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과 열린우리당의 원내과반 의석 확보에서 출발해 열린우리당의 원내과반 의석 상실과 노무현 대통령의 ‘대연정’으로 이어진 최근 1년에 걸친 ‘개혁세력’의 정치적 실험은, 민주노동당이 우리 사회에 왜 필요한지를 너무나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마치 ‘도돌이표’처럼 회귀하는 이 ‘성장 없이 분배 없다’는 이데올로기를 치울 수 있는 정치적 대안이 민주노동당이라는 사실은 이제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 됐다.
한편, 민주노동당의 실험은 비단 이념과 노선에 그치지 않는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때부터 진성당원제, 당원직선제 등 정당개혁-정치개혁의 최선두에 섰고, 이 실험은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에게도 뚜렷한 영향을 끼쳤다.
민주노동당이 역사적 원내진출을 달성한 지 1년하고도 4개월이 넘었다. 물론 시행착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운동권’의 정당에서 ‘대중’의 정당으로, ‘선언’에서 ‘대안’으로, ‘계몽’에서 ‘참여’로. 민주노동당의 확장자는 오늘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어떻게 움직이는가. <매일노동뉴스>가 민주노동당의 실험을 정리한다. <편집자 주>
원내 진출을 앞둔 2004년 2월20일 중앙당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밤을 샐 지도 모른다는 예상을 깨고, 예정시간인 오후2시를 한 시간여 넘겨 시작한 회의는 밤 8시30분경 폐회를 선언했다. 5시간을 조금 넘긴 시간, 이날 올려진 안건의 중요성에 비춰볼 때 예상 밖의 짧은 회의였다. 또한 이날 중앙위에서 결정한 것과 결정하지 않은 것은 이후 민주노동당의 미래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2004년 2월20일, 그 5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시 기억을 되돌려 보자.
국회로 가는 ‘좁은 문’, 계산은 복잡하지 않았다
이날 다뤄야 할 주요 안건은 두 가지. 비례대표 경선방식을 결정하는 것과 당직공직 분리 여부에 대한 판단이었다. 당시 선거법 개정이 보수정당의 밥그릇 싸움으로 미뤄지고 있었지만, 비례대표 의석수가 16대의 46석 이하로 줄어들 가능성은 적은 상황이었다.
이미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헌법재판소의 위헌 판결로 17대 국회의원선거부터 정당명부 비례대표제가 실시되는 상황을 전제할 때, ‘5% 고지’를 눈앞에 두고 상승세를 타기 시작한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은 기정사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회 문은 너무 좁았다. 경남 창원을구와 울산북구, 당선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던 이 두 곳의 지역구를 제외하면, 민주노동당이 기대할 수 있는 국회행 티켓은 비례대표 넉 장 정도였다.
이것은 당내 여러 정파그룹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국회행’ 티켓을 잡지 못하면 해당 정파의 당내 입지는 물론 정치적 영향력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민주노동당 4년의 역사, 그리고 그것에 앞선 민중투쟁의 역사가 배출한 ‘영웅’의 수는 적지 않았지만, 그에 비해 국회 문은 너무나 좁았던 것이다. 자의든 타의든 비례대표 후보로 거론되는 당내 인사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당선권에 들 수 있다고 자만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4년의 역사를 통해 적지 않은 당내 선거가 있었지만, 그 가운데 결과를 예상할 수 없는 ‘피 말리는 선거전’은 한번도 없었다.<상자기사1 참조> 이는 당내 정파,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얼마만큼의 당내 지분을 갖고 있는지 실험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진보정당의 원내 진출을 앞두고 원내활동을 진두지휘할 국회의원 후보를 뽑는 자리. 각 정파들은 당연히 처음이자 최대 규모인 ‘대회전’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이날 중앙위는 바로 그 경선 규칙을 정하는 자리였다. 그러나 토론은 많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만일 중앙위가 열리던 당시 당 지지율이 ‘10%대’였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의원의 정수가 ‘56석 이상’이 될 것이라는 게 확실했다면, 민주노동당이 확보할 수 있는 비례대표 의원수는 7석 안팎이 된다. 그랬다면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을 것이다. 티켓이 많을수록 지원자는 늘게 마련이고, 지원자가 늘어난다는 것은 그만큼 당내 지분을 확보하고 있는 정파들에게 복잡한 ‘합종연횡’을 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3~4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당내 선거만 통과한다고 모든 게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당 안이든 당 바깥이든 진보정당의 상징성을 어떤 식으로든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비례대표 후보 출마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이리하여 처음부터 출마 예상자 또는 가능자는 정파의 조직적 지원을 받을 수 있되, 확실한 상징성을 가진 인사로 한정됐다.
3~4장이라면 어떤 정파도 자신만의 힘으로 자파의 후보를 당선시킬 수 없다. 결국 각각의 정파그룹들은 비슷한 성향끼리 일종의 ‘컨소시엄’을 구성해 공동후보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계산’은 복잡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리고 ‘계산’할 꺼리가 많지 않았던 만큼 토론할 꺼리도 많지 않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날 중앙위는 표에 가중치를 주는 방안은 부결됐고, 단순 종다수 투표방식을 택했다.<상자기사2 참조> 당권자 1인에게 부여하는 표수는 명부별(일반/여성)로 2표씩, 합쳐서 1인4표로 결정됐다.
1인4표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것
중앙위 이전에 ‘범좌파’로 분류되는 인사들의 이른바 ‘17인 모임’<상자기사3 참조>에서 투표방식에 대한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화요모임’ 소속으로 논의에 참여했던 정종권 중앙위원(현 서울시당위원장)의 말이다.
“우리(화요모임)가 주장했던 것은 명부별 1인1표였다. 하지만 당원들의 표 행사를 지나치게 막는다는 이유로 좌파들 내부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명부별 1인2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표수를 정하면서, 효과에 대한 고려를 면밀하게 하지 않았다. 우리(범좌파)가 지지할 후보는 명부별로 한 명씩뿐이었고, 한 표씩 더 준 게 어떤 효과로 나올지는 고려하지 않았다."
이 문제와 관련, 이른바 ‘자민통’ 계열의 조정자 역할을 했던 울산연합쪽의 한 관계자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일단 우리 후보 한 명은 확정된 상황이었고, 다른 문제는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지역선거로 정신이 없을 때였던 만큼 명부별 1인2표가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에 대해 면밀하게 검토하지는 않았다.”
당시 한 후보의 비례대표 경선 선거본부를 꾸리고 있었던 한 중앙당 당직자의 말도 크게 다르지 않다. “대충 4명이 당선권이라고 생각해서 4표로 정한 것이다. 사전에 교감이 있었다기보다 중앙위 현장에서 결정됐다고 보는 것이 맞다.”
위의 말들은 두 가지 사실을 의미한다. 하나는 각 정파그룹들이 독식보다는 안전한 입성을 중심에 두고 투표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소수자 진입을 위한 장치 마련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다.
‘자세히 계산은 안 되지만 안전한 선택’. 그 결과로 민주노동당에는 없던 신조어, ‘세팅선거’의 씨가 뿌려졌다. 그리고 두 달여 뒤인 최고위원선거에서 이 ‘세팅선거’의 꽃은 만개하게 된다.
유보된 당직공직 분리안
이날 주요 관건 가운데 또 하나는 의원단이 당직을 맡을지 말지의 여부였다. 일곱번째 안건으로 올라간 ‘국회의원단의 운영과 지원에 관한 규정의 제정의 건’은 당직공직 분리 여부, 의정지원단의 체계, 보좌관의 인사권을 당대표가 가질지 여부 등 세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이 가운데 핵심은 당연히 당직공직 분리 여부였다. 이 안건은 2003년 당발전특별위원회 토론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제 두 달 안에 민주노동당 소속 국회의원이 탄생하는 만큼 이날 중앙위에선 결단을 해야만 될 상황이었다.<상자기사4 참조> 하지만 이날 당대표단이 보인 입장은 이것이었다.
“대표단 의견을 모았다. 의원이 몇명이 나올지 아직 모른다. 당내 정세나 지형의 변화 등에 따라 지도체제 등과 연동되어 있기 때문에, 바쁜 면이 있긴 하지만 ‘총선 이후 중앙위에서 심도 있게 판단해서 결정하는 것이 온당치 않겠는가’라는 의견이다. 다음으로 넘겼으면 한다.”(천영세 당시 부대표의 중앙위 발언)
이에 대해 “사람을 보고 시스템을 결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이장규 중앙위원), “안건 처리 과정에서 유보안을 다루는 것은 문제가 있다”(김준수 중앙위원)는 반발이 있었지만, 표결 결과 “이번에 다루자”는 의견은 소수파였다.
당직공직 분리는 시스템에 대한 문제이며, 시스템 구성은 ‘인물’을 염두에 두지 않고 ‘원칙’으로 만들어야 하는 게 ‘상식’이다. 왜 중앙위는 이날 유보라는 ‘무리한’ 선택을 했을까. 일단 ‘(총선결과를) 두고 보고 싶다’는 각 정파그룹의 불안함과 민감한 안건을 자주 유보시키는 민주노동당 중앙위의 ‘전통’이 함께 작용했을 것이다.<상자기사5 참조>
과정이 어찌됐던 이날 유보 결정은 몇가지 결과를 낳았다. 하나는 5월 당 지도부 선출과정에서 의원단을 확보하지 못한 ‘원내 소수파’는 사활을 건 선거투쟁에 돌입하게 됐고, 4·15 총선 직후 국회의원 당선자들은 어떤 기준도 없는 맨 땅에서 일을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맨 땅에서 시작한다는 게 ‘일 시작하기 어렵다’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는 것은 좀더 시간이 흐른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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