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국회였다. 흡사 ‘콩쥐팥쥐’나 ‘흥부와 놀부’ 같은 동화를 연상시키는 듯한 이야기들이 2004년 10월7일 국회 환경노동위 국정감사장(서울, 경인, 대전 노동청)에서 드러났다. 사용자와 노동자의 처지가 이렇듯 극명하게 대립되기는 아마 국회가 열린 뒤 처음이었을지도 모른다. 마침내 보수양당의 환노위 위원들까지 “‘야마’가 돌아버렸다.”(당시 박순석 회장은 노조와 대화과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이 민주노동당의 힘이었다.
대전지역의 대표적인 장기투쟁사업장인 호텔리베라 문제가 국감장으로 올라올 수 있었던 것은 민주노동당 의원이 환노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상황은 진보정당이 원내진출을 하게 될 경우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되는가를 아주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노사 합의를 부정한 것도, 위장폐업도, 대전지방노동청의 중재를 무시한 것도, 사용자의 부당노동행위도, ‘회장님’이 버티면 어쩔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이 단막극에서 드러났다.
이들을 증인으로 불러낸 단병호 의원은 물론, 타당의 의원들까지 박순석 회장의 ‘국회모독’을 질타했고, 열받은 타당 의원들은 아예 ‘금쪽같은’ 국감질의시간을 단 의원에게 양보하기까지 했다. 선악이 명확했고, 첫 원내진출 한 진보정당의 국정감사는 이 구분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바쁠 지경이었다.
국감, 깔아놓은 멍석
민주노동당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대부분 운동권 출신이다. 세상의 부조리와 부당함을 알리겠다고, 며칠씩 단식하고 농성하고 사람 조직해서 집회하는 게 그들의 일상이었다. 안간힘을 다 써도 이기지 못하고, 경찰에게 얻어맞고, 소주에 눈물 방울 떨군 경험이 없는 의원과 당직자는 민주노동당에 거의 없다.
그런 경험을 가진 자들에게 국정감사는 말 그대로 깔아놓은 멍석이었다. 요청하면 정부에서 자료 만들어주고, 잘만 가공하면 국감장에 기자들이 벌떼처럼 모여드는 곳. 핵심만 잘 잡으면 온 나라를 한번 들었다 놨다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곳이 바로 국정감사장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원내진출 직후부터 국감 준비에 전력을 다했다.
여기에 민중운동, 사회운동, 시민운동을 한다는 거의 모든 단체들이 민주노동당 주위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항상 국감 때면 로비를 해 왔지만, 민주노동당은 기존 정당과 그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랐다. 우선 거의 모든 (진보적) 사안에 요구자의 입장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고, 40회의 워크숍을 열며 이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견인했다. 민주노동당이 표방한 국감의 이름도 ‘참여·민생·정책국감’이었다. 사업기조 역시 “빌릴 수 있는 손은 다 빌린다”였다.
비정규직 문제와 산업안전, 결식아동 지원, 조세개혁, 최저생계비 현실화, 여성노동기본권 확보, 골프장 건설, 자활제도 개선, 환경성 질환, 사회복지시설 정책평가, 장애인이동권 확보 등 그동안 정치권에 홀대 받았던 온갖 이슈들이 민주노동당으로 빨려들어갔다.
언론, 박수를 아끼지 않다
여기에 참여했던 시민사회단체들의 반응도 고무적이었다. “그동안 무시당했던 우리의 주장을 정책으로 받아들이는 민주노동당을 신뢰하게 됐다.”(학교급식운동을 하던 한 활동가) “타 정당과 달리 입장조율에 힘 뺄 필요가 없다. 어떻게 부각할지 전술논의만 할 수 있어 더 편하다.”(환경운동연합 관계자)
물론, 민주노동당 최대 지지조직인 민주노총은 각 사업장별로 현안을 정리해, 민주노동당과 공동보조를 취했다. 2004년 국감에서 민주노총 산하 사업장들은 고질적인 문제부터 회심의 ‘일타’까지 현안과제를 바리바리 싸들고 의원실을 찾았다.
이러는 사이 국감 ‘스타’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심상정, 노회찬 의원이었다. 심 의원이 국감 때 밝혀낸 세금낭비사례의 총액은 삼성재벌의 탈세 1조5천억원, 외평채 문제 1조8천억원, 국민연금 이자손실 2조원 등 무려 5조3천억원에 이른다. 이는 단순한 폭로를 넘어서, ‘운동권’ ‘아마추어’ 정당이라는 우려를 일거에 날려버렸다. 또한 백전노장의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의 ‘백기투항’ 사건 등 피감기관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심 의원의 행보는 국감 내내 화제꺼리였다.
노회찬 의원의 주한미군기지 이전 문제는 새로운 전형모델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이 문제는 다음 회에 다룬다) 언론은 민주노동당에 찬사를 보내기 시작했다.<상자기사1 참조>
“10명의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각 상임위에서 단기필마였지만, 가짜이거나 무늬만 진보가 아닌, 진보 의제를 설정해냈다.”(<경향신문> 2004년 10월26일자 사설)
미숙함, 그 다음이 더 문제다
물론 처음인 만큼 문제도 적지 않았다. 당시 국감에서 민주노동당은 ‘공동의제’ 부각이 없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전반적인 집중점이 없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중반을 지나면서는 여성, 통상, 비정규 문제 등 공동의제를 정해 각 상임위별로 이슈화를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첫 국감은 민주노동당이 유연한 ‘전술운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경험의 부족, 대언론 관계의 미숙 등 처음이라 겪는 문제도 있었다. 중심적으로는 ‘한풀이’ 과제들을 소화하는 것과 집중점을 고심하던 와중에 호떡집에 불난 듯 국감을 치렀다. 또한 당 지역조직과 연계된, 특히 민주노동당 10명의 광역의원과 연계된 국감이 되지 못했다는 점은 당내에서 적지 않은 지적을 받았다. 또한 국감 과정에서 드러난 각 의원실별 능력의 편차는 아직 해결의 여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상자기사2 참조>
처음이니까 발생한 문제가 많았다. 하지만 리모델링을 구상하기엔 당의 구심력이 급속히 감소했다. 정치 담론의 주도는 권력과 연결된다. 국감 이후 당은 급속히 원내 중심, 의원 중심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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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자위 소속의 이영순 의원은 경찰청이 피감기관 중 하나다. 당시에 민주노동당은 경찰과 한창 악감정이 쌓여 있을 때였다. 또한 경찰청 내 한 부서인 공안문제연구소 폐지를 주장하고 있었다. 당연히 성적은 낮게 나올 수밖에 없다. 또한 이 의원은 각 지자체에서 고용한 비정규직의 실태를 어느 의원보다 열심히 부각하려 노력했고, 관련 사안을 질의시간에 30여회 할애했다. 이는 어떤 언론도 기사화 해 주지 않았다. 당의 정체성이 기준이었다면, 이영순 의원은 1등을 하고도 남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영순 의원과 보좌관들은 멋쩍은 얼굴로 한동안 지내야 했다. 당이 나서서, 보호해야 할 사안이었지만, 민주노동당은 ‘한 명이 누굴까’를 놓고 수군거리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다.
또한 국감이 끝난 후 민주노동당은 내부 기준을 세우고, 각 의원실의 활동을 평가하지 않았다. 여성, 비정규직 문제 등 공통과제를 얼마나 성실히 맡았는지, (당대표에게 보좌관 임면권이 있는 만큼) 각 의원실의 보좌진은 적절히 배치돼서 일을 처리했는지, 당의 정체성에 거스르는 정치행위를 하진 않았는지, 각 의원들의 언론 노출빈도는 얼마나 됐는지를 조사했어야 했다. 하지만 의례적인 사업평가를 넘어선 평가는 없었다. 사실, (의회주의를 벗어나서) 당 중심의 의정활동을 추구하고 싶다면, 몇배는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당이 알아주지 않으면 각 의원실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알아줄 만한 곳을 중심으로 움직이게 되는 것, 바로 언론 중심의 의정활동을 벌이게 된다는 말이다. 재선을 지상과제로 신문에 한 줄 더 나기 위해 활동하는 것이 바로 ‘의회주의’로 움직이는 보수정당의 의원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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