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노조 국회지부 관계자들은 민주노동당 당선자 연수 강연 준비를 하느라 전날 밤을 꼬박 새웠다. 노조 내 국회 운영 전문가들이 모두 동원됐고, 남원 근처 숙소에 모여 내용을 넣고 빼며,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국회의 운영구조 및 의정지원체계>라는 제목의 강연 자료집을 완성한 것은 2004년 5월10일 아침 무렵. 남원연수원에 도착했을 때 그들의 눈에 처음 보인 모습은 자신의 식판을 닦고 있던 권영길 당시 당대표였다. 옆에 있던 천영세 당선자는 “아침밥은 먹었냐”며 인사부터 건넸다.
이윽고 강의실에 모였을 때, 사무처노조 관계자들과 당선자들은 ‘단결투쟁가’를 부르며 약간의 졸음과 어색함을 없앴다. “뭔가 다를 것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것이 느껴진다.” 강연에 앞서 사무처노조가 ‘의원 동지’들에게 건넨 인사였다.
첫 원내진출. 민주노동당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10명의 의원들도, 개원 국회를 준비하던 ‘17대 국회준비기획단’도 원내활동을 해본 경험이 없었다(준비기획단에는 타당 보좌관 출신 당원들이 몇 명 있기는 했다). 그렇게 고대하던 원내진출이었지만 그 다음에 대해서는 아직 막막했다.
선거가 끝나고, 매일 아침 열렸던 당선자 간담회가 주로 일정조정 등 ‘행정적인 문제’를 다루기에도 급급한 실정에서 당선자들은 원내활동의 목표와 단기 및 중장기 과제에 대한 인식의 공유가 필요하다는 데 뜻을 같이했다. 그래서 진행됐던 게 5월9일부터 11일까지 남원연수원에서 열렸던 ‘17대 국회의원 당선자 연수’였다.<상자기사1 참조> 이곳에서 많은 것들이 논의됐고, 결정됐다.
10개 상임위가 선택되기까지
당시 당선자 연수에서 결정한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게 바로 상임위 배정이었다. 국회 상임위는 모두 17개. 겸임이 가능한 2개 상임위(운영위와 여성위)와 비교섭단체 배정이 원천봉쇄돼 있는 정보위를 제외하면 14개다. 이 14개 중 어느 곳 하나 민중의 생활과 무관한 곳은 없다. 그러나 당선자는 10명. 어떻게 배정했더라도 아쉬움이 남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4월말 당선자 간담회는 국회준비기획단과 협의를 거쳐 상임위 배정의 기준을 마련했다.<연재 10회, 8월29일자 참조> 하지만 최종 결정권은 사실상 당선자들에게 있었다. 이 당시, 즉 총선이 끝난 뒤 상임위 배정 때까지가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전에 없던 ‘로비’를 받을 때였다. <상자기사2 참조>
4월 총선이 끝난 직후, 통일운동의 원로들이 당선자 몇 명과 간담회를 가진 자리에서 국방위 배정을 강하게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한 당선자는 국방위 배정을 못 박아 결정하지 않은 데 대해 ‘꾸중’을 듣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몇몇 민주노총 산하 연맹은 비공식 루트를 통해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상임위 배정을 요구했다. 특히 몇몇 연맹은 특정 의원을 찍어서 자신과 관련된 상임위에 배정해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다수의 당선자가 상임위 배정과 관련해, 로비성 전화에 시달렸다는 것은 당시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만큼 당선자들도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했다. 10일 저녁으로 예정됐던 상임위 배정은 11일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결정이 됐다. 결정 방식은 ‘1인3표 종다수 방식’이었다. 당선자들은 각자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상임위를 3개씩 적어내고, 많이 나온 순으로 10개의 상임위를 결정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은 농림해양수산위, 통일외교통상위, 정무위, 환경노동위, 재정경제위, 행정자치위, 산업자원위, 문화관광위, 교육위, 보건복지위 등 10개를 자당이 참여해야 할 상임위로 결정했다. 논란이 됐던 국방위(3표), 건교위(0표 추정)는 선택되지 못했다. 또한 정무위는 17회 국회 원구성 과정에서 타당에 의해 배제됐다(연재 16회에 자세히 다룰 예정).
10개 상임위가 결정된 뒤에도 어느 의원이 어느 상임위를 맡을지를 정해야 했다.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통외통위는 2명의 의원이 원했고, 환노위를 원했던 의원도 다수였다. 농해수위의 경우는 현애자 의원이 강기갑 의원에게 양보를 했지만, 보건복지위를 원했던 의원은 현애자 의원 한 명이 아니었다. ‘교통정리’에는 짧지 않은 논의과정이 필요했다. 당선자들의 상임위 배정 논의 전 과정은 실무진조차 배석시키지 않은 채 비공개로 진행됐다.<상자기사3 참조>
또 이 자리에서는 상임위 배정과 함께 민주노동당 의원단대표로 천영세 당선자가 선출됐다. 민주노동당 의원단대표는 별도의 선출 절차 없이 의원단 내부의 결정으로 정하게 돼 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당일 발표되지 않았다. 이유는 당시에 새 지도부 구성을 위한 당직선거 국면이었고, 의원단대표 역시 최고위원회의 일원인 만큼 선거에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우려에서다.
네트워크의 강화
당선자 연수에서는 진보적 의정활동의 기본 방향이 합의됐다. ‘사회운동정당으로서의 개혁의제별 네트워크의 강화’로 축약될 수 있는 이 기본방향은, 원내 3%의 소수정당이 해나가야 할 ‘거대한 소수’ 전략이 기본 바탕이 됐다. <상자기사4 참조>
기존 연대단체 혹은 조직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민중 및 시민사회단체와 긴밀한 연계망을 구축하고, 서로 합의한 운동과제 중심의 활동을 벌여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네트워크는 참여단체들의 분권화된 운영을 기본으로 하고, 인원, 재정, 역할 등을 참가단체가 자원하여 책임을 분담하는 형태로 운영해야 한다는 원칙을 잡아나갔다.
나중에 다룰 일이겠지만 이 네트워크의 형성은 쉽지 않았다. 이라크 파병 저지라는 첫 사업부터 삐걱거리기 시작해서, 발전된 방향의 조직형태의 전형으로 자리잡지 못했다. 딱 한 시기, 구상대로 굴러가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2004년 10월 국정감사 기간이었다.
왜 그랬을까? 정치적 대표체로서 민주노동당의 실력과 수준이 가장 큰 요인이겠지만, 같은 편이라고 ‘막연하게’ 믿었던 집단, 이른바 시민사회단체들의 정체성을 정확히 규정하지 못한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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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원국회가 시작되며 민주노동당이 주요 과제로 뽑았던 것들을 살펴보자.<표 참조> 이때까지만 해도 민주노동당은 개혁과제와 자신들만의 과제를 구분하지 않았다. 또한 둘 사이의 간극으로 인해 당내 정치가 요동칠 것이라는 것, ‘독자노선’ 논쟁에 휩싸일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첫 원내진출이었다. 남원연수원은 앞으로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벌어질 일들을 아직 내다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선자들이 자당 연수원에서 그 구조에 맞게 생활하는 것은 다른 당에서는 신선하게 볼 수 있는 일일지 모르지만, 민주노동당에서는 이례적인 게 아니다. 그리고 이 모습을 이례적이라고 쓰는 것 역시 민주노동당에 대한 일정의 정치적 평가를 배경에 깔고 있었다. 실제로는 당선자들과 함께 연수원 생활을 했던 40여명의 언론사 기자들의 모습이 더 이례적이었다.
처음 연수원에 도착한 기자들의 표정은 ‘충격과 공포’였다. 교실 바닥을 잠자리로 삼아야 했고, 초등학생들의 좁은 걸상에 앉아 기사를 써야 했다. 약간 민망한 구조의 화장실과 편리하지만은 않았던 세면시설을 보며, 투덜거리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일부 기자들은 주변에 다른 숙박업소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불편함은 잠시, 풍광 좋고 공기 좋은 연수원에 기자들은 곧 적응해갔다. 이승복 동상을 개조해 만든 ‘전태일 동상’에서 기념사진을 찍는가 하면, 연수원 독서실에서 무협지 삼매경에 빠졌던 기자도 있었다. 연수원 자전거를 빌려 산책을 나가는가 하면, 운동장 구석에서 휴가 나온 듯, 사색에 빠지는 기자들의 모습도 적지 않았다.
언론은 의원 당선자들의 설거지 하는 모습을 주로 찍었지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 후, 청소와 설거지까지 마무리하고 잠자리에 드는 기자들의 모습이 독자들에게는 차라리 더 생경했을지도 모른다. 당시에 취재를 나왔던 한 스포츠 신문의 기자는 “다음 휴가 때 아이와 함께 오고 싶다”는 말로 연수원 체험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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