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 총선 당일, 민주노동당 개표상황실이 만들어졌다. 방송국 중계차들이 전날부터 자리를 잡고 방송 준비를 하고 있었고, 낮부터 60여명의 기자들이 모여들었다. 오후 5시가 넘어가면서 방송사 출구조사에 대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9번(이주희 후보), 못해도 8번(노회찬 후보)은 당선권’이라는 말에 중앙당 당직자들은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이윽고 저녁 6시,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가 발표되자 개표상황실에서 우레 같은 만세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개표결과는 지역구 2명, 비례대표 8명 당선이었다.<상자기사1 참조> 그날 민주노동당은 중앙당사 앞에서 당원 200여명이 모여 축제를 벌였고, 곳곳에서 축하주를 나눠 마시며, 진보정당의 첫 원내진출을 자축했다.

언론은 민주노동당 의원 10명의 탄생을 17대 총선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당선, 당선, 당선….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표를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이용길 충남 천안을 후보(현 충남도당 위원장)는 2000년 총선에 이어 이번이 두번째 출마였다. 2000년, 첫 출마에 11.3%를 얻었다. 4년이 지났고, 이 후보로서는 기대를 걸어볼 만했다. 그러나 뚜껑이 열린 결과 득표율은 8.6%. 총선 최대 이슈였던 탄핵과 행정수도 이전. 이 두 핵폭탄이 터지는 와중에서 20여년 동안 한결같이 지역에서 진보와 노동운동에 헌신했던 그는 분루를 삼켜야 했다.

“표를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선거 막판에 속절없이 표가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지는데 힘들었다. 개표하던 날, 나도 꿈에 그리던 당 국회의원이 생긴 것이 기뻤다. 하지만 내 선거는 말이 아니었다. 개표 결과가 나오고 뒤풀이를 하는데, 당원들이 내 눈치를 보더라.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참 표정관리가 어려웠던 밤으로 기억한다.”

백현종 경기 구리시 후보. 국회의원선거는 처음이었지만, 2002년 구리시장 후보에 나섰을 때 6.9%의 득표율을 보였다. 4·15 총선에서는 그에 약간 못 미치는 6.5%를 득표했다. 1987년 대선 때 백기완 민중후보 선거운동을 시작으로 구리에서만 17년째 활동해 온 백 후보는 선거 두 달 전 후보로 나서며 10%는 무난히 넘길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선거 막판에 흐름을 보면서 7% 넘기기가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총선은 내가 해온 지역 활동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결과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탄핵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미안하다, 당은 찍겠는데 후보는 열린우리당 찍겠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다. 그럼 ‘고맙습니다, 정당투표 12번 꼭 부탁드립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이었지만 속이 쓰린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 선거에서는 달라지기를 바란다.”

지역구 선거에서 10%를 넘기고, 15%를 넘기는 것은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에게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선거기탁금과 선거비용 반환 문제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지역구 출마자들의 평균득표율은 7.9%였다. 민주노동당 지역구 출마자 가운데 10%를 넘겨 일부라도 선거비용을 보전 받은 곳은 전체 출마지역 123곳 가운데 21곳에 불과했다. 당선자를 낸 울산 북구와 창원을 제외하면 2등 이상을 득표한 지역구는 울산 동구 한 곳 뿐이었다.

민주노동당이 준비할 것은 총선이 아닌 미래였다

총선 기간, 그 이전과 그 이후에도 당에 헌신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지역 활동가들은 여전히 소외감을 느끼고 있다. 지난 총선처럼 비례대표 중심의 원내진출 전략이 계속 이어진다면 당의 미래는 밝지 않다.<상자기사2 참조>

내부적 위기와 더불어 바깥의 시선도 좋은 상황이 아니다. 총선 전후로 30~40명에 달하던 민주노동당 출입기자는 2005년 현재 2~3명에 불과하다. 언론과 ‘허니문’ 기간은 4·15 총선을 기점으로 채 6개월도 가지 못했다. 앞으로 다루겠지만, 11월 국정감사를 기점으로 ‘아군’으로 보이던 언론, 심지어는 진보적 성향의 인터넷매체들까지 민주노동당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더 심각한 것은 물어뜯는 것에 그치지 않고 아예 짐을 싸서 떠난다는 것이다. 더이상 뜯어먹을 여지도 없었기 때문일까.

이 위협은 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원내 진출을 준비하며, 민주노동당은 원내 진출 그 이후에 대한 준비는 일단 뒤로 미뤘다. 인력과 예산 등 많은 불가피한 한계들이 민주노동당으로 하여금 이같은 선택을 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지난 5년 간 민주노동당의 역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봉인’ 당했던 희망이 판도라의 상자에서 빠져나오자, 이번에는 질시와 투기, 무능과 무책임이 희망을 옥죄기 시작했다. 이 위협이 현실로 드러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총선이 끝나고 6월 개원국회가 개회되기까지 약 두 달. 지금부터 이 두 달 동안 민주노동당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살필 차례다. 민주노동당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총선이 아니라 희망이었기 때문이다.

모란공원의 눈시울은 붉어졌다

당시 자민련은 비례대표 의석배분 기준인 3%에 못 미치는 2.8% 득표에 그쳤다. 만약 3%를 넘겼다면 자민련 비례대표 1번인 김종필 당시 총재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을 것이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8번인 노회찬 후보는 원외인사가 됐을 것이다. 13.1%를 얻고 밤 새워 개표 결과에 가슴 졸이던 민주노동당은 노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다시 한번 만세를 불렀다.


민주노동당 개표장을 찾았던 ‘리얼 노사모’(노회찬 의원 팬클럽) 회원들은 눈물을 쏟으며 환호했고, 노 당선자는 “하루 밤 사이 천국과 지옥을 왔다갔다 한 기분”이라며 마음 고생을 털었다.


4월19일, “서산을 붉게 물들이겠다”던 노정객 김종필은 끝내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정계은퇴 성명을 냈다. 같은날 아침, 노회찬 당선자는 민주노동당 당선자 10명과 함께 마석 모란공원을 찾아 전태일 열사께 민주노동당의 원내진출을 보고했다.
<상자기사 ②> 지역에서 실패하면 미래는 없다
 “비례대표 중심의 선거전술을 쓸 수 있는 것은 4·15 총선이 마지막이다.” 지역과 중앙 활동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다. 현재 비례대표 의석 정수는 56명. 이 선거법 아래에서는 ‘혁명적 상황’이 오지 않고는 20명 이상의 국회의원을 만들어내기 어렵다. 탄핵에 행정수도 이전까지 별의별 ‘꼼수’를 다 쓰고도 열린우리당은 정당명부 투표에서 과반 득표를 얻지 못했다.


지역구에서 당선자를 내지 못한다면 민주노동당은 영원히 소수정당의 위치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말이다. 울산과 창원을 제외하면 민주노동당의 지역 기반은 약하기 짝이 없다. 시의원이라도 한 명 있는 지역이 손에 꼽힐 수준이다. 4·15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지역구 후보자 평균득표율은 8%를 넘기지 못했다.


다가올 2006년 지방선거에서 돌파구를 만들지 못한다면, 2008년 총선은 물론 2007년 대선에서도 계급적 대의성을 확보할 만한 표를 획득할 수 없다는 우울한 전망만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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