 건드리는 것은 ‘양비론’ 비난이었다. 이념과 입장의 문제에서 항상 딱 부러진 정치적 입장을 보이는 것에 익숙했던 당 활동가들은 양비론 논란에 적지 않게 당황했다. 또한 애매한 태도가 적절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는 주장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논쟁은 우발적 논란이 아닌 정세인식의 차이였다. 이 논란은 2004년 말에 ‘문건파동’이라는 형태로 다시 한번 등장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중앙 선대본이 택한 방식은 최대한 손실을 줄이자는 것이었다. 당시 노회찬 선대본부장이 당 기관지 <진보정치>와 한 인터뷰의 일부다.

“당의 입장에 대해 양비론이 아닌가 하는 자격지심이 생길 수도 있고, 주위로부터 그런 비판을 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양비론이 정답이다. …(중략)… 국민들은 지금의 혼돈을 야기하고 이를 과도하게 활용하는 보수정치 전반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다. 양비론에 대한 컴플렉스부터 버려야 한다.”

‘양비론’이란 단어의 불쾌한 어감은 감수하더라도, 휩쓸려 해소되지 않기 위해 당은 안간힘을 썼다. 이 과정에서 회심의 ‘역전타’가 터졌다. 3월20일 KBS 심야토론, 토론자로 참석한 노회찬 선대본부장이 탄핵으로 인한 열린우리당의 지지율 상승을 빗대 ‘수첩을 주웠다면 신고해야지 집어넣으면 되겠느냐’고 따끔하게 꼬집은 뒤, ‘불판부터 갈자’며 ‘판갈이’를 제창했다. 흔들리던 ‘민주노동당호’가 ‘줄세우기’에 공세로 전환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비리와 선거법 위반이 정치공학을 덮어썼다

노 대통령의 ‘열린우리당 지지’ 발언을 야당이 선거법 위반이라고 문제 삼으면서 촉발된 탄핵은 ‘사과하라’는 야당과 ‘못하겠다’는 대통령의 기싸움 와중에 터졌다. 재신임이 ‘치킨게임’(겁쟁이 게임)이었다면 탄핵은 ‘제로섬게임’(죽고 죽이는 게임)이었다는 게 달랐을 뿐이다.


재신임과 탄핵, 두 사건을 촉발시킨 원인을 다시 보자. 재신임 정국의 발화점은 측근비리였고, 탄핵 정국의 발화점은 선거법 위반이었다. 선거공학의 측면만 배제하면 개혁과 반개혁으로 유권자의 선택이 나뉘어져야 할 사건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인터뷰> 황이민 당시 선대부본부장
흔들리는 자기편부터 다잡아야 할 상황이었다. ‘탄핵반대’를 외치면서 광화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있었지만 민주노동당은 3월13일 서울역에서 독자집회를 열어 “친노-반노 구도로 시선 돌리기를 꾀하는 세력이 우리 국민 표를 소매치기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휩쓸리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당시 황이민 당시 선대부본부장(현 송파을지역위원장)에게 당시 상황을 들어보자.


- 전농과 민주노총 등 주요 지지조직들이 서울역 독자 집회에 흔쾌한 입장은 아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민주노총과 전농이 당 뜻대로 설득되지는 않았다. 전농은 당시 ‘광화문으로 가자’는 주장을 강하게 했다. 민주노총은 ‘독자집회’에 반대하진 않았지만 ‘광화문으로 갈 필요도 있다’는 주장을 했다. 그런만큼 서울역 독자집회는 좀 애매하게 처리됐다. 독자집회를 열긴 했지만 대오의 상당수는 다시 광화문으로 향했다.”


- 왜 주요 지지단체들이 설득되지 않았던 것인가.
“국민의 상당수가 탄핵에 분개하고 있었고 자발적으로 모였다. 대중조직이 그런 정서와 현실을 외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광화문에 휩쓸려 가는 것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줄지 (민주노총과 전농도) 모르지 않았겠지만 대중에 흐름에 올라타고 가자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 선본 입장에선 위기감을 느꼈을 것 같은데.
“지지단체들은 물론, 중앙 선대본의 방침이 지역조직에서 확실하게 지켜지는 상황이 아니었다. 중앙 지침에 따른 행동통일이 미약했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던 지역조직도 있었다. 하지만 중앙에서 좀더 명확히 선을 긋고, 우리 입장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탄핵정국 초반 흥분이 잦아들고 나서는 다시 선거를 중심으로 사고하기 시작했다. 객관적 현실이 ‘열린우리당이 지갑을 주은 것’으로 판명나면서 냉정히 상황을 분석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 서울역 집회는 혹시 위기상황에서 나온 ‘면피용’은 아니었나.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진보진영만의 목소리는 내야 한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독자행동을 기획한 것이었다. 정국을 돌파할 행동이 필요했던 시기다.”
<상자기사 ②> 홈페이지를 습격한 열린우리당 지지자들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과정에서 (후보를 제외하고) 가장 과로에 시달린 사람은 민주노동당 전산담당자였을 것이다.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이 선거 때만 되면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를 방문해 글을 남기는 것은 일종의 ‘버릇’이다. 민주노동당의 넉넉지 않은 서버용량이 열린우리당 지지자들의 방문을 버티지 못해 다운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두 선거에서 방문자들의 성향은 약간 달랐다. 대선 때는 ‘민주노동당이 성공해야겠지만’이라는 전제를 붙이면서 ‘제발 이번만은…’식의 ‘청탁성’ 글들이 많았고, ‘민주노동당을 찍고 싶지만 이번만은 개혁세력의 결집을 위해 표를 줄 수 없다’는 식의 ‘고해성사’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총선 때는 좀더 ‘완고한’ 제안들이 많았다. ‘탄핵을 한 쪽과 당한 쪽을 같이 비판하는 것은 비겁한 줄타기’라는 양비론 논란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탄핵이라는 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당리당략만 생각한다’는 비난도 적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두 선거의 서버관리를 담당했던 조형진 인터넷위원회 부장은 이루 다 말 못할 고생을 겪었다. 서버 다운을 막기 위해 당사를 집삼아 살았다고 할 만큼 과로에 시달렸다. 2002년 대선 당시, 투표일 하루를 앞두고 정몽준씨가 노무현 당시 대통령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고, 첫 속보가 나간 지 딱 10분만에 민주노동당 홈페이지 서버가 과부하로 다운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선거운동 마지막날이라, 당원과 술 한잔 할 참이었다. 그런데 정몽준씨가 지지를 철회했다는 속보가 뜨자마자, 서버가 다운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빠르기가 전광석화 같았다.” 총선을 앞두고 탄핵안이 국회에서 통과된 날에도 당 홈페이지는 거의 제 구실을 못했다. 그는 중앙의 지침을 기다리며 홈페이지를 주시하던 지역 활동가들의 비난을 한 몸에 받으며 맘고생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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