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토론 전술의 성공…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2004년 3월20일, 노회찬 당시 선대본부장이 에 출연했다. 이날을 기점으로 민주노동당이 ‘바람’을 탔다. 차분히 축적되던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급등세로 전환됐으며, ‘노회찬 어록’이라는 신조어가 탄생한 날이기도 하다.

당시 노회찬 선대본부장이 TV 토론에서 선전할 수 있었던 것은 노 본부장 특유의 입담과 함께 창당 때부터 준비됐던 당의 정책역량 덕분이다. 정책정당, 민주노동당이 마침내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선거 기간 내내 매일 아침 열렸던 선대본 기획조정회의는 그 숨은 공신이었다.

4시간 전에 토론자 바뀌어

이날 TV 토론에 나설 예정자는 노회찬 선대본부장이 아니라 김석연 당시 정책위 부위원장(현 정책위 제2정조위원장)이었다. 당초 방송사측은 토론자로 교수, 언론인, 법조인 등 비정치인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변호사이며 경제정책 전문가인 김석연 부위원장은 적임자였다. 김 부위원장은 만사를 제쳐놓고 당사에서 토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날은 탄핵반대 촛불집회의 마지막날. 시청자들은 ‘토론’보다 ‘난타전’을 원했다. 각당은 서둘러 ‘싸움꾼’으로 토론자들을 교체했다. 탄핵은 민주노동당으로서는 가장 곤혹스러웠던 이슈. 민주노동당은 정면돌파를 해야 했고, 정책제시도 좋지만 ‘정곡’을 찔러야 했다.

“타당 토론자가 바뀌면서 내가 나갈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개인일정도 취소하고 토론 준비에 매진하고 있는 김석연 부위원장에게 바꾸자는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우선 천영세 선대위원장과 기획조정팀과 상의를 했다. (타당 선수들이 바뀌었다면) 내가 나가는 것이 맞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 했다. 하지만 김석연 부위원장에게는 나더러 말하라고 하더라.(웃음) 김 부위원장에게 자초지정을 설명하자 흔쾌히 받아들여 주었다. 그때가 토론 4시간을 앞둔 상황이었다.” 노회찬 의원의 증언이다.<상자기사1 참조>

‘선수교체’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탄핵과 관련해 민주노동당 내부적으로도 입장정리가 확실하지 않았던 시점에서 “열린우리당은 지갑을 주었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된다”는 말 한마디로 노회찬 ‘선수’는 공세의 물꼬를 트고 승기를 잡았다.

“삼겹살 불판이 까매졌습니다. 이제 판을 갈 때가 됐습니다.” 노회찬 선대본부장은 진보 대 보수의 구도를 선거구도의 현실로 구축하겠다는 민주노동당의 선거전략을 너무나 쉽게, 너무나 뼈저리게, 너무나 아프게 상징화 했다. 이것은 ‘입심’ 덕이었을까.


총선의 중추를 담당했던 기조회의

선대본이 구성되기 직전인 2004년 1월 초부터 매일 아침 8시30분에 열렸던 기획조정회의는 4·15 총선의 숨은 공신이었다. 바깥으로는 그들의 역할이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회의는 민주노동당의 짧은 역사에서 드물게 ‘정치활동’을 성공적으로 해낸 팀이었다.

노 선대본부장과 문명학 기조실장(현 제1정조위 실장), 김종철 대변인(현 최고위원), 박권호 총무실장(현 노회찬 의원실 보좌관), 오재영 조직실장, 이재영 정책실장(현 제3정조위 실장) 황이민 사무부총장을 고정 참석자로 하고, 조승범 홍보실장(현 선전편집실장) 등 유관부서 실무자들이 현안이 있을 때마다 참석한 기조팀은 매일 아침 모여 당일 및 중장기 선거전략에 대해 논의했다. 이 회의는 당시 민주노동당의 실질적인 집행기구 역할을 했다.

기조회의는 시기별 정세를 분석해 지지율 목표치를 정하고, 이에 따른 민주노동당의 선거활동의 집중점을 잡아내는 역할을 했다. 또한 여러 내외 변수에 따른 민주노동당의 ‘포지션’을 잡는 중추를 담당했다. 매일 아침 회의는 30분 남짓, 선거 핵심부서 책임자들이 모였던 만큼 빠르게 결정되고, 바로 집행이 가능했다.

“선대본이 꾸려지고 들어가면서, 매일 아침 전략을 짜내고, 토론을 거듭했다. 그 속에서 정세인식의 중심을 잡아갔다. 20일 TV 토론에서 나온 말들은 상당 부분 이 팀에서 논의되고, 정리된 것이었다. 레토릭(수사)은 내 것이었지만, 내용은 토론의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함께 지속적으로 논의하지 않았으면 그런 성과를 내기 어려웠다.” 노회찬 의원은 공을 기조회의에 돌렸다.

문명학 당시 기조실장의 말이다. “보수정당 쪽의 선거전략팀은 정계 개편과 이합집산 과정에서 새로 꾸려졌던 만큼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또 기존 중추를 담당했던 ‘선수’들이 출마하면서 많이 약화돼 있었다. 하지만 우리 경우엔 2002년에 지방선거와 대선을 치르면 훈련된 사람들이 그대로 기조팀으로 합류했다. 팀워크, 정세판단 능력 전반에서 보수정당에 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탄핵과 늦춰진 선거법 개정, 열린우리당의 공공연한 사표논리 유포 등 그 하나만으로도 민주노동당 선거에 큰 악영향을 줄 수 있는 사안들을 큰 상처 없이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조회의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이른바 ‘정치적 포지셔닝’은 소수정당이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일이다.

‘백화점식 나열’과 ‘균형 잡힌 포트폴리오’의 차이는 ‘정치행위’로 묶을 수 있는지 없는 지에서 갈린다. ‘선택과 집중’이 없었다는 말을 지겹도록 들어온 민주노동당의 지난 원내진출 1년을 비춰볼 때 무엇이 비어 있는지, 한번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상자기사 ①> TV 토론, 준비 없는 성과는 없다
사실 TV 토론을 나가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조금 상황이 다르지만 2002년 대선 때 권영길 당시 대선후보는 TV 토론 준비를 하며, 2~3차례 리허설까지 했다. 이 리허설에는 방송 스튜디오와 거의 비슷한 공간을 빌려, 타 후보 대역들과 실제 상황을 방불케 하는 훈련도 포함됐다. 리허설이 끝나면 후보의 말투와 태도, 버릇까지 교정하고 잡았다.


또한 민주노동당 대선 선대본에 ‘미디어논리개발팀’을 따로 두고, 선거전략과 정세에 따른 후보의 발언을 생산해냈다. 전문 코디네이터까지 두고 후보의 이미지를 만들어갔다. 물론 보수정당의 그것에 비하면 예산과 인력 면에서 비교할 수 없이 초라했지만, 민주노동당 입장에선 대규모 투자를 해서 TV 토론을 준비했던 것이다.


“국민여러분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나아지셨습니까?” 권영길 후보의 어록은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었다.


대선 때는 후보가 한 명이었던 만큼 집중적으로 투자하고 준비하는 게 관건이었다면, 총선의 경우는 토론의 주제와 타당의 토론자를 살펴가며, 최적의 토론자를 내보내는 게 핵심이었다.


노 본부장의 경우는 총선 이전부터 몇차례 TV 토론에 나가면서 기본훈련을 마친 상황이었다. 여기에 더해 20일 토론을 앞두고 한 케이블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나가 최종 점검을 마친 ‘준비된’ 토론자였다. 토론자 결정에는 기획조정팀을 중심으로 한 선대본의 판단이 최우선시 됐다. 당내 세력관계를 떠나 최대 득표를 위한 TV 토론 전술을 운영할 수 있는 기본 조건이 조직적으로 마련됐다는 뜻이다.

<상자기사 ②>

사실 민주노동당의 TV 토론 참여는 투쟁의 결과물이었다. 토론 참여를 위해 사이버 시위, 언론노조를 통한 압박 등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하지만 3월20일 이후에는 상황이 바뀌었다. ‘노회찬 어록’이 등장했고, 방송사쪽의 출연요구를 다 소화하기 어려울 만큼 출연 요청이 쇄도했다.


아무리 ‘선수’라도 자꾸 보면 식상해지는 법이다. 당으로서는 다른 선수도 키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벤치’가 두텁지 않았다는 점이다. 김종철 당시 대변인, 심상정 당시 비례대표 후보 등이 토론자로 나서면서 상황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방송 토론에 당장 나설 수 있을 만큼 훈련이 된 정치인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이러던 사이 웃지 못할 촌극도 벌어졌다. ‘평소 말투가 느린’ 한 비례대표 후보가 토론에 나가 할 말을 다 못하고 돌아오자 당원들의 비판이 쏟아졌다. 그후 그 후보는 토론 참석에 대해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다른 여성 후보는 한 케이블 방송에서 ‘스파링’을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자, 선대본 차원에서 ‘본게임’(공중파) TV 토론회 참여에서 배제하기도 했다.


문명학 당시 기조실장의 말이다. “사실 TV 토론에 처음 나가서 잘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가서 실수도 하고, 질타도 받으면서 훈련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는 실수할 여유가 없었다. 매번 홈런을 쳐야 할 상황이었고, 실제로 매번 홈런, 최소한 장타를 쳤다. 그러고 나니까, 노회찬, 심상정 후보 말고는 다른 사람들은 안 나가려고 하더라. 막판에는 토론 나갈 사람이 없어서 고생했다.”
<인터뷰> 김홍석 당시 기획조정실 부장
방송토론 섭외와 일정조정, 정책제공의 실무를 담당했던 김홍석 당시 기획조정실 부장(현 단병호 의원실 보좌관)은 “토론을 소화할 수 있는 정치인이 부족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또한 그는 “방송사들과의 실랑이 과정이 쉽진 않았다”고 말했다.


- 방송사와 실랑이가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
“방송사쪽에선 단연 노회찬 의원의 출연을 요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후보이자 선대본부장이었던 만큼 일정조정도 어려웠고, 계속 한 사람만 내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 다음으로 권영길 의원이 많았고, 심상정 의원, 김종철 대변인을 요구하는 경우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쇄도하는 방송출연 요구를 수용할 만큼 ‘선수’가 많지 않았다. 방송국 관계자들과 말씨름해야 했던 내 입장에선 난처한 일이기도 했다. 토론자가 적절하지 않을 경우 당원들의 반응도 반응이지만, 당장 방송사쪽에서 항의를 많이 받게 된다. ‘왜 그런 사람을 내 보냈냐’는.”


- 섭외 조정이 쉽진 않을 것 같은데.
“다양한 사람을 언론에 노출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우리가 원외 정당이었고, 저쪽에서는 주로 의원들이 나왔다. ‘급’있는 사람이 나오면, 우리도 그쪽에 맞춰줘야 했다. 또 권영길, 단병호 의원 같은 분들은 저쪽에서도 ‘급’이 맞아야 내보낼 수 있었다. 조정 과정이 쉽진 않았다.”


- 성공했는지 못했는지는 어떻게 확인했나.
“잘했는지 못했는지는 항의하는 사람이 누군지 보면 바로 알 수 있었다. 한나라당이나 열린우리당쪽 지지자들의 항의 전화가 많이 오면 그건 그날 토론이 잘 됐다는 뜻이다. 반면 토론을 제대로 못하면 당원들의 항의전화가 많이 온다. 토론 성공 여부에 따라 실제로 표가 움직였다는 뜻이다.”


- 가장 어려웠던 점은.
“뼈아프게 반성할 지점은 비례대표 총선 후보 중에는 당의 정책과 공약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는 것이다. 강기갑, 현애자 후보처럼 입당한 지 얼마 안 된 농민후보라면 이해가 되지만, 후보의 자질이 의심 가는 사람도 있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정책이 만들어지는 기본철학을 이해하고 있었는지는 차치하더라도 후보가 총선공약을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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