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의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진보정당 이념과 노선의 실험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민주노동당의 가장 큰 장점이자 존재 이유다. 1987년 6월항쟁 이후 민주주의의 형식은 끊임없이, 쉬지 않고, 확장돼 왔지만, 이 과정에서 권력의 가장 큰 배경이었던 노동자-농민-서민들에게 돌아온 대가는 ‘양극화’였다.

탄핵과 열린우리당의 원내과반 의석 확보에서 출발해 열린우리당의 원내과반 의석 상실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으로 이어진 최근 1년에 걸친 ‘개혁세력’의 정치적 실험은, 민주노동당이 우리 사회에 왜 필요한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마치 ‘도돌이표’처럼 회귀하는 이 ‘성장 없이 분배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치울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민주노동당이라는 사실은 이제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됐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실험은 비단 이념과 노선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진성당원제, 당원직선제 등 정당개혁-정치개혁의 최선두에 섰고, 이 실험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게도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민주노동당이 역사적 원내진출을 달성한 지 1년하고도 4개월이 넘었다. 물론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동권’의 정당에서 ‘대중’의 정당으로, ‘선언’에서 ‘대안’으로, ‘계몽’에서 ‘참여’로. 민주노동당의 확장자는 오늘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매일노동뉴스>가 민주노동당의 실험을 정리한다. <편집자 주>




원내 진출을 앞둔 2004년 2월20일 중앙당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밤을 샐 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깨고, 예정시간인 오후2시를 한 시간여 넘겨 시작한 회의는 밤 8시30분경 폐회를 선언했다. 5시간을 조금 넘긴 시간, 이날 올려진 안건의 중요성에 비춰볼 때 예상 밖의 짧은 회의였다. 또한 이날 중앙위에서 결정한 것과 결정하지 않은 것은 이후 민주노동당의 미래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2004년 2월20일, 그 5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기억을 되돌려 보자.


국회로 가는 ‘좁은 문’, 계산은 복잡하지 않았다

이날 다뤄야 할 주요 안건은 두 가지. 비례대표 경선방식을 결정하는 것과 당직공직 분리 여부에 대한 판단이었다. 당시 선거법 개정이 보수정당의 밥그릇 싸움으로 미뤄지고 있었지만, 비례대표 의석수가 16대의 46석 이하로 줄어들 가능성은 적은 상황이었다.

이미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17대 국회의원선거부터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실시되는 상황을 전제할 때, ‘5% 고지’를 눈앞에 두고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회 문은 너무 좁았다. 경남 창원을구와 울산북구,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던 이 두 곳의 지역구를 제외하면, 민주노동당이 기대할 수 있는 국회행 티켓은 비례대표 넉 장 정도였다.

이것은 당내 여러 정파그룹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회행’ 티켓을 잡지 못하면 해당 정파의 당내 입지는 물론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 4년의 역사, 그리고 그것에 앞선 민중투쟁의 역사가 배출한 ‘영웅’의 수는 적지 않았지만, 그에 비해 국회 문은 너무나 좁았던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비례대표 후보로 거론되는 당내 인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선권에 들 수 있다고 자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4년의 역사를 통해 적지 않은 당내 선거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피 말리는 선거전’은 한번도 없었다.<상자기사1 참조> 이는 당내 정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얼마만큼의 당내 지분을 갖고 있는지 실험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을 앞두고 원내활동을 진두지휘할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 자리. 각 정파들은 당연히 처음이자 최대 규모인 ‘대회전’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이날 중앙위는 바로 그 경선 규칙을 정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토론은 많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만일 중앙위가 열리던 당시 당 지지율이 ‘10%대’였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의원의 정수가 ‘56석 이상’이 될 것이라는 게 확실했다면, 민주노동당이 확보할 수 있는 비례대표 의원수는 7석 안팎이 된다. 그랬다면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티켓이 많을수록 지원자는 늘게 마련이고, 지원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당내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정파들에게 복잡한 ‘합종연횡’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3~4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당내 선거만 통과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 안이든 당 바깥이든 진보정당의 상징성을 어떤 식으로든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비례대표 후보 출마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처음부터 출마 예상자 또는 가능자는 정파의 조직적 지원을 받을 수 있되, 확실한 상징성을 가진 인사로 한정됐다.

3~4장이라면 어떤 정파도 자신만의 힘으로 자파의 후보를 당선시킬 수 없다. 결국 각각의 정파그룹들은 비슷한 성향끼리 일종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후보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계산’은 복잡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산’할 꺼리가 많지 않았던 만큼 토론할 꺼리도 많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중앙위는 표에 가중치를 주는 방안은 부결됐고, 단순 종다수 투표방식을 택했다.<상자기사2 참조> 당권자 1인에게 부여하는 표수는 명부별(일반/여성)로 2표씩, 합쳐서 1인4표로 결정됐다.


1인4표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것

중앙위 이전에 ‘범좌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의 이른바 ‘17인 모임’<상자기사3 참조>에서 투표방식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화요모임’ 소속으로 논의에 참여했던 정종권 중앙위원(현 서울시당위원장)의 말이다.

“우리(화요모임)가 주장했던 것은 명부별 1인1표였다. 하지만 당원들의 표 행사를 지나치게 막는다는 이유로 좌파들 내부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명부별 1인2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표수를 정하면서, 효과에 대한 고려를 면밀하게 하지 않았다. 우리(범좌파)가 지지할 후보는 명부별로 한 명씩뿐이었고, 한 표씩 더 준 게 어떤 효과로 나올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 이른바 ‘자민통’ 계열의 조정자 역할을 했던 울산연합쪽의 한 관계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일단 우리 후보 한 명은 확정된 상황이었고, 다른 문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지역선거로 정신이 없을 때였던 만큼 명부별 1인2표가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하지는 않았다.”

당시 한 후보의 비례대표 경선 선거본부를 꾸리고 있었던 한 중앙당 당직자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충 4명이 당선권이라고 생각해서 4표로 정한 것이다. 사전에 교감이 있었다기보다 중앙위 현장에서 결정됐다고 보는 것이 맞다.”

위의 말들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는 각 정파그룹들이 독식보다는 안전한 입성을 중심에 두고 투표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자 진입을 위한 장치 마련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자세히 계산은 안 되지만 안전한 선택’. 그 결과로 민주노동당에는 없던 신조어, ‘세팅선거’의 씨가 뿌려졌다. 그리고 두 달여 뒤인 최고위원선거에서 이 ‘세팅선거’의 꽃은 만개하게 된다.

유보된 당직공직 분리안

이날 주요 관건 가운데 또 하나는 의원단이 당직을 맡을지 말지의 여부였다. 일곱번째 안건으로 올라간 ‘국회의원단의 운영과 지원에 관한 규정의 제정의 건’은 당직공직 분리 여부, 의정지원단의 체계, 보좌관의 인사권을 당대표가 가질지 여부 등 세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핵심은 당연히 당직공직 분리 여부였다. 이 안건은 2003년 당발전특별위원회 토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제 두 달 안에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이 탄생하는 만큼 이날 중앙위에선 결단을 해야만 될 상황이었다.<상자기사4 참조> 하지만 이날 당대표단이 보인 입장은 이것이었다.

“대표단 의견을 모았다. 의원이 몇명이 나올지 아직 모른다. 당내 정세나 지형의 변화 등에 따라 지도체제 등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바쁜 면이 있긴 하지만 ‘총선 이후 중앙위에서 심도 있게 판단해서 결정하는 것이 온당치 않겠는가’라는 의견이다. 다음으로 넘겼으면 한다.”(천영세 당시 부대표의 중앙위 발언)

이에 대해 “사람을 보고 시스템을 결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이장규 중앙위원), “안건 처리 과정에서 유보안을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김준수 중앙위원)는 반발이 있었지만, 표결 결과 “이번에 다루자”는 의견은 소수파였다.

당직공직 분리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이며, 시스템 구성은 ‘인물’을 염두에 두지 않고 ‘원칙’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상식’이다. 왜 중앙위는 이날 유보라는 ‘무리한’ 선택을 했을까. 일단 ‘(총선결과를) 두고 보고 싶다’는 각 정파그룹의 불안함과 민감한 안건을 자주 유보시키는 민주노동당 중앙위의 ‘전통’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상자기사5 참조>

과정이 어찌됐던 이날 유보 결정은 몇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5월 당 지도부 선출과정에서 의원단을 확보하지 못한 ‘원내 소수파’는 사활을 건 선거투쟁에 돌입하게 됐고, 4·15 총선 직후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어떤 기준도 없는 맨 땅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맨 땅에서 시작한다는 게 ‘일 시작하기 어렵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는 것은 좀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상자기사 ①> 2002년 당 대표 경선이 유일
민주노동당 중앙 규모의 당내 선거에서 경선이 치러졌던 것은 2002년 3월 대표경선이 유일했다. 당시 권영길 후보(현 국회의원)와 정윤광 후보(현 중앙위원)가 맞대결해 권영길 후보가 당대표로 당선됐다. 당시 득표 비율은 70대 30 정도. 초대 당대표로서 어렵게 당을 이끌어 왔고, 민주노총 위원장, 대선 출마 등을 통해 대중적 지명도를 확보하고 있던 권영길 후보의 낙선을 점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부대표와 사무총장의 경우는 경선을 치렀던 적이 없었다.

 
<상자기사 ②>가중치와 종다수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후보를 어떤 방식으로 뽑을 것인가에 대한 큰 원칙은 이미 2003년 3월 대의원대회에서 결정됐다. 당시 대의원대회가 “비례대표 당원직선 선출과 여성 50% 이상”을 이미 당헌으로 정한 만큼, 이날 중앙위는 투표방식과 관련된 당규를 정하는 자리였다. 투표 방식을 결정하는 핵심 관건은 당권자 일인당 몇 표를 줄 것인가와 다수의 표를 줄 경우 가중치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다수의 표를 주는 것은 투표자의 선택의 폭을 넓혀줄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대개의 경우 후보자군이 사전에 만들어지는, 이른바 ‘세팅’을 낳는 효과가 있다. 가중치를 주게 되면 당원들의 의사를 정확히 반영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투표와 집계과정이 복잡해지는 단점이 있다.


<상자기사 ③>‘17인 모임’은?
‘17인 모임’은 당내 ‘범좌파’들의 모임이다. ‘전국모임’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2003년 9월 당발전특별위원회에서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발전하자”는 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모인 것이 계기가 돼 한달에 한번꼴로 지속적인 만남을 가졌다. 각 광역단위의 주요 좌파 활동가들과 민주노총 ‘중앙파’ 등이 주요 구성원이었으나, 네트워크 수준의 모임이었기에 의결집행기능은 약했다.


경기동부, 인천, 울산 등 3개의 지역연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자민통’ 계열과 달리 범좌파 계열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 화요모임, 민주노총 중앙파 등 서로 다른 경험과 노선을 갖고 있었고, 이에 따라 수평적 분포도가 넓었다. 이들의 의견을 모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17인 모임’이고, 이 ‘17인 모임’의 다수가 참여해 만든 조직이 현재의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전진)이다.


<상자기사 ④>“결단은 그날 내렸어야 했다”
당직공직 분리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2003년 초부터 민주노동당에서 토론돼 오던 당발전특별위원회 논의의 일부다. 당발특위는 2003년 3월 대의원대회에서 구성할 것을 결정하고, 천영세 당시 부대표를 위원장으로 4개월여 동안 전국 순회토론회를 가지며 전당적인 토론을 벌였다. 당발특위의 과제는 “노무현 정권 하 5년 동안의 당 정치활동·조직활동 방향”에 대한 계획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2003년 11월 대의원대회에서 통과된 당발특위안에는 △당 활동 전반에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발전'하기 위한 노력 강화 △공공성 강화·자주평화 실현에 입각한 당의 정책적·실천적 통일성 강화 △최고위원회 신설 등 지도체제 개편 등이 주요한 내용으로 담겼다. 대의원대회는 큰 원칙만 정했을 뿐 세부적인 문제는 중앙위에서 처리하도록 했다.


지도체제 개편 논의의 일부인 당직공직 분리 여부는 처음부터 당발특위의 ‘뜨거운 감자’였다. 최초 이 논의는 진보정당의 국회의원이 어떤 의정활동을 벌여야 할지에 대한 원칙을 논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범좌파, 특히 ‘화요모임’쪽에서는 “의정활동에 매몰되지 않는 진보정당 의원”을 주장하며 완전 분리를 외쳤고, ‘자민통’쪽에선 주로 “당의 얼굴인 의원을 당직에서 배제하는 것은 대중정당이 할 선택이 아니다”라면서 반대 입장을 보였다.


2005년 5월 현재, 좌파와 자민통 계열 모두 당발특위안이 통과된 후 첫 중앙위이며, 총선을 눈앞에 뒀던 2월 중앙위는 이 문제에 대해 답을 내렸어야 했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당시 중앙위에선 답을 내리자는 입장은 소수였다.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당시 결정을 내리지 않은 것은 민주노동당 원내와 원외의 ‘이원화’에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상자기사 ⑤>'유보'는 민주노동당의 전통?
창당 이후 2004년까지 이어진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대표 체제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체제였다고 비판을 받기도 한다.


사실 이 말은 ‘권영길식’ 리더십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정파연합당으로 출발한 민주노동당은 각 정파의 이해관계 혹은 세계관의 차이에 따라 대립되는 사안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문제들에서 권영길 전 대표가 취한 태도는 일단 토론하고, 다시 논의하고, 또 다시 논의한 후 합의가 안 되면 결정하지 않고 넘어가는 방식이었다.


강력한 리더십을 가질 순 없지만 ‘걸음마’ 단계에 있던 진보정당으로서는 각 정파나 의견그룹의 대립으로 ‘초가삼간을 태우는’ 우를 피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민주노동당이 ‘유아기 사망’을 피해갈 수 있었던 나름의 생존방식이었다. 하지만 결정할 때를 놓쳐 문제를 숙성시키고 더 크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한 사례도 적지 않다. 사실 민주노동당 대의집행기구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이 “더 논의해서 추후에 결정하자”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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