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2월14일, 민주노동당 의원단-최고위원 연석회의 자리에서 벌어졌던 논쟁이다.

“국가보안법 투쟁과 관련해 올해처럼 많은 시민사회단체들이 투쟁에 결합하고 대규모 단식이 진행된 적이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투쟁해야 하겠다는 생각이다. 사무총장인 제가 단식에 들어갈 것이다.”(김창현 사무총장)

“사무총장을 비롯해서 총력투쟁을 한다고 했는데 목표가 연내 국가보안법폐지 관철인가 아니면 이번 투쟁을 통해 당과 연대세력의 조직 강화가 목표인가.”(권영길 의원)

“비록 성과에 한계가 있다고 하더라도 최대한 하는 게 옳다. 국가보안법과 관련해 원내에서도 뭔가 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이용식 최고위원)

“국보법 처리에 대한 여야의 입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국회 안에서는 연내에 처리될 것이라는 게 감지된 적이 없다. 국가보안법은 몇가지 민생현안을 처리하기 위한 협상용일 뿐인데 우리가 전 당력을 쏟아야 하는지, 객관적 판단에 대한 차이가 있는 것 같다.”(단병호 의원)

“의원들이 국민의 힘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민주노동당은 국민의 힘을 믿고 투쟁하는 것이 필요하다. 투쟁의 대열이 광화문으로 간다는 뜻은 보다 많은 국민들을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박인숙 최고위원)


호랑이는 달리기 시작했다

이 모습은 국가보안법이라는 이슈에 대처하기 위한 전술을 놓고 건설적인 토론을 하는 모양은 분명히 아니었다. 상황은 이미 어디론가 치닫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주객관적 상황을 면밀히 분석해 바른 작전을 짤 것인가도 이미 논외였다.

최고위원들은 ‘의원단의 농성이든 단식이든 원내에서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했다. 의원들은 ‘정세에 맞지 않다’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권영길 의원은 “원하는 게 국가보안법 폐지인지 연대 강화인지” 거듭 되물었지만, 돌아온 답은 “뭐라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봐도 연내 처리는 불가능한데 꼭 그렇게 당력을 쏟아야겠냐’는 쪽과 ‘안살림도 챙겨야 하는 만큼 뭐라도 해야 한다’는 쪽이 논쟁을 하고 있었다. 이미 논쟁이 아니었다. 이 문제는 실은 전략과 관련한 것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에는 전략을 놓고 논쟁을 한 전통이 없다. 그저 '소 닭 보듯이'만 있었을 뿐이다('사회주의 이상 계승 발전'이라는 논쟁을 상기하라).

최고위원과 의원단 사이에 정보격차는 없었다. 적어도 국가보안법에 관한 한 그랬다. 최고위원과 의원단은 10월말부터 지겨울 정도로 정세토론을 했고 정보를 교환한 상태였다. 어느 언론도 연내 처리가 가능하다고 기사를 쓰지 않고 있었다. 정세는 누가 봐도 연내 처리 불가였다. 그런데 왜 이런 논쟁이 벌어졌을까.

민주노동당이 호랑이 등에 탔기 때문이었다. 호랑이는 다름아닌 국가보안법이었고, 의제는 여당이 던졌다. 그런데 국가보안법은 한나라당도 이야기했듯이 사실상 사문화 되기 시작했고, 야당은 단독으로 원내 과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는 국가보안법 의제란 철저히 여당의 뜻에 달린 것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은 더 철저한 개혁을 위해 여당을 압박해야 하는가.

적어도 일부의 최고위원들은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당더러 호랑이 등에 올라타기를 권했다. 하지만 여당은 호랑이 등에 올라타지 않았다. 그들은 당초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문제로 한나라당과 협상을 하려 했다.

당황한 사람은 칼을 빼든 민주노동당이었다. 누구는 떨어지면 죽는다며 호랑이 목덜미를 부여앉았고, 누구는 지금이라도 뛰어내려야 한다고 훈수를 뒀다. 정답은 없었다. 애시당초 등에 타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 이외에는. 그러나 처음에는 아무도 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2004년 연말, 국회 앞은 1,000명 이상의 단식농성단이 점령하고 있었다. 삭발한 사람도 둘 건너 한명씩 보였다. 그들의 ‘열정’과 '선의'는 사실이었지만, 거기에는 책임이 없었다. 국가보안법은 당연히 폐기돼야 할 법이다. 하지만 정세를 오판한 혹은 오판할 수밖에 없었던 민주노동당까지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개혁입법에서 열린우리당의 의석은 ‘161석’

정기국회 막바지, 민주노동당의 원내활동 역시 속편한 상태가 아니었다. 10월20일 개혁공조를 파기하고, 다음날 자체 개혁입법안을 제출했지만, 이것의 힘은 3.3% 의석만큼을 넘어서지 못했다. 10월말, 이해찬 국무총리의 ‘차떼기당’ 발언 이후 공전을 거듭하던 기간에 민주노동당은 국회 정상화를 외치고 있었지만, 메아리는 없었다.

이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은 ‘국회파행’을 볼모로 힘겨루기를 했고, 봉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하지만 봉합 이후에 열릴 국회는 개혁입법 처리를 위한 국회가 아닐 것이 확실했다. 11월11일 이해찬 총리의 사과 이후 국회는 정상화 됐지만, 그뒤의 정세는 민주노동당이 무대에 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11월15일, 국회 ‘정상화’ 직후 이부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한나라당에 4자회담을 제안했다. “(열린우리당-한나라당) 양당 대표와 원내대표가 조건 없이 만나 4자회담을 통해 의회주의를 복원하고 정치력과 지도력을 발휘해 새해 예산안을 포함한 정국현안에 대해 합의를 도출해 내자.”

결국 열린우리당은 더이상 2004년 정기국회에서 개혁입법을 처리할 생각이 없다는 뜻을 확실히 한 것이다.<상자기사1 참조> 민주노동당이, 아니 민주노동당 지도부 일부가 꿈꿨던 “진보-개혁의 대승적 협력”은 철저한 정세오판이었음이 드러났다.<상자기사2 참조>

의원단 역시 답답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개혁공조 파기 때까지도 “열린우리당에 개혁연대의 공이 넘어갔다”(천영세 의원단대표, 10월20일 개혁공조 파기 기자회견)며 가능성을 다 접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김혜경 당대표는 “열린우리당이 뒷걸음질친 법안을 독자제출하면서 개혁공조가 무산 위기에 처했다”며 “진정한 개혁연대가 이뤄질 수 있는가 여부는 열린우리당의 개혁의지와 결단에 달려 있다”고 말하면서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있음을 밝혔다(10월20일 최고위원회 발언). 그러나 이미 열린우리당의 눈에는 민주노동당은 보이지 않았다.

개혁입법을 처리할 결심만 서면 이미 민주노동당의 10표는 자당의 표와 마찬가지인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은 굳이 정치적 예산을 민주노동당을 위해 잡을 필요가 없었다. 국가보안법만 놓고 보면 ‘불안한 151석’이 아니라 ‘확실한 161석’이었다는 뜻이다. 열린우리당 내부 사정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런 상황에서 122석의 거대 야당인 한나라당과 협상을 시작하는 것은 사실 정상적인 정치행위로 봐야 했다.

"개혁정당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짓", "여당이 총선에서 나타난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을 부정하는 짓" 등등. 이렇게 따져봐야 ‘161석’의 여당은 신경 쓸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민주노동당 역시 창당 이래로 개혁정당을 신뢰한 적은 단 하루도 없었다. 2004년 첫 원내진출 직후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사실 문제는 이것이었다.

불어나는 단식농성단

가을이 지나 겨울로 접어들면서 민주노동당의 입지는 더욱 옹색해져갔다. 개혁공조 파기 이후 원내에서는 '5대 민생, 3대 개혁 과제'를 내세우며, ‘개혁에서 민생으로’ 방향타를 돌리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이미 거대 보수양당의 힘겨루기 와중에 정국은 민주노동당과 무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또한 호랑이가 뛰기 시작했다. 국회 앞에서 “국가보안법 연내처리”를 위한 대규모 농성이 시작된 것이다.<상자기사3 참조>

11월1일, 한국청년단체협의회에서 시작된 단식 농성은 점차 농성 참여인원을 불려가고 있었다. 12월1일에는 국가보안법 제정 56주년을 맞아, 56인이 집단삭발식을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는가 하면, 12월6일에는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의 주도로 300명의 집단단식농성이 시작됐다. 12월13일에는 민주노총이 단식농성에 합류했다. 12월말에 이르러선 단식자의 숫자가 무려 1,000명에 이르렀다. 여의도 국회 앞은 국가보안법 폐지 광장이었다. 당은 총진군대회까지 열며 이에 화답했다.<상자기사4 참조>

단식농성, 민주노동당을 압박하다(?)

이들의 단식은 물론 열린우리당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151석의 거대 개혁정당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키를 쥐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창당 이래로 “국가보안법폐지”를 당론으로 하고 있었던 만큼 압박 대상이 아닌 것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단식농성으로 압박을 받은 쪽은 열린우리당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었다.

열린우리당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단식자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던 12월21일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과 4자회담을 통해, 회기 내 (단식자 대부분이 반대할 것이 자명할) 파병연장안 통과를 전격 합의했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선 ‘합의처리’을 약속했다. 둘 사이에 ‘합의’가 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국회 안팎으로 아무도 없었다.


열린우리당에게 단식농성자들은 딱 두 가지 의미가 있었을 뿐이었다. 한나라당과 협상에서 ‘양념’ 정도의 무게를 가진 압박 수단 그리고, 늘 있는 국회 앞 데모대. 보수정당의 국회의원들이 국회 앞 대중운동에 관심을 쏟는 경우는, (체제를 위협하는 수준이 아니라면 자신의 지역구의 유권자들이 많이 참가하고 있을 때, 그때 뿐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입장은 달랐다. 우선 단식자의 상당수가 민주노동당 당원이었다. 당 지역조직에서는 아예 상근활동가들이 와서 단식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연재 22회, 9월20일자) 민주노동당은 개혁세력과 연대를 통해 국가보안법을 끝장낼 각오를 이미 했다. 당연히 당의 얼굴인 “의원들이 뭔가 더 해주길” 기대하게 돼 있었다. 하지만 개혁사안에서 민주노동당은 3.3%의 의석 이상의 힘이 없었다. 당이 무슨 짓을 해도 연내 처리를 견인할 방법은 없었다.

결론은 ‘무슨 짓’이라도 하자는 쪽으로 나왔다. 이미 꺾을 수 없다면 선택은 하나, 계속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치적 판단에 대한 책임은, ‘피해자’가 된다면 상당부분 면책될 수 있었다.

12월1일, 유선희 최고위원과 김미희 최고위원이 삭발했다. 12월6일, 전 지도부는 농성장에서 한뎃잠을 잘 것을 결의했다. 12월 중순, 김창현 사무총장이 김혜경 대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식에 돌입했다. 몇몇 최고위원들도 동참했다. 그리고, 12월20일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국회 본청 소회의실 농성에 돌입했다.

민주노동당에 조타수가 있었는지 별도의 질문이 필요하겠지만, 민주노동당호는 키를 바다에 던졌다. 그리고 자신을 '탁류'에 맡겼다. 지도부는 탁류에 '국가보안법 철폐'라는 빗금을 치고 싶었겠지만, 그것은 각주구검이었을 뿐이다.

<상자기사 ①> 열린우리당은 처음부터 연내처리 의지 없었다 
역대 국회에서 다수당이 ‘법제사법위원장’ 자리를 양보한 적이 있었을까? 답은 ‘딱 한번 있다’이다. 17대 국회가 그랬다. 열린우리당은 초반 난항을 겪던 상임위 배정과정에서 법사위원장을 한나라당에게 양보했다. 이는 두 가지 중 하나를 의미한다. 과반수 여당이 개혁입법을 힘있게 추진할 의사가 없었거나, 그들이 국회법을 모르는 ‘얼치기’였거나.


17개 국회 첫 정기국회에서 열린우리당은 ‘국가보안법’을 들고 나왔지만, 그들은 이미 단추를 딴 곳에 꿰고 있었다. 여기에 심심치 않게 돌출되는 ‘정체성 논란’이 반영하듯, 열린우리당 의원들의 성향과 이념은 균질하지 않다. 참여와 투명, 지역감정 해소는 정치철학이나 노선이 아니기 때문이다.


열린우리당의 17대 총선에서 과반수를 넘기는 152석을 획득했다. 김원기 국회의장을 제외하고도 151석. 여기에 민주노동당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거친 투사 10명이 전면에 설 준비가 돼 있었다. 한나라당 소장파 의원 의원 몇몇과 민주당 9석 중 최소한 절반 이상…. 여당 내 이탈표를 감안해도 의지만 있었다면 (자당 출신)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법사위 돌파 등 국가보안법을 폐지할 수 있는 방법은 적지 않았다. 요컨대 의지가 부족했다.


앞서도 지적했지만, 열린우리당에게 만일 국가보안법을 처리할 의지가 있었다면 열린우리당의 의석은 민주노동당의 10석을 더해 '161석'이 된다. 그러나 10월20일, 열린우리당은 (개혁공조가 파기될 게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민주노동당이 절대 받을 수 없는 자체 개혁입법안을 제출했다. 이는 '161석'을 포기한다는 소리였다.


물론 이해관계가 다 같지는 않았다. 개혁성이 곧 표로 연결되는 개혁 강경파 의원들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40여명의 강경파 의원들은 국보법 폐지 연내처리를 주장하며 12월20일 농성에 들어갔다. 여당 의원이 너무 세게 ‘농성’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240시간 의원총회’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밤이면 몇몇 선배의원들은 농성장에 들러, ‘야식이라도 사먹으라는 듯’ 많지 않은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불편한 잠자리를 참아야 하는 동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차원이었을 것이다.

<상자기사 ②> 민주노동당의 평가

또한 대의원대회는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한 요구를 전 국민적인 쟁점으로 형성하는 성과를 낳았다”고,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의 전면화로 보수-수구 대 진보-개혁의 분명한 전선을 형성하고 한나라당을 반역사적이고 반국민적인 정당으로 분명하게 낙인찍었다”고 평가했다.


즉 보수-수구 대 진보-개혁의 분명한 전선을 형성했지만 정세판단의 오류로 인해 개혁세력의 기회주의성을 폭로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국가보안법 폐지투쟁에 상대적으로 더 열심히였던 자민통 성향의 대의원이 (상대적으로 냉소적이었던) 좌파 대의원보다 숫자가 더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이 평가는 대단히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다.


대의원대회를 통과한 이 평가는 최고위원회에서 만들어진 평가안과 다르다. (정기당대회 안건 상정 권한이 있던) 2월19일 중앙위에 올라간 최고위원회의 안은 “열린우리당을 무능하고 기회주의적인 정당으로 선명하게 각인시켰으며, 진보개혁의 대세적 흐름을 조성했다”고 규정하고 있었지만, 중앙위가 이를 ‘비판적으로’ 수정했고, 대의원대회가 통과시킨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 최고의결기구의 하반기 중심투쟁에 대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책임지는 당내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상자기사 ③>

하지만 민주노동당도 '그림'의 주제를 설명하지 못했다. 당은 왜 자당 의원이 50이 다 된 나이에, 운동화까지 챙겨 신고, 몸싸움을 감내해야 했는지 확실히 정해주지 않았다. 그저 연내처리를 위해 노회찬 의원이 싸우고 있다고 선전했을 뿐이다.


당시 노회찬 의원이 한 말이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민주노동당의 법안상정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싸웠다. 열린우리당도 자당의 법안을 상정하기 위해 싸우기에 제휴한 것이지 같은 목적으로 함께 싸운게 아니다.” 그렇다. 민주노동당의 안은 ‘국가보안법 폐지안’이었고, 열린우리당은 ‘형법보완안’을 제출한 상태였다. 둘의 목적은 달랐다. 하지만 국회 앞 단식농성장의 중심구호는 “연내 처리”였다. ‘무엇을’에 대한 답은 명확하지 않았다. 이것에 대한 지적은 당시에도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끝까지 완전폐지를 주장할 것인가? 아니면 지금의 안보다 더 나은 법안을 내오기 위해 열린우리당과 손잡고 논의해야 한다는 것인가? 투쟁전술은 수단인데 먼저 목표에 대한 합의가 없다. 투쟁의 목표가 연내처리냐, 아니면 더 나은 안을 합의하는 것이냐, 이런 문제가 합의되지 않고 보니까 전술논의가 안 되는 것이다.”(노회찬 의원, 12월14일 의원단-최고위원 연석회의 발언 중)


아니면 합의가 됐는데, 노회찬 의원이 잘 몰랐을 수도 있다. “국가보안법 폐지는 비록 형법으로 ‘상당부분’ 존치시킨다 하더라도 역사적인 사건, 발전임.”(11월1일 최고위원회에서 회람된 <최근 정국현안에 대한 대응> 문건 중) 이미 연재 22회에서 지적했듯이 이 문건은 폐기된 문건이 아니다.


분명 12월 대규모 단식단이 외쳤던 중심구호는 “연내 처리”였고, (당에서 주장하듯) 단식 참가자의 대부분은 당원들이었다. 민주노동당은 자당의 완전폐지안을 연내에 관철할 힘이 없었다. 열린우리당은 ‘형법보완’안을 연내에 처리할 의지가 없었다.


문득 또 궁금해진다. 민주노동당은 과연 2004년 연말,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것일까.
<상자기사 ④> 민주노동당은 어디로 ‘진군’했나
민주노동당은 12월5일 5천여명의 당원이 운집한 가운데, ‘총진군대회’를 열었다. 창당 이래 최초로 독자적인 정치집회라는 화려한 수식 아래 전국 각지의 당원들이 버스를 동원해 모여들었다. 이 대회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 △국보법 완전 폐지 △쌀 수입 개방 저지 △공무원 노동3권 보장 △이라크 파병연장 저지를 내걸었다.


하지만 이 대회를 놓고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 대회가 열리기로 결정된 것은 2004년 10월12일 당 중앙위에서였다. 당시 김창현 사무총장은 “당원들 총동원령을 내려서 연대투쟁과는 별개로 당의 정치적 구호를 단일하게 외치는 의미는 충분히 있다는 결론을 지도부에서 내렸다”고 밝혔다.



하지만, “과거의 동원 습성이 아닌가”(장태수 중앙위원) “관성적인 투쟁방식이라는 우려가 있다. 제대로 된 정치적 파급력을 가질 것인가에 대해 의문스럽다”(정창윤 중앙위원)는 반발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당시 중앙위는 만장일치로 이 대회를 승인했다. 민주노동당 활동가들은 야박한 사람들이 아니다.


“지도부가 투쟁하겠다는데, 발목잡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속아주는 셈치고, 당원들 모아서, 버스 대절해서 간 것이다.”(경기도의 한 지역위원회 위원장)


대회를 준비하며 민주노동당은 적지 않은 당력을 소모했다. 대회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당원들에게 갹출할 것을 결정했고, 지역 상근자들은 각자 수백명의 당원들에게 전화를 해 출금 동의를 받아야 했다.


대회는 대회사와 연대사, 투쟁연설과 몇가지 문화공연 등 일반적인 집회 형식으로 열렸다. 그리고 대회 주최 측은 참가자들을 국가보안법폐지시민연대가 주최하는 ‘국보법 폐지촉구를 위한 촛불집회’로 인솔했다. 이 역시 적지 않은 구설에 시달린 것도 사실이다.


민주노동당은 당시 대회를 이렇게 평가한다. “당의 정치적 요구를 대중적으로 천명하였으며, 당이 대규모 군중집회를 독자적으로 전개하는 것이 가능함으로써 대내외적으로 당의 위상을 높이고, 당원 동지들의 당 중심성을 뚜렷이 하는 성과를 가져왔다.”(2005년 민주노동당 정기당대회 자료집 중)


하지만 이 말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여 일어나라 하고 외치는 것은 좋지만 거기엔 언제나 향상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방향의 진로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빅토르 위고, <레 미제라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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