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14일 오전 대학로의 한 카페,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과 노회찬 민주노동당 선대본부장이 단 둘이 만났다. 노 선대본부장이 단 전 위원장의 비례대표 출마를 설득하는 자리였다.

"출마 하십시오"

사실 이 시기 단병호 전 위원장은 영입 ‘1순위’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 전 위원장은 노동현장에서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상징성이 있었고 당 입장에서는 출마에 대한 ‘확약’을 받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또한 비례대표 경선방식을 정하는 중앙위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던 때였던 만큼 노-단 회동에서 제법 구체적인 말들이 오고 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날 오전 둘 사이에선 무슨 말이 오고갔을까.

당시를 전하는 단병호 의원, 노회찬 의원의 말이 조금씩 다르다. 또한 비례대표 경선 당시 노-단 선거캠프 주요 인사들의 말도 조금 다르다.

우선 단병호 의원은 “당시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출마 여부에 대한 의견을 듣고 있던 시기였고,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을 만난 것도 그 일환이었을 뿐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고간 것은 없다”고 말했다.

반면 단병호 의원과 노회찬 의원의 비례대표 경선캠프의 관계자들은 “노 선대본부장이 당시, 단 전 위원장에게 비례대표 경선에서 1등으로 만들어 드리겠다는 말을 전했고, 노 선대본부장 자신은 경선에서 앞 순위에 욕심을 내고 있지 않다는 말을 전했다”고 말했다. 구체적으로는 “(노 본부장 자신은) 일반명부 3등(전체 6등)을 바라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노회찬 의원은 “당시 직접적으로 등수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은 없다”면서 “단지 선대본부장으로서 출마를 권하는 것과 더불어, (노 선대본부장 자신도) 출마 결심을 한 상황에서 내 입장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당사자들의 말과 당시 정황을 비쳐볼 때, 경선과 관련한 구체적인 말들이 오고가지는 않았겠지만, 오간 말들을 (각 경선 선본쪽에선) ‘구체적으로’ 해석했을 것으로 가능성이 크다. 이 회동의 의미는 하는 바는 이날 밤 대구에서 있었던 ‘17인 모임’을 살펴봐야 알 수 있다.


좌파, 지지후보 선택 놓고 이견

같은날 밤, 17인 모임이 대구에서 열려서 비례대표 경선에서 누구를 조직적으로 지지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했다. 단병호 전 위원장과 심상정 전 금속노조 사무처장은 이미 지지후보로 사실상 결정된 터였기 때문에, 이날의 쟁점은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을 지지후보로 결정할지 말지였다.

민주노총 중앙파와 진정추쪽은 단병호, 심상정, 노회찬 이렇게 3명을 지지후보로 결정하자는 의견이었고, 이에 대해 화요모임쪽에서 반대 입장을 보였다. 당시 화요모임쪽에서는 “지난해 10월 중앙위에서 ‘사회주의 이상의 계승’에 대한 안건 처리과정에서 노 총장은 좌파적 입장을 견지하지 못했다”면서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상자기사1 참조> 진정추(노회찬 의원은 진정추 활동을 했었다)쪽과 ‘중앙파’쪽 사람들이 중재 노력을 했지만 무산되고, 화요모임은 급기야는 ‘표결’도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네트워크 이상의 역할을 하기 어려웠던 17인 모임은 인선 문제에 있어선 완전 합의가 되지 않으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당시 그 모임의 한계였다. 만약 그날 표결로 들어갔으면 그것으로 좌파 연대는 깨졌을 것이다. 결국 노 총장은 17인 모임이 조직적으로 지지하는 후보에서 빠졌다.”(17인 모임을 주도했던 한 활동가)

이날 중재노력을 했던 쪽에서는 “그래도 노회찬을 지지하는 좌파가 많을 것”이라면서 진정추쪽을 설득했지만 진정추쪽은 곤혹스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은 “그 모임에서 다신 내 이름을 거론치 마라”고 전했다.<상자기사2 참조>

“경선에 나서는 입장에서 지지해주겠다고 하면 거절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분란이 있다면 굳이 기대고 갈 생각이 없었다. 내가 가서 잘 보이고, 설득하면서 지지를 호소할 입장도 아니었고, 선대본부장을 맡고 있는 상황에서 내 등수 올리기에 주력할 상황이 아니었다.” 노회찬 의원의 회고다.

결국 17인 모임은 일반명부 한 표는 단병호 후보, 여성명부 한 표는 심상정 후보를 지지하지만 나머지 한 표씩은 자율에 맡겼다. 범좌파의 ‘나머지 한 표’는 지역별로, 성향별로 나눠졌다.


거래할 ‘꺼리’가 없었다

좌파쪽에서 이런 움직임이 있는 동안 당내 ‘자민통’계열, 당시 민주노총 새 지도부를 꾸리고 있던 국민파 등에서도 후보자들끼리 연대전선이 꾸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범좌파처럼 ‘테이블 논의’ 수준의 이야기가 오간 것으로 아닌 것으로 짐작된다. 시점 또한 좌파의 논의시점이 2월20일 중앙위 이전이라면, 자민통-국민파쪽은 후보등록 다음인 3월초에 선거연합 논의가 이뤄졌다.

이는 중앙위 이전까지 후보로 나설 것이 확실했던 사람은 이영순 후보밖에 없었던 것을 고려해 보면 당연한 것이다. 자민통과 민주노총 국민파쪽에서는 일반명부에서 천영세, 강기갑 후보를, 여성명부에서는 이영순 후보와 함께 최순영, 현애자, 이주희 후보 등을 지지했다. 그러나 이 묶음은 ‘강력하지’ 않았다는 게 여러 정황과 조건에서 나타난다. 각 후보들을 직접적으로 지지하는 정파그룹 사이에 ‘거래할 꺼리’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천영세, 최순영 후보의 경선에 관여했던 한 인사의 말이다. “선거는 어차피 이기는 게 목적인데 지지를 표하는 사람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선거 실무 수준으로 지원을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천 후보는 당시 자기 조직표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소위 ‘연합’(자민통)쪽에서 표를 준다고 해도 우리가 줄 표가 없었다. 거래할 생각도 없었고, 거래할 조건도 아니었다. 또한 정파질서에 묶이는 것은 천영세, 최순영 의원의 운동경력을 봐도 적절한 선택이 아니었다.”

강기갑 후보쪽도 마찬가지였다. 일단 농민 당권자가 거의 없었던 만큼 주고받는 거래는 애초에 불가능했다. 또한 전농쪽에서는 당시 당의 정파질서에 편입되는 것에 대해 ‘상당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른바, 자민통 계열에서도 이 시기에 ‘세팅’을 의도하진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울산연합의 핵심관계자의 말이다. “우리는 농민이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만큼 당선되도록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건 정파 문제가 아니라 당의 정치적 지지층 확보의 문제로 이해해 달라. 또 단병호, 심상정 후보가 당선되는 것은 우리가 생각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독식할 수 있다 없다는 이미 우리 상상력 밖에 일이었다. 이영순 후보가 자민통 운동의 대변자로서 국회에 입성하는 것을 위해 노력했다. 농민은 우리가 지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나머지 부분에선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을 지지하는 입장을 정한 수준이다.”

비례대표 경선이 한창이던 3월초, (당내 좌파의 대척 개념으로서) 우파쪽 관계자들의 회동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이 자리에 후보군 ‘세팅’에 대한 확실한 논의는 없었다.

비례대표 경선결과
총 당권자 22,525명 가운데 13,639명이 투표에 참여. 투표율 60.6% 


●  여성명부
· 기호 2번 현애자 : 총 득표수 3,339명-비례대표 7번
· 기호 3번 김미경 : 총 득표수 618명
· 기호 4번 심상정 : 총 득표수 6,046명-비례대표 1번
· 기호 5번 이영순 : 총 득표수 5,343명-비례대표 3번
· 기호 6번 송경아 : 총 득표수 1,258명
· 기호 7번 이주희 : 총 득표수 3,163명
· 기호 8번 최순영 : 총 득표수 3,903명-비례대표 5번
· 기호 9번 석윤수경 : 총 득표수 1,043명
· 기호 10번 이정미 : 총 득표수 929명 


●   일반명부
· 기호 1번 천영세 : 총 득표수 5,052명-비례대표 4번
· 기호 2번 노회찬 : 총 득표수 3,048명-비례대표 8번
· 기호 3번 정태흥 : 총 득표수 505명
· 기호 4번 김석진 : 총 득표수 880명
· 기호 5번 김병일 : 총 득표수 495명
· 기호 6번 남만진 : 총 득표수 411명
· 기호 7번 이문옥 : 총 득표수 2,549명
· 기호 8번 이선근 : 총 득표수 459명
· 기호 9번 장봉주 : 총 득표수 100명
· 기호 10번 강기갑 : 총 득표수 5,031명-비례대표 6번
· 기호 11번 단병호 : 총 득표수 7,225명-비례대표 2번

“비례대표 경선은 세팅선거가 아니다”


결국 좌파도, 자민통도 비례대표 경선과정에서 독식을 의도한 ‘세팅’을 하진 않았다. 후보군이 형성되긴 했지만 확고부동하진 않았던 것으로 분석된다.

‘세팅선거’는 검증되지 않은 인물이 세팅후보군에 들어감으로써 당선되는 것을 뜻한다. 그로 인해 유권자는 후보가 아닌 후보군을 보고 찍어야 하는, 사실상 선택권이 제약되는 상황에 놓이기 때문에 세팅선거는 비판을 받는다.

비례대표 경선에서 각 정파그룹은 자기 세력권 이상의 의석을 차지할 욕심을 부리지 않았던 만큼 이 비판을 비례대표 선거에 적응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비례대표 경선까지는 세팅선거가 아니었다. 하지만 표수가 2만명 단위가 넘어가는 선거에서 각 정파들은 자신의 힘이 어디까지인지를 알게 됐다.”

좌파쪽 핵심 조직활동가의 말이다. 각 정파는 비례대표 경선으로 자신들이 어디까지 당원직선선거에 개입할 수 있는지를 계량할 수 있는 실험값을 얻었다. <상자기사3 참조>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총선이 끝나고 한달 후에 있었던 당 지도부 구성을 위한 당직선거에서 확실히 나타나게 된다.

<상자기사 ①> ‘사회주의’를 넣을까 말까
당시 노회찬 후보를 17인 모임 지지후보로 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쪽은 당발전특별위원회 안건을 2003년 10월 중앙위에서 다루던 때의 노 의원 발언을 주된 반대 이유로 삼았다. 당시 중앙위는 당발특위 보고서 가운데 당 정치활동 발전방향 1번항인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강화한다“를 통과시킬 것인지 말 것인지를 두고, 좌파와 자민통 계열이 총력전을 벌렸었다.


좌파쪽은 “당 강령에 있는 문구를 다시 강조하는 것인 만큼 반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의견이었고, 자민통쪽은 “선거를 앞두고 대중적인 거부감이 있는 ‘사회주의’라는 말을 강조하는 것은 대중정당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는 의견이었다.


이 논란의 와중에 노회찬 당시 사무총장은 “당발특위 (전체)안이 당의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지 의문”이라는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당원 10만 시대, 이후 10만 당원 시대 당원관리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내용은 보고서에 없다”면서 “이후에 시간을 갖고 지금은 유보하자”는 의견을 냈다. 결국 1번항은 그날 중앙위에서 통과되지 못했고, 같은해 11월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됐다.


당시 좌파들은 당내 정파관계에서 좌파로 분류되던 노회찬 사무총장이 “좌파적 입장을 버리고 대중 영합에 나섰다”는 비난을 했다. 그에 반해 노 사무총장은 “당발특위 보고서 전반에 대한 문제의식이 있었던 것”이라면서 “사회주의 문구를 넣을꺼냐 말꺼냐를 두고 논쟁하는 것이 소모적이라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상자기사 ②> “노회찬 ‘팽’ 사건 아니다”
2004년 2월14일, 17인 모임은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을 지지후보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좌파의 노회찬 ‘팽’ 사건으로 단순하게 해석되지 않는다. 실제, 좌파쪽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노회찬 후보는 비례대표 경선과정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비례대표 8번 후보로 결정이 됐다. 좌파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았다면 비례대표 순번을 좀더 앞당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의 이해관계에 정확히 부합되진 않았다.


우선 선대본부장이 비례대표 경선에 나오면서 앞자리 순번을 욕심낸다는 모습으로 비춰지는 것은 향후 노 의원의 정치적 행보에 두고두고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컸다. 또한 ‘좌파쪽 후보’라는 정파질서에 묶이는 것도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이 문제를 일거에 해결해 줄 수 있는 방식은 비례대표 뒷 순위를 받고 (선대본부장으로서) 선거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국회에 입성하는 방식이었다. 이 경우 노 의원은 자력 입성하는 셈이 되고, 정파에도 ‘갚아야 할 부채’가 없는 상태가 된다. 노 의원은 2월 즈음까지 비례대표 6번을 바랐던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경선에서 8번을 받은 뒤 선거과정에서는 비례대표 정당득표를 많이 하는 것과 자신의 국회 입성 사이의 이해관계가 정확히 맞았다.


이른바 사심 없는 선거 진두지휘가 가능했던 것이다. 14일 밤, 17인 모임의 결정은 향후 비례대표 경선은 물론, 최고위원 선출을 위한 당직선거, 나아가선 의원단의 활동에도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상자기사 ③> 정파 관계가 전부는 아니지만…
좌파에서 지원을 했으니 단병호 의원은 좌파 쪽만 대변하는 사람인가? 강기갑 의원은 자민통쪽 조직표가 적지 않게 갔음으로 강 의원은 자민통만 대변하는 사람인가? 노회찬 의원은 좌파의 조직적 지원을 받지 않았으니까 좌파라고 볼 수 없나?


물론 아니다. 단 의원이 비례대표 경선에서 받은 표는 7,225표에 달했다. 후보 가운데 최대 득표였다. 실제 자민통 활동가들 중에도 적지 않은 사람이 당시 단 후보에게 표를 보냈고, “우리도 단병호 후보는 당연히 1등 할 줄 알았다”는 것이 그들의 말이다.


“농민이 어렵게 결단했는데 꼭 당선권에 들어가길 바랐다.” 이 말은 범좌파에서도 상당히 왼쪽에 있는 활동가가 한 말이다. 당내에서 무명 인사였던 강기갑 후보가 5,031표를 얻은 것은 조직표의 힘으로만 설명될 수 없는 일이다. 어렵게 민주노동당을 통한 정치세력화를 결단한 농민에 대한 당원들의 배려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조직표가 거의 없음을 자타가 공인하던 천영세, 최순영 후보가 높은 순위로 경선을 마친 것 또한 정파질서가 전부인 선거가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오랜 시간 당의 지도부로 활동해온 신뢰가 기본 바탕이었다.


하지만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각 정파그룹의 선택과 연합을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경선 당시, 당권자는 22,525명, 투표율은 60.6%였다. 실제 투표한 사람이 13,639명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승패의 핵심 관건은 조직이었다. 결국 두 가지, 정파의 지원과 당원 일반 정서상의 지지, 이 양자를 모두 얻어야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앞 순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