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수도 이전 이슈는 민주노동당에게는 반가운 주제가 아니었다. 입장을 정하기도 껄끄러웠고, 정한 뒤에도 깔끔하게 정리가 되지 않았다. 당론 결정을 위해 ‘행정수도 이전 문제 특별위원회’까지 구성했지만, 답을 내기까지 무려 6개월이 걸렸다. 정책정당이라는 약속이 강제한 ‘결벽’과 ‘강박’에, 현실 ‘개입력’과 정치적 ‘순발력’의 부족에, 급기야는 의원의 소신과 당의 결정 사이에 충돌까지 빚어졌다.


우선 헌법재판소가 ‘수도이전특별법’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렸던 2004년 10월21일, 민주노동당 의정지원단 사무실에서 벌어졌던 일부터 살펴보자.

“민주노동당이 화낼 일인가?”

신행정수도 관련 일지
▷2002년 9월30일
노무현 후보 “충청권에 행정수도를 건설, 청와대와 중앙부처부터 옮겨가겠다.” (민주당 선거대책위원회 출정식)
▷2003년 4월14일
신행정수도 건설추진기획단. 지원단 발족
▷10월15일
특별법안 국무회의 심의·의결
▷12월29일
국회 ‘신행정수도의건설을 위한 특별조치법’ 통과(찬성167, 반대13, 기권14표)
▷2004년 7월5일
신행정수도 후보지 평가결과 발표 ‘연기-공주 지구 1등’
▷7월12일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헌법소원 및 가처분 신청 접수
▷7월
민주노동당 행정수도이전문제특별위원회 설치
▷8월10일
민주노동당 행정수도 이전 반대 당론 결정 논란, 전국순회토론 결정
▷9월8일
정부, 서울시와 연기-공주 주민 주장 반박의견서 제출
▷10월21일
헌재,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 위헌 결정
▷2005년 2월
민주노동당 중앙위 ‘대전-둔산 행정특별시 건설’ 당론 결정
▷3월2일
연기-공주 행정중심 복합도시건설특별법 국회 통과
21일 오후, TV에서 헌재 판결이 나오는 동안 의원들과 당직자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서울이 수도라는 점은 헌법상 명문의 조항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조선왕조 이래 600여년간 오랜 관습에 의해 형성된 관행이므로 관습헌법으로 성립된 불문헌법에 해당된다”며 헌법재판소가 위헌 결정의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이 비쳐졌다.

결정이 내려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단과 당 지도부, 당의 핵심 브레인들이 모두 모여 긴급회의를 열었다. 이미 기자들은 민주노동당의 헌재 판결에 대한 입장을 물어오고 있었다. “입장을 정리 중”이라고 양해를 구한 뒤, 갑론을박이 오가기 시작했다.<상자기사1 참조> 시간이 급했다.

“이제 안을 만들어내세요.” 심상정 의원이 재촉했다. 하지만 처음 15분까지는 ‘멍한’ 상태였다. 이런저런 말들이 오고 갔지만 딱 부러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다들 약간 화가 나 있는 듯한 분위기. 급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의 입장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여기에 노회찬 의원이 헌재 판결이 나오고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수도이전특별법이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다수 국민들의 상식에 입각한 것으로써 이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의정지원단 사무실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노 의원의 ‘돌출행동’에 대해 ‘섭섭함’을 표하는 사람도 있었다. <상자기사2 참조>

이때, 김용신 의정기획실장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화낼 일이 아니다. 사실 (드러내고 칭찬은 못해도) 뒤돌아선 웃어야 될 판결 아니냐.”


“당의 포지션의 문제로 접근하자”

당시 헌재는 △관습헌법을 위배했으므로 국민투표를 하거나 개헌을 하지 않으면 특별법은 위헌 △수도 이전에 대한 사안은 국방, 통일 등 측면에서 국가 안위와 직결되는 중요정책 사안으로 국민투표 대상 △성문헌법에 조항이 없으므로 국민투표를 하지 않은 것은 위헌이 아니라는 세 개의 안 가운데 첫번째 안에 손을 들어줬다.

당시 김 실장의 분석이다. “만약 두번째가 됐다면, 국민투표 와중에 정국은 수도 이전을 놓고 찬반으로 갈릴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세번째 안으로 갔다면, 정부여당쪽으로 힘이 급속히 실리는 만큼 민주노동당의 영향력은 적어진다. 관습헌법이 옳든 그르든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가장 다행스런 선택을 헌재가 한 것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현장에서 더 이상의 이견은 나오지 않았다. 심상정 의원이 나서 산만했던 논의를 진화하고, 서둘러 입장을 성문화시키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왔던 당의 입장은 다음과 같다.

“△헌재 판결을 계기로 취지에 맞지 않게 추진해 온 노무현 정부의 수도이전사업을 전면중단 하기 바라며 △당리당략 차원으로 일관해 온 보수양당은 국민들 앞에 사과해야 하고 △헌재의 ‘관습헌법’을 근거로 한 위헌 결정이 극히 이례적이고 납득하기 어려움을 밝힌다.”

헌재에 신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건이 접수된 것은 2004년 7월12일이다. 헌재가 합헌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했지만, 위헌 결정을 내릴 것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은 입장을 정리하고 있어야 했다. 더구나, 위헌판결이 났던 10월21일 오전 무렵에는 이미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 위헌으로 결론이 났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난 상태였다. 의원들과 지도부, 당직자들도 이 소문을 접수하고 있었다.

하지만, 당의 어느 공식 단위에서도 각각의 변수와 관련한 대응방안을 마련하고 있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된 사안을 담당했던 당내 공식기구는 세상의 속도와는 관계없이, 자기 논리 완성을 위한 ‘수련’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당안팎의 ‘회고’다.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2002년 9월, 노무현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가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거론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수사’(修辭)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선거가 가까워지면서 당시 노무현 캠프와 민주당은 ‘분권’과 ‘수도권 과밀해소’, ‘지역균형발전’을 내세우며 행정수도 이전 이슈를 선거 최대 화두로 끌어올렸다. 행정수도 이전은 97년 대선 때 ‘DJP연합’에 버금가는 ‘영남권 포위론’으로 역할을 했고, 충청권의 표심에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 행정수도 이전은 탄핵과 함께, 2004년 총선에서도 최대 이슈로 자리를 잡았다.

“행정수도 이전이 여권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사활’이 걸린 것이다. 행정수도 이전은 ‘성장’과 ‘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하는 딜레마를 풀기 위한 자유주의개혁세력의 마지막 카드였다. 그것은 건설경기 부양을 통한 유효수요 창출, 지방분권 의제의 구축을 통한 전통적 기득권세력 포위 및 무력화를 겨냥한 것으로 여권의 이른바 ‘20년집권플랜’의 핵심이다.”

헌재의 위헌 판결 직후, 당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분석했다. 그렇지만, 정치공학과 유효수요 창출 등 복합적인 변수와 요인 그리고 타깃이 치밀하게 교직돼 있는 이 이슈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처음부터 명쾌한 입장을 갖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입장을 가질 입장이 아니었다.

대선 때 민주노동당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묵시적인 반대를 당론으로 했다. “통일을 대비해야 하는데 충청권은 행정수도로 적절하지 않다”는 게 근거였다. 총선 때는 서울과 충청권, 중앙당의 정책담당자들이 모여서 이 문제를 논의했고, 당시 내린 결론은 이랬다. “특정지역 유치를 민주노동당의 공약으로 내걸지 않으며, 충청권의 부동산 안정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총선 이후, 2004년 7월에 헌재에 ‘위헌소송’이 접수되고, 한나라당 서울지역 국회의원들이 적극적인 반대 입장을 보이면서, 이 문제는 다시 쟁점이 되기 시작했다. 10월에는 헌재가 위헌을 선언했다. 이 전 과정에서 민주노동당은 끊임없이 입장을 밝힐 것을 강요받았다. “도대체 당론이 뭐냐”는.

민주노동당은 7월 ‘행정수도이전문제특별위원회’를 구성했고, 8월10일에는 최고위원-의원단 연석회의를 통해 ‘잠정반대’ 당론을 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을 놓고 논란이 빚어지자, 전국순회토론을 거쳐 다음해 2월에야 ‘대전둔산 행정특별시 건설’을 중심으로 한 당론을 중앙위를 통해 확정했다. 한창 전국에 행정수도 위헌 문제로 달아오르고 있을 때도 민주노동당은 전국순회토론 중이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너무 늦게 났다. 시간이 이미 흘러갔고,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 때였다.

선출된 권력은 책임을 다 했나

사실 이 문제에 대한 중앙당 주요 브레인그룹의 의견은 당론을 결정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먼저 이재영 제3정조실장의 말을 들어보자. “당은 성장과정에서 의도적으로 의견 발표를 포기하거나 해태해야 할 일들이 있다. 이 문제가 그랬다. 입장을 밝히는 것은 당의 이해와 상충되는 일이었다.”

문명학 제1정조실장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행정수도 찬성이냐 반대냐는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답할 사항이 아니었다. ‘우문’에 ‘정답’을 말하려고 애쓸 필요가 뭐가 있냐.”

물론, 공당이 현안 이슈에 대한 자기 입장을 갖지 않는 것은 책임 있는 태도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임’ 문제에 대한 ‘평’도 그리 곱지 않다.

“정책위의장이 새로 부임한 직후 주대환 의장에게 관련 보고서를 제출했다. 또한 기획조정회의가 ‘반대’ 의견을 제출했다. 그래서 반대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하지만 막상 당론 발표 자리에서 갑자기 내용 검토 후에 당론을 결정하자고 입장이 발표됐고, 전국순회토론회를 다녔다. 당이 타이밍을 놓친 것이다.”

김윤철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실장의 말이다. 그가 말한 ‘타이밍을 놓친 이유는 이렇다.

“그때, 지도부가 정치적 부담을 이유로 결정을 안했다. 중앙에서 결정할 문제를 지역까지 미루고, 중앙위까지 미뤘다. 왜 선거를 통해 지도부 선출하나. 정치적 결정을 내릴 권한을 주고, 책임도 지우기 위해서다. 중앙위까지 가져갈 것이면, 최고위원들은 왜 뽑았나. 정부 안은 환경영향평가도 빠져 있는 졸속안이었다. 반대가 맞았다.”

물론 이들은 선출된 사람들이 아닌 실무자들이었다. 또한 이들의 입장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하지만 한 가지 지적만큼은 당으로서는 뼈아팠다. 당의 선출된 권력들은 책임을 수반한 정치를 하고 있었는가라는 지적이다.

<상자기사 ①> 모두가 ‘정치’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이러다가 열린우리당 힘 다 빠져서 국가보안법이고 뭐고 물 건너가는 거 아냐?” 헌재 판결이 나온 직후,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일원이 혼잣말로 내뱉은 말이다.


“일단 헌재의 폭거에 대해 비난 성명부터 내야 한다.” 당시 한 핵심당직자가 한 말이다. 하지만 그는 “왜”라는 질문에 딱 부러지게 답하지 못했다.


앞의 말은 이른바 자민통 노선을 견지한 사람의 것이었고, 뒤의 말은 좌파 중에도 상당히 왼쪽에서 활동해 온 사람의 것이었다.


둘이 걱정하는 것은 달랐다. 한 사람은 향후 개혁 또는 진보 전선의 약화를 걱정했고, 한 사람은 ‘헌재의 폭거’라며 열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둘 다 ‘왜’라는 설명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두 사람에게 한 가지 중요한 게 빠져 있었다. 그것은 자당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에 대한 계산이었다. 이미 원내정치의 여러 산과 물을 건너며, 상당히 단련됐어야 할 상태였지만, 지도부와 핵심 당직자들도 정치적 ‘포지셔닝’을 사고하지 못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었다.


옳고 그름은 분명하게 정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당연히 당의 중심 기조를 잡을 위치에 있던 사람들은 득실을 중심으로 ‘뱀’처럼 움직이며, 때로는 욕을 먹을 준비도 했어야 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당 지도급 인사들은 여전히 ‘평론’을 넘어선 정치행위를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상자기사 ①>

또 한 명의 정치인은 노회찬 의원이다. 2004년 10월21일, 헌재의 위헌 판결이 나오자마자 당의 입장 표명이 나오기도 전에 노 의원은 “환영” 입장을 발표했다. 노 의원은 “수도이전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과학’이어야 한다”면서 “이제 여야 각 정당은 차분한 마음으로 수도권 인구집중 문제와 지방경제 활성화를 위한 ‘과학적 대안’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노 의원은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관련, 초기부터 반대 입장을 견지해 왔다.


조승수 의원 역시 이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확실한 소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공주·연기 행정복합도시특별법이 통과될 때, 반대 당론을 어기고 찬성투표 했다. 조 의원의 말을 들어보자.


“당론 위배는 사실이다. 하지만 당의 정체성과 직접 연관되는 사안이 아니었던 만큼 의원 나름의 판단도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대구, 울산, 부산 등을 중심으로 지방분권운동이 본격화 될 때부터 거기에 결합했고, 소신이 있었다. 여당 법안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수도권의 물적 집중을 깨뜨리는 과정으로 그 법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찬성했다.”


주대환 의장은 90년대 초반, ‘신노선’을 표방하며 진보정당운동의 대표적인 이론가로 자리매김했으며, 창당과 함께 지구당위원장으로 지역활동을 경험한 인물이다. 노회찬 의원의 정치감각이야 이미 국민적인 뉴스가 됐으니 더 강조할 필요가 없다. 조승수 의원은 울산구청장을 역임하며, 지방분권과 관련한 경험적, 이론적 논리가 확실한 상태였다.


이들은 모두 행정수도 이전 문제에 담론을 형성하고 올바른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민주노동당의 자산이었다. 또한 당의 지도급 인사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돌출행동’으로 자신의 소신을 표현했다(주 의장의 경우는 당의 공식경로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했지만, 적지 않은 반발이 있었다).


정치인 개인의 문제였을까, 조직 문화의 맹점을 드러낸 것일까. 아니면 또다른 문제가 있는 것일까. 2005년 9월 현재까지도 민주노동당은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주대환 민주노동당 정책위의장
주대환 정책위의장은 행정수도 이전 문제와 관련한 당론 결정과정에 대해 “늦어진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지만 전국순회토론을 거치며, 확실한 대안을 마련한 것은 잘한 일”이라고 말했다. 사실 주 의장의 이같은 평가는 당내의 일반적 평가가 부정적인 것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측면도 있다. 주 의장의 주장을 들어보자.



- 주대환 의장이 가장 강하게 당론 결정을 위한 전국순회토론을 주장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지역균형발전에 대한 민주노동당 당원들의 문제의식이 별로 없었다. 열린우리당 사람들보다 사실 희박했다. 전국 토론이 계기가 돼서 균형발전에 대한 당원들의 관심을 높이고 싶었다.”


- 하지만 정세를 너무 외면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이 문제에 있어서 우리야말로 정직해야 한다. 정치적 대응을 해서는 안 될 문제였다. 보수정당이야 즉흥적으로 결정하고, (서울과 충청권에서 말을 바꾸면서) 듣기 좋은 말만 해 왔다. 하지만 우리는 정답을 말해야 한다. 제3당으로서 지역균형발전과 수도권 과밀화 해소를 위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 그래도 결정이 너무 늦은 것 아닌가.
“우리가 헌재 판결 이전에 좀더 일찍 결정을 했다면 상당히 관심을 끌 수 있었다는 아쉬움은 있다. 충분히 부각될 수 있었다. 결정이 늦어진 것은 대의원대회에서도 비판적으로 평가됐다. 사실 문제는 최고지도부에도 있었다. 8월 중앙위를 앞두고 있었던 특위의 안건 상정요구와 충청권 중앙위원들의 현장발의를 묵살하고 당론결정을 미룬 것은 최고의원들이었다. 1월 중앙위에선 성원미달로 유예됐다가 2월에서야 결정됐다.”


- 당론결정에 중앙당의 정책 브레인들이 반대를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중앙당 브레인들과 나의 생각은 차이가 있었다. 매사를 정치적으로 보는 것에 반대한다. 우리는 철학이 있어야 이야기를 할 수 있다. 또한 중앙에서만 (타당과) 전투를 벌인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우리 ‘부대’는 훨씬 더 크며, 지역에서 매 사안을 두고 전투를 벌이고 있다. 그런 만큼 정직하고, 소박하게 우리 입장을 정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힘을 갖고 전투를 할 수 있다.”

민병기 민주노동당 대전시당 정책국장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한 당론이 늦어지면서 가장 맘고생을 많이 한 곳은 대전·충남·충북 등 충청권의 민주노동당 시도당과 지구당들이었을 것이다. 특히 대전시당의 경우는 선재규 전 시당위원장이 ‘이전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던 게 논란이 돼 사퇴까지 하는 내홍을 겪었다. 지역에서 바라본 이 문제의 맥락을 민병기 대전시당 정책국장에서 들었다. 민 국장은 “정책담당자들의 탁상논의"를 강하게 비판했다.


- 충청권 지역조직들은 중앙 차원에서의 당론 결정을 기다렸던 것으로 알고 있다. 선거 국면과 지역정치에서의 입지를 생각하면 기다림은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행정수도 문제는 충청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였다. 중앙차원에서 명확한 결정이 필요했다.”


- 대전시당에서는 이전반대쪽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정서가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2002년 대선 공약으로 충청권 이전 문제가 나온 후, 지역 땅값이 오르기 시작해 총선 무렵에 피크를 이뤘다. 5~6천만원 하던 20평 아파트가 9천만원까지 올랐다. 전세값도 올랐고, 주거 불안정으로 인한 지역 주민들의 생활이 크게 위협을 받았다. 일주일에 한두건씩 투신자살 소식이 들렸다. 지역 활동을 하면선, 사실 반대하는 편으로 기울었던 것도 사실이다.”


- 당론 결정까지 논의가 길어졌다.
“사실, 전당적인 토론을 했다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탁상공론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당 같은 경우는 공주·연기에 내려와 지역정치를 했다. 하지만 당 특위는 공주·연기에 한번 와보지도 않았다. 주민 간담회라도 한번 가졌어야 될 문제 아니었나. 더구나, 대전-둔산 안을 내놓고도, 현장 실사 한 번 하지 않았다. 도로 사정이나 입지도 살피면서 실상을 봐야 했던 것 아니었나. 또 당내 주요인사들이 와서 현장 정치를 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문제는 논의가 길었던 게 아니라 탁상공론이었다는 것에 있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