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노정관계나 노동문제는 정치권 한복판으로 등장하지 못했다.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세상의 눈이 관대하지 못한 시절의 노동자정당의 정치는 쉽지 않았다. 어차피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생로병사’를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사이. 하지만 2005년, 봄이 한창일 때도 둘은 서로 힘을 나눌 줄 몰랐다.
반대투쟁이 강행을 막았다?
2005년 2월 임시국회 막바지, 국회 환경노동위가 지난해부터 계류 중이던 비정규직 관련법을 2월 임시국회 회기 내 처리하겠다는 이야기가 여권 일각에서 나왔다.
양대노총은 강행처리 시 즉각적인 총파업과 노사정위 탈퇴, 모든 대화창구 철수를 경고하며 강경한 입장을 내놓았다. 이목희 열린우리당 의원(환노위 법안심사소위 위원장)이 “노사간 비공식 대화의 추이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 결과를 지켜보고 처리 방향을 결정하겠다는 기존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말로 하는 국회 내 정치와 조직을 움직이는 대중조직의 속도감은 다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양대노총은 일단 총파업방침을 유보했지만, 경계태세를 늦추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결국 민주노동당 의원들은 법안심사소위가 열리는 환노위 소회의장을 점거했고, 보수양당의 의원들은 더이상 강행처리 시도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4월 국회에서 처리하자’는 언질을 받아냈다.
2월 국회의 이 상황은 표면적으로만 보면, 정부여당이 강행하려고 했더니, 양대노총이 강경하게 반대했고, 민주노동당이 점거를 불사한 저지에 나섰기 때문에 2월 국회에서 통과가 저지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당시 정황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2월1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사회적 교섭 승인' 건을 놓고 사상 초유의 폭력사태까지 발생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유회됐다. 이 사건은 민주노총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지만, 이 사건은 정부여당의 입장에게 ‘꽃놀이패’를 쥐어줬다. 민주노총이 정부와 대화할 준비를 하고 있던 국면에서 정부가 비정규 법안을 강행처리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1997년의 노동법 개악 때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확실한 것은 정부여당의 정치적 부담은 대단히 커졌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약 2월1일 민주노총 대대에서 사회적 교섭이 승인됐거나 부결됐다면, 정부는 대화를 하든 선제공격을 하든 쉽지 않은 국면을 준비했어야 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은 채 자중지란을 벌였다. 정부 입장에선 상대가 약해졌을 때 강행처리 방침이 있다는 말만 흘려도 손해 볼 게 없었다.
자중지란 와중에 위력적인 투쟁을 준비할 조건도 아니었고, 교섭이든 투쟁이든 딱 부러진 카드를 민주노총이 빼들 조건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보를 울려 상대를 떠본 후에, ‘이번엔 봐 줄테니 4월에 처리하자’면서 명분도 얻을 수 있는, 손해 볼 것 없는 장사를 했다는 이야기다.
힘 빠진 첫 점거
확실한 이미지를 각인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던 민주노동당 입장에선 다소 힘빠지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점거까지 하지 않아도, 2월 국회에서 법안의 무리한 강행은 없을 것이라는 것이 당시의 정세였다.
하지만 이미 벌집은 쑤셔졌고, 시선은 일제히 민주노동당 의원들에게로 쏠렸다. 이미 2004년 연말에, “강행처리 하면 몸으로라도 막겠다”는 입장을 밝힌 상태. 미지근한 점거가 시작된 것이다. 이 사이 2월 국회는 추곡수매제 폐지를 골자로 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별다른 저항 없이 통과시켰다.<상자기사1 참조>
문제는 2월이냐, 4월이냐가 아니었다. 언제 처리되든, 민주노동당과 양대노총이 합의할 수 있는 수준의 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없었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선 ‘저지가 능사가 아니’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4월 임시국회 전략을 짰어야 할 상황, 민주노동당의 정치 대상은 두 곳이었다. 하나는 원내에서 의원들을 설득하는 일. 이건 지난회에도 지적했듯이 공들인다고 효과가 나오는 곳이 아니었다. 또 다른 한쪽은 자기편인 노동계였다. 특히 민주노총과는 ‘파업 일정’ 맞추는 것 이상의 전술논의가 필요했다. 저지냐, 옥쇄냐, 협상이냐를 판단했어야 했고, 법안의 각 조항 중 우선순위를 만들 필요도 있었다. 여론전의 기본 방침도 함께 만들었어야 했다.
운신의 폭에 대한 합의가 없이 민주노동당 독자로 움직인다는 것은 그렇지 않아도 내부정치의 지형이 워낙 복잡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에게 분란의 자충수가 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서로 위임할 것은 없었나
하지만 2월 국회가 끝나고, 4월 임시국회가 시작될 때까지 민주노동당은 움직이지 않았다. 당은 점거를 통한 저지, 민주노총은 총파업 경고, 이 두 가지 외에는 쥐고 있는 카드가 없었다. 그 사이 민주노총은 또 한번의 대의원대회 폭력사태(3월15일)를 겪었다. 4월1일 민주노총의 경고파업은 민주노총의 예상(2만명)보다 적은 1만2천명이 참가한 가운데 끝이 났다.
이러는 동안 3월30일, 이경재 국회 환노위 위원장이 국회 중심의 노사정대표자회의를 제안했다.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었고, 이에 따라 4월5일 첫 대표자회의가 열렸다.
앞선 조건들, 특히 민주노총의 내부지형을 고려했을 때, 민주노총은 ‘혁명적’인 합의안이 아니라면 절대 도장을 찍어줄 수 없었다. 사회적 합의 추진 문제로 두 차례나 폭력 사태를 겪은 상태에서, 반대파들의 눈이 합의안 조문보다 더 신경 쓰일 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난 민주노총 역사는 노정 또는 노사정 간의 합의가 내부를 덮치는 ‘태풍’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상자기사2 참조>
폭력사태는, 실은, 이 ‘태풍’을 대비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점에서는 당도 마찬가지였다. 노사정 협상이 진행되던 4월 국회 내내, 민주노동당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민주노총에 당 의원들의 표를 위임한 것도 아니었다. “99% 마음에 드는 것을 합의해 온다고 해도 1%가 부족하면 그것을 관철하기 위해 상임위에서 싸워야 한다. 그게 내 역할이다.” 단병호 의원은 이렇게 경고했다.
만약 국가인권위원회의 비정규직과 관련한 발표가 없었다면,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더욱 곤란한 지경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비정규직이 결코 고용의 일반원칙이 되어서는 안 된다. 비정규직은 고용형태에서는 예외적으로, 제한적으로 사용돼야 한다.” 4월14일, 인권위의 의견 표명은 정부와 사용자측의 일방적인 공세를 무디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이같은 인권위의 의견표명 뒤에는 원내진출 뒤부터 꾸준히 비정규 문제를 주의환기 시켜 온 민주노동당의 활동이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4월 국회의 비정규법 관련 노사정 협상은 예정된 수순처럼, 핵심조항에 대한 간극을 확인한 채 끝이 났다. 이어진 6월 국회에서 민주노동당 의원단은 한번 더 환노위 소회의실을 점거했다. 4월의 점거는 2월의 점거보다 더 옹색했다.
저지투쟁이냐 입법투쟁으로 전환이냐.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은 이 점에 대해 합의한 바 없다. 10명의 의원으로 법을 막는 것은 무리라는 게 비정규 관련법 저지 과정에서 드러났다. <상자기사3 참조> 다시 한번 ‘거대한 소수’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다. 아직 민주노동당은 ‘거대한’ 그것과 소통하고, 조직할 해법도 마련하지 못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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