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위원회 선거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민주노동당은 선거만 하고 있지 않았다. 또한 민주노동당을 향한 당시 국민적 관심은 당내 선거에만 쏠려 있지도 않았다. 총선이 끝나고, 5월 중앙위가 끝나고, 6월초 대의원대회를 통해 새 지도부가 구성되던 기간, 민주노동당은 개원국회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바뀐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다양한 행정적 선택들이 진행되고 있었고, 이 선택은 또한 정치적이기도 했다.


갑자기 비대해진 중앙당

민주노동당의 개원국회 준비 가운데 가장 빠르게 그리고 전격적으로 진행된 것이 100명 규모의 보좌관 및 정책연구원의 선발이었다. 총선 직전까지만 해도 대략 40명 규모의 상근활동가들이 일하고 있던 것을 고려하면 대단히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각 의원실에서 일하는 보좌관(60명)들을 빼고 생각해도, 기존 중앙당 조직이 두배로 확장되는 ‘사건’이었다.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 이후 정책위원회 구성의 기본 방침은 4·15 총선 이전에 기획되고 있었다. 정책정당에 걸맞는 의정활동을 추진하기 위해 대규모 정책연구인력을 확보하자는 구상이 원외 시절 정책위에서 기획됐고, 총선 기간에는 ‘보좌관풀(pool)제’를 도입한다는 방침이 발표됐다. <연재 10회분 참조>

그런데 막상 총선을 마치고, 당선자 간담회에서 나왔던 질문은 ‘도대체 보좌관풀제가 뭐냐’는 것이었다. ‘100명의 보좌관을 의원단이 공동으로 쓰자는 것이냐’, ‘(풀제에 따르자면) 보좌관과 정책연구원은 어떻게 다른 것이냐’ 등등. 당선자들은 알지 못했다. 당시 사무총장을 맡고 있던 노회찬 당선자는 이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풀제’라는 개념은 잊어라. 원내에서 나오는 세비와 보좌관 급여를 통해 마련된 재정으로 정책위를 구성하겠다는 말이다.”

즉, 의원 세비와 6명의 보좌관의 급여로 7명이 아닌, 11명이 일하는 게 보좌관풀제, 정책위 구상의 기본이 됐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각 상임위별로 정책연구원을 선발하고, 이것이 정책위 구성의 기본이 돼야 한다는 사업구상이 자연스럽게 구체화 됐다. 5월초부터는 본격적인 선발절차에 들어갔다.

4월28일, 보좌관 및 정책연구원 채용공고가 나갔고, 5월8일 원서접수가 마감됐다. 채용규모는 100명이었고, 502여명이 지원해 평균 5대1의 경쟁률을 보였다. 채용이 확정된 것은 5월21일. 1차로 78명이 채용됐다.<상자기사1 참조>

합격자 가운데 박사는 12명(수료자 포함)이었고, 각종 사회단체 부설연구소 출신들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채용 실무를 담당했던 이재영 정책실장(현 제2정조위 실장)은 “당원인지 여부와 함께 당과 가까운 사회단체 활동가도 비슷한 비중으로 평가했다"면서 "학력을 포함한 전문경력 외에 사회단체나 관련 직장에서 종사했던 경력 등도 참작했다”고 밝혔다.

4·15 총선에서 인력 채용까지 걸린 시간은 36일에 불과했다. 여기에서 첫번째 질문이 나온다. 인력채용은 그렇게 시급한 과제였을까?

서두른 인력충원

“그때 선택은 잘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았으면 더 어려웠을 것이다.” 노회찬 의원의 말이다. “6월 개원국회가 코앞이었다. 이어질 정기국회와 국감 등 시간이 급박했다. 이미 정책위 구성의 디자인이 나와 있던 만큼 서둘러 일을 처리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당시 정책위 구성을 기획했던 실무자의 말이다.

이 말은 사실 당시 정황을 봐선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하지만 비판 역시 만만치 않다. “당선자들도, (원외 시절) 정책위도 국회를 몰랐다. 우리가 가서 뭘 해야 할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모르고 덜컥 사람부터 뽑아놓은 것이다.”(서울의 한 지역위원회 위원장)

첫 원내진출인 만큼 설왕설래가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채용은 일단 한번 결정되면 유연하게 조정할 수 없는 문제이고, 뒤에 정책위 채용으로 벌어진 일들은 단순히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를 넘어, 당의 정치활동 방식, 신임 지도부의 반발, 의원단과 불협화음 등과 한데 엮이면서 복잡한 양상을 보여주게 됐다.

사실 무리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채용된 인력을 위한 사무공간도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었고, 이들의 처우문제 등 역시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준비 없이 사람부터 뽑은 측면이 없지 않았다는 것이다.

채용된 인력들에게 당이 한 첫번째 조치는 민주노동당의 선거공약자료집을 건넨 것이었다. 또한 채용된 정책연구원들에게 맡겨진 첫 과제는 각자의 연구계획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어떤 일을 하기 위해서 사람을 뽑았다기보다, 사람부터 뽑아놓고 그들이 일을 만들어가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사람부터 먼저 뽑고

또 한 가지 논쟁점은 정책지원시스템의 문제였다. 각 정조위별 정책위를 구상하고, 이들의 정책활동을 정책기획실에서 종합해서, 의정지원단을 통해 의원단의 사업으로 만들어가자는 것이 당초 그림이었다. 즉, 의원단의 일상적 정책활동의 내용을 정책위가 제공하고, 이것으로 (원내활동 중심이 아닌) 당 중심의 ‘정책정당’의 모습을 그려내자는 것이었다. 이같은 구상에 따라 민주노동당의 의정지원단은 정책위 산하에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당선자들 사이에서 상당한 논란을 빚었다. 4월27일, 3시간여 동안 진행된 당선자 간담회에서는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됐는데, △의정지원단을 정책위원회 산하에 두고 의정활동에 대한 전반적인 기획과 지원을 총괄하자는 의견(총선 이전 중앙위에 제출됐던 원안) △의정지원단을 최고위원회 직속으로 두고 의사결정 및 집행의 단계를 줄이는 의견 △의정지원 및 기획은 당의 시스템에서 일상적으로 관장하며, 실무지원을 중심으로 하는 의정지원단은 의원단 산하에 두자는 의견이었다.

특히 심상정 당선자(현 의원단 수석부대표)는 3번째 안을 집중적으로 주장했다. 현재도 심정상 의원은 정책지원시스템에 대한 소신을 여러 공식적인 자리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내용은 추후 소개한다.

만일 의정지원단과 관련해 여러 논란이 있었다면, 관련 당규를 제정하는 5월 중앙위에 복수의 안이 올라가는 게 당의 관례였다. 물론, 기존 안이 2003년 당발전특별위 활동을 통해 나온 것이었지만, 당발특위에서 정한 원칙을 구체화 하는 과정에서 논란이 있을 경우 복수의 안이 대의기구에 올라가거나, 수정안을 준비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5월 중앙위에는 하나의 안만 올라갔다. ‘기획업무는 당에서, 의원단 산하로는 행정지원 중심의 지원단을 구성하자’고 강하게 주장했던 심상정 당선자는 “당선자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당시 정책지원시스템, 직접적으로는 의정지원단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크게 두 갈래였다. 정책위 실무자들과 당선자들. 당시에 당선자들은 공식적인 의결기구에 속해 있지 않았고, 당의 시스템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상자기사2 참조>

‘4층당’과 ‘5층당’

6월6일, 출범한 민주노동당 4기 지도부는 정책위 구성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선출된 권력이었지만 정책위에 대해서만큼은 자신들의 뜻대로 조정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인력의 대부분이 구성돼 있었다. 그리고 최고위원들이 선거를 치르고 업무를 파악하는 사이, 의원단과 정책위 역시 개원국회를 준비하면서 그 나름의 ‘관례’를 만들고 있던 중이었다.

“정책위 구성과 활동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다수의 최고위원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일부 정책연구원들을 당시 설립 준비가 한창이던 당 부설 정책연구소로 보내는 방안이 검토되기도 했지만, 반발에 부딪쳐 현실화 되지 않았다.

그러던 사이 사무총국이 자리잡고 있던 한양빌딩 4층에도 새 얼굴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기획조정실과 조직실 등 주요부서의 책임자들은 신임 사무총장이 ‘통합형’ 지도력을 내세웠던 데 따라 바뀌지 않았지만, 상당수의 상근활동가들이 새로 들어왔다. 하지만 그만두는 상근활동가는 많지 않았다. 중앙당은 원외 시절 때의 구상보다 비대해졌고, 이러는 사이에 민주노동당에는 ‘4층당, 5층당’이라는 말이 생겼다. 당사 5층에는 정책위원회가, 4층에는 나머지 사무총국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두 층 사이의 관계가 데면데면 해지면서 나온 말이었다.

연구자 또는 당 조직 바깥에서 활동가로 일해 왔던 정책연구원들과 기존 당직자들 사이에 화학적 결합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같은 양상은 4층에서도 반복됐다. 이미 일하고 있던 사람들과 당직선거 이후 들어온 사람들이 친밀해지는 데에는 시간이 약간 필요했다.

<상자기사 ①>  보좌관 선발 진통
보좌관 선출 과정에서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 당선자와 채용을 담당했던 심사위원회의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 심사위원회의 실무를 담당했던 이재영 정책실장이 당 대표에게 보고한 보고서는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 실장은 “대부분의 당선자가 두세명 정도의 보좌진을 추천했고, 심각한 결격사유가 없는 이상 당선자의 의사를 존중했다”면서 “심사위가 당선자에게 추천한 경우도 꽤 많았다”고 적고 있다.


당시 채용과정에서 가장 진통을 겪었던 당선자는 6명의 보좌진을 추천했던 이영순, 현애자 의원이었다. 이영순 당선자의 경우는 당선자, 심사위도 적당한 사람을 찾지 못해 진통을 겪었던 것이었다면, 현애자 당선자의 경우는 양상이 달랐다.


현애자 당선자가 추천한 인물에 대해 심사위는 ‘전문성이 확보된 인물이 없다’며 꺼려했고, 또한 “심각한 결격사유가 있는 인물”을 탈락시키기도 했다. 또한 현 의원은 심사위가 추천한 정책보좌관 추천자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문제로 담당 실무자였던 이재영 실장과 현애자 당선자가 언쟁을 벌이는 모습이 중앙당에서 목격되기도 했다. 또한 현재까지도 정책위의 보건복지 담당 실무자들과 현애자 의원실의 관계는 매끄럽지만은 않다.


또 한 축에서는 민주노총과 당이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민주노총은 5월 당 중앙위가 열리기 직전, 당-민주노총-전농 정례협의회 자리에서 “민주노총이 17명의 보좌관 및 정책연구원을 파견하겠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또한 민주노총은 파견된 인력에 대한 소환권을 갖겠다는 입장도 피력했다. 이에 대해 당 지도부는 난색을 표명했다. 당대표의 임면권과 충돌한다는 이유였다.


결국 민주노총의 입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보좌관·정책연구원 공채에는 6명의 인력을 추천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전원 탈락하며,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민주노총의 실무 담당자는 이에 대해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민주노총이 당의 사업에 책임성을 가지고 일하겠다는데 받아들이지 않은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상자기사 ②>  “구상은 뼈대만 남았다”
“구상했던 것은 뼈대만 남아 있다. 구상의 결점이든 운영의 묘를 살리지 못한 것이든 정파 문제든,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다.”


이월 시기, 민주노동당의 정책지원시스템 구성의 실무 담당자 중 한 사람이었던 박창규 조승수 의원실 보좌관의 말이다. 사실 거의 45명에 육박하는 인력을 보유하고 있고, 내부적으로 기획업무만 담당하는 부서(정책기획실)와 원내에 파견한 부서(의정지원단)를 보유하고 있는 정책위가 당초 기대에 못 미치는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일각에서는 “당시 좌파 성향의 정책위 활동가들이 최고위원 선거에서 질 것을 예상하고 정책위에 자기 사람을 박아두고 나간 것”이라는 비난도 제기된 바 있다. (지도부 선거 와중에) 급하게 사람부터 뽑다 보니, 조직의 유연성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비판에 대해 당시 관련자들은 “(정파적 고려로 사업을 진행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낭설”이라고 잘라 말한다.


이 문제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원외 시절 정책위의 구조와 활동상을 살펴야 한다. 2002년 대선이 끝나고 민주노동당은 8명 규모의 정책위를 구성했다. 사실 당시만 해도 8명의 정책전문팀을 꾸린다는 것은 대규모 투자였으며, 그 당시 진보진영 최대의 단일 ‘싱크탱크’였다. 이 팀은 대단히 속도감 있게 사업을 벌여나갔으며, 각 담당영역별로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구성해 사업을 벌여나갔다. 원외 시절 정책네트워크의 확장판이 현 정책위의 기본이 됐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실제로, 정책위 구성원들이 추천한 연구자들은 대부분 정책연구원으로 채용됐다.


또한 정책지원시스템을 디자인하고, 적절한 인력을 물색하고, 사업목표를 잡는 것을 할 수 있었던 팀은 사실 정책위 활동가들 외에는 없었다. ‘사람 박아두기’ 즉, 정파적 고려에 대한 비난이 한쪽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주된 원인이었다고 볼 수 없는 것 역시 사실이다. 또한 이들의 구상은 지도부 선거와 원내 정치활동에 대한 이해도 미흡 등 몇가지 원인으로 인해 뼈대(외형적 구조)를 제외하고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들이 구상했던 것이 왜 현실에선 달라졌는지를 따져보는 것은 앞으로 민주노동당의 과제 가운데 하나다.

<상자기사 ③> 
민주노동당 4기 지도부 선거는 6월6일에 끝났지만, 이때 과반수 득표자가 없었던 정책위의장은 선출되지 않고, 결선투표를 해야 했다.


이용대(40.21%), 주대환(29.36%), 허영구(24.64%), 성두현(4.15%) (이상 기호순으로) 네 명의 후보들이 경합을 벌인 정책위의장선거는 다수 득표자인 이용대, 주대환 후보<사진>가 결선투표를 벌여, 11일 주대환 후보(51.4% 득표)가 당선됐다.


11일은 이미 국회가 개원된 지 일주일이 지난 후였다(실제로는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힘겨루기로 국회는 아직 열리지 않고 있었다). 하루가 천금같은 시간이었다. 업무파악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는 만큼 신임 정책위의장의 ‘구상’과 정치적 판단이 정책위 시스템에 반영되는 것은 시작부터 제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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