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없었고, 탄탄한 선거조직도 없었다. 후보의 인지도도 부족했다. 믿을 것이라고는 오로지 당원뿐이었다. 선거전의 양대 축은 미디어를 통한 ‘공중전’과 거리는 누비며 유권자를 만나는 ‘지상전’이다.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중앙선대본이 TV토론을 중심으로 한 공중전에 주력했다면, 123명의 민주노동당 지역구 출마자들과 각 지역의 당원들은 지상전의 ‘전사’들이었다.


선거자금은 대부분 당원과 지지자들의 갹출로

우선 ‘민주노동당식’ 지상전의 전형적인 모습부터 살펴보자. 대부분은 지구당(현 지역위원회)에서 후보 발굴과 선거자금 마련 등의 기초 준비를 하며, 2003년 말에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구에서 후보를 확정 또는 내정하고 있었다.

민주노동당의 국회의원 후보가 되기 위해서는 해당 출마지역의 지구당에서 당원 직선에 의한 후보결정투표를 거쳐야 한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선을 치르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투표는 본격적인 선거운동을 앞두고 힘을 모으고 다지기 위한 축제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선거자금 마련은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이루어졌다.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당원들의 특별당비다. 4·15 총선에서 당시 4만 당원 가운데 상당수가 5만원 이상씩 특별당비를 납부했다. 10만원씩 납부한 당원도 적지 않았고, 이 돈은 민주노동당 선거자금의 저수지 역할을 했다.

두번째로 후원금이 있다. 이 때는 지역의 주요 노조들이 힘을 발휘하게 된다. 형제나 다름없는 민주노총의 존재가 돈과 표로 당을 보위한다. 지갑을 연 노동자는 자연스레 표까지 끌고 오게 마련이어서, 후원금 모금은 비단 돈만이 아닌 복합적인 목적을 갖는 민주노동당식 선거운동의 핵심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4·15 총선에서는 ‘10만원 세액공제’를 통해 적지 않은 후원금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래도 모자라면 빚을 지게 된다. 많은 민주노동당 총선 후보들과 주요 활동가들은 선거를 몇차례 거치면서 빚더미를 지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별히 규모가 큰 지구당이 아니라면 각 지역구별 선거자금은 3,000~4,500만원 수준. 사실 돈으로는 보수정당과 비교할 수조차 없다. 하지만 4·15 총선 때를 기억해보자. 보수정당 선거운동원 수에 밀리지 않는 민주노동당 선거운동원들이 거리에 운동을 하고 있던 모습이 기억날 것이다. 특별당비 내고, 휴가 내서 선거운동하고, 자기 지갑 털어 후보와 선거운동원들에게 밥을 사먹이던 사람들. 이른바 진성당원의 진가를 확실히 보여준 대목이었다. <상자기사1 참조>


“정당투표 12번을 알려라!”

17대 총선은 국회의원선거에서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가 도입된 첫번째 선거였다. 실은 이 정당명부제야말로 민주노동당이 주목받게 된 가장 직접적인 이유였다. 진보정당,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이 현실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고민이 시작됐다. 민주노동당에 배정된 정당투표 번호는 12번이었다. <상자기사2 참조> 지역구 출마자들의 기호와 정당투표 기호가 같은 한나라당(1번), 민주당(2번), 열린우리당(3번), 자민련(4번)과 달리, 민주노동당은 지역구 출마자들의 기호도 타당 후보자들에 따라 다 달랐고, 정당투표 기호도 지역구 출마자들의 그것과 달랐다.

“00번을 찍어달라”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선거구호가 등장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구호가 복잡하면 반응이 돌아오는 데 시간이 필요한 법. 이 시간 동안 남들이 손놓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하면 ‘한방에’ 표를 호소할 것인가.

상당수의 지역구 후보자들과 지역 당원들은 지역구 투표보다 정당기호 12번을 알리는 데 주력했다. 당선이 거의 확정적이었던 울산북구와 창원을구 그리고 조심스럽게 당선 가능성을 점쳤던 경기 성남 중원 등 몇군데 지역구를 제외하면, 지역구 후보가 당선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었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지역구 후보들은 자신의 당선보다는 당의 당선(정당명부투표에서 한 석이라도 더 많이 비례대표 의원을 확보하는 것)을 위해 애썼다.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이는 헌신이었다. <상자기사3 참조>

민주노총 전농, 선거운동의 중심 축

민주노동당의 산파 구실을 했던 민주노총과 2003년 말 민주노동당 지지를 선언했던 전농은 4·15 총선 득표활동의 중심적인 구실을 했다.

선거 시기 민주노총 이수호 위원장은 “정당득표 목표인 15% 중 10%는 민주노총이 책임지겠다”고 호언했으며, 문경식 전농 의장은 “남은 5%는 전농이 책임진다”고 화답했다. 이 두 조직이 했던 활동을 되돌아보면 결코 이 말이 ‘약속’으로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민주노총의 경우 선거 시기 총선대책위원회로 전 조직을 전환하고 득표활동을 벌였다. 당 최대 지지조직답게 확실한 책임감을 가지고 선거에 임했다. 산하 노조가 위치한 선거구에서는 가장 확실한 후원조직 역할을 했으며, 연월차를 활용해 조합원들이 선거운동 지원에 나섰다.

민주노동당 지역구 출마후보 123명 가운데 52명이 민주노총 출신 후보였으며, △전 조합원 정기기금 3천원 모금(실제로는 각 연맹과 노조의 정치사업 자금을 위해 대부분의 노조가 5천원~1만원의 정치기금을 모았다) △10만원 세액공제 참여 운동 △1조합원 3표 조직운동 등을 벌여나갔다.

주요 공단지역 득표율(민주노동당 총선평가서)
 지역구후보득표율정당투표득표율
울산북구46.9%35.4%
울산동구23.7%25.2%
경남거제21.9%26.2%
경남창원(갑) 15.1% (을) 49.8%24.3%
경기평택(을) 11.9%16.7%
인천부평(갑) 12.8% (을) 11.6%16.8%
전국평균미출마 지역 포함: 4.3%
출마 지역: 7.83%
13.03%
이밖에도 정치특보와 기관지 <노동과 세계> 특보 발행 등을 통해 선전홍보 활동을 지원했으며, 선거국면에서 노조 상근활동가를 선거 사무실로 파견해 선거업무를 도왔다. 실제로 민주노총 산하 사업장의 기반이 탄탄한 곳에선 다른 지역보다 확실히 많은 득표를 한 것이 드러난다. <표 참조>

전농 역시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농촌지역의 조직기반이 전무했던 민주노동당 입장에서는 농촌지역 선거구의 선거운동을 전농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전농은 실제로 그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경남 진주을(김미영)와 전북 완주(하연호)에서는 농민회 출신 후보가 출마해 선전했으며, 후보가 없는 지역구에서는 정당득표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여나갔다. 전농은 당시 ‘영농발대식’ 등을 적극 활용해 민주노동당 득표활동을 벌였다.

<상자기사 ①>

시사만평은 대형간판을 세우고, 실제 사람이 그림처럼 들어가서 시사만평을 만든 것이다. 전철역 앞, 출근길 인파가 많은 곳에서 행해진 시사만평은 시민들의 ‘디카 세례’를 받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물론 선거법 문제로 만평에 ‘민주노동당’을 적시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나는 유권자들은 누구 작품인지 다 알았을 것이다).


나양주 후보가 출마했던 거제지구당의 경우는 여성모임인 ‘아바’(‘아줌마가 세상을 바꾼다’의 준말)가 모임을 꾸리고, 강연회를 만들며 맹활약을 했다. 경기도 구리시지구당의 경우는 자전거 유세단을 만들어, 구리 전역을 돌며 선거운동을 벌여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또한 부평지역의 한 아줌마 당원은 ‘리니지’라는 온라인 게임을 하며 선거운동을 해 화제를 모았다. 사이버 공간에서 채팅 창을 통해 “기호 12번 민주노동당에 한 표 부탁한다”고 외치며 돌아다녔던 것이다.
<상자기사 ②> ‘가자! 민주노동당’으로 당명을 바꾸자?
선거에서 정당기호가 앞쪽에 있을수록 유리하다. ‘그냥 1번 꾹 찍고 나온다’는 ‘전설의 투표행태’를 굳이 들먹이지 않는다고 해도, 기호가 뒤쪽일수록 유권자는 정당의 ‘영향력’을 의심하게 된다.


17대 총선 당시 기호는 의석을 가진 정당 5곳은 (한나라당, 민주당, 열린우리당, 자민련, 국민통합21) 의석 순으로 기호가 확정됐다. 원외정당은 ‘가나다’ 순으로 기호를 받았다. 이에 따라 ‘가자 희망2080’이 기호 6번을 받았고, 공화당이 기호 7번을 받았다. 민주노동당은 ‘녹색사민당’에 이어 12번을 받게 됐다.


당시 중앙 선대본의 당직자들은 “당명을 ‘가자! 민주노동당’으로 바꾸면 기호 6번을 받을 수 있다”는 농담을 할 만큼 앞자리 기호를 받기를 원했다. 또한 기호 12번의 홍보문안을 두고 골머리를 앓았다.


당시 민주노동당 총선사이트였던 <판갈이넷>은 ‘기호 12번을 홍보할 수 있는 슬로건’을 공모했고, 1백여개의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1년 12달 행복한 나라 12번 민주노동당”, “한번 보고(1) 두 번 보면(2) 민주노동당이 보입니다”, “12번을 찍으면 12달 편합니다” 등 반짝이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중앙선대위의 토론을 거쳐 “1번과 2번이 망친 나라, 12번이 살리겠습니다”로 메인 슬로건을 정했다.

민주노동당의 선거운동
캠페인에서 지역사업으로 진화
 1997년 대선은 말할 것도 없이,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 직후에 치러진 총선에서 당은 선거운동의 ‘목적’과 ‘방법론’ 모두 백지인 상태에서 선거를 치렀다. 어느 활동가의 말처럼 “총파업 준비하듯 선거를 치렀던 상황”이었다.


대국민 득표활동은 ‘말랑말랑’ 해야 한다는 강박과 더불어, ‘운동권식’ 완고함이 섞인 기묘한 선거운동 양상이 나타났는데,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정체불명의 선거카피가 등장했는가 하면, 집회와 유세를 구별하지 못하는 행태도 곳곳에서 보였다.


하지만 2002년 지방선거와 같은 해 대선을 거치면서 당 활동가들도 선거에 적응하고 단련됐다. 이른바 선거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2004년 총선에선 각 선거사무소는 미약하게나마 조직선거를 추진했다. 경남 창원을과 울산북구는 말할 것도 없고, 상대적으로 당 혹은 민주노총·전농의 조직력이 강했던 경남 진주, 경기 성남, 인천 부평 등에서는 동별 선거책임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4·15 총선은 민주노동당이 선거조직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 계기가 됐다. 언론을 통한 공중전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는 정당명부 투표와 달리, 지역구 출마자의 득표는 호소가 아니 밀착된 선거조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실감하기 시작한 것이다.


총선 이후 민주노동당 각 지역위원회와 광역 시도당에서 임대아파트 임대료 관련 투쟁, 신용불량자 상담사업 등에 주력하는 곳이 늘어난 것은 4·15 총선의 학습효과가 크게 작용했다. 주민과 밀착해 사업하고, 그를 통해 지지를 끌어내는 게 가장 효과적인 ‘선거사업’이라는 사실을 민주노동당은 다섯 번의 큰 선거를 통해 알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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