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 속 강우규 의사.<국사편찬위원회>

서울역광장에서 일어난 의열투쟁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인 1919년 9월2일 오후 5시. 서울역(당시 남대문역) 앞은 새로 부임해 오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 총독을 맞이하는 환영행사를 위해 1천여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3·1 독립운동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상태였고 9년 전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일이 며칠 지나지 않은 때여서 긴장감이 돌았다. 사이토는 해군 대신 출신인데 새 조선 총독으로 파견됐다. 전임 총독 하세가와 요시미치가 3·1 독립만세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등 무단통치를 한 데 따른 조선 민중의 고조된 불만을 달래기 위한 책략이 작용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그간 무력에 의한 무단통치가 아닌 문화통치를 표방했다.

총독 도착 예정시간은 오후 3시였으니 두 시간이나 넘게 기다려야 했다. 환영인파 중에는 이완용을 비롯한 친일 귀족들과 총독부 고위관리, 군 수뇌부, 하레 영국 총영사 등 외교사절, 재계 인사, 신문기자 등도 있었지만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안중근처럼 사이토를 초조하게 기다린 사람도 있었다. 드디어 사이토가 도착하자 19발의 예포가 발사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환영 나온 인사들과 악수를 나눈 사이토가 남산에 있는 총독관저로 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 출발하려는 순간, 갑자기 검은 물체가 날아와 마차 주변에서 폭발하며 굉음을 터트렸다. 사이토를 향해 날아간 폭탄임이 분명했다. 이로 인해 광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폭탄의 위력은 대단했다.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은 없었지만 37명의 중경상자가 나올 정도였다. 사이토가 해군 군복을 입은 덕에 파편이 혁대에 부딪혀 군복을 태우는 데 그쳤다. 폭탄이 조금만 더 앞으로 가서 떨어졌더라면 사이토는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후 중상자 중 장기 손상과 패혈증 등으로 경기도 순사 스에히로를 비롯한 3명이 사망했다.

폭탄을 던진 사람은 강우규였다. 폭탄을 던지고 나서 그는 현장을 침착하게 지켜봤다. 사이토가 죽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군중 속으로 천천히 몸을 피해 걸어 나왔다. 이왕 죽기로 각오한 몸, 그는 재차 거사를 단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문제는 폭탄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를 따르는 청년, 허형으로 하여금 폭탄을 구해 오는 심부름을 시키고 서울에서 은신하던 중 같은달 17일 체포됐다. 그가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10월7일자 신문에 대서특필됐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놀란 것은 조선의 최고 통치권자인 총독을 향해 폭탄을 던진 사람이 열혈 청년이 아닌 환갑을 넘긴 65세 노인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요즘이야 60세를 청춘이라고 하지만 당시에는 환갑을 넘겨 사는 것이 드문 시절이었다. 1936년 당시 한국인의 평균 수명은 42.6세(남자 40.6세, 여자 44.7세)로 65세면 노인이었다. 매일신보에 나온 그의 사진을 보면 흰 두루마기 차림에 머리카락과 수염이 모두 흰색으로 전형적인 노인의 모습이었다.

강우규의 생애와 사상

강우규(1855~1920년)는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이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으며 총명함을 보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장래를 촉망받았다고 한다. 20대까지 고향에 머물면서 그가 택한 직업은 한의사였다. 30세가 되던 해인 1885년 함경남도 홍원으로 이주했다. 이후 25년간 홍원에서 잡화상을 경영했는데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장사를 하며 홍원에서 안정되게 살던 무렵 그는 이동휘와 만나게 됐다. 이동휘는 국권회복운동과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함경도 일대를 다니던 중에 강우규를 만났다. 강우규는 그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믿기 시작했고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홍원에 영명학교를 설립했다.

1910년 국권을 상실하고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자 홍원을 떠나 두만강 넘어 간도의 두도구로 이주했다. 이후 1915년에는 러시아 경내인 하바롭스크로 거처를 옮겼다가 2년 후에는 길림성 요하현 신흥동이란 마을에 들어가 개척을 했다. 100여호의 한인 마을을 일궈 독립운동의 근거지로 삼고 광동학교를 세워 한인 자녀들을 교육했다. 그는 의술에 밝아 1년에 수천원을 벌었지만 자식들에게 주지 않고 전부 학교에 기부했다. 그가 세운 학교는 모두 6곳이었다고 한다. 1919년 3·1 만세운동이 조선 전역에서 들불같이 일어나자 그도 신흥동에서 동포 400~500명을 모아 만세운동을 전개했다.

강우규는 1919년 3월20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결성된 노인동맹단에 가입했고 요하현지부의 책임을 맡았다. 노인동맹단은 회원 나이를 46세 이상 70세까지로 제한했다. 발족 취지서에는 “국내외에 있는 노인의 통계가 기백만에 달하니 죽음을 각오할 경우에는 적인을 오히려 가볍게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육신이 세상에 존재할 기한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만약 우리가 조국의 독립을 회복해서 우리의 자손으로 하여금 독립국인이 되게 할 수 없다면 설사 우리가 전택과 금전을 자손에게 물려주고 학문과 기술을 자손에게 물려준다고 하더라도 다른 민족의 노예상태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므로 우리의 죄악을 씻고 원한을 풀기 위해 노인동맹단을 조직한다”고 돼 있는바 노인들만 따로 모여서 독립운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해 5월5일 7인의 대표단을 선정, 국내로 파견해 서울 보신각에서 독립만세운동을 하고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 대한국민 노인동맹단 대표 김치보 외 20명의 이름으로 독립요구서를 제출했다. 미국에 있는 서재필에게 노인동맹단 총재직을 맡아 달라고 한 문서가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는데 첨부된 서명자 명단에는 2천5명이 기재된 것으로 보아 노인동맹단이 작은 조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강우규는 이 명단에는 없는데 서명 당시 중국 요하현에 있었던 관계로 아마 불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노인동맹단을 통해 조선 총독이 경질되고 새로 사이토가 파견된다는 정보를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정보를 입수하고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로 결심한 강우규는 노인동맹단과 조직적으로 결의해 거사를 감행하기보다는 단독으로 의거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의 체포는 악질 친일경찰 김태석이 주도했다. 김태석은 이 일로 의열단에서 칠가살(七可殺) 대상자 중 한 명으로 지목됐다. 김태석은 해방 후 결성된 반민특위에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체포돼 반민특위 피의자 중 최초로 사형 구형을 받았으며 최종 선고는 무기징역에 50만원 재산몰수형을 언도받았다. 법정에서 강우규를 체포한 일이 없고 자수했다며 끝까지 치졸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이후 반민특위가 해체되고 1950년 봄 석방됐다. 역사는 왜곡돼 흘러왔지만 강우규와 김태석 중 누가 역사 정의의 편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자명하다.

강우규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시종 당당했다. 1920년 5월27일 최종적으로 사형이 확정되고 11월29일 서대문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사망과 관련해 다른 설이 있다. 아들 중건이 인수한 아버지 시신이 궤짝에 앉은 채로 있는 것을 보고 놀라 기절했는데, 사형집행을 앞두고 감옥에서 연일 만세를 부르는 강우규를 일제가 가스를 넣어 절명하게 했다는 것이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민족 사랑과 독립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가 재판정에서 진술한 내용과 상고 취지서, 아들인 중건에게 한 유언 등에 그의 사상이 잘 담겨 있다. 그는 기독교를 받아들여 자신의 사상과 신앙으로 삼았다. 서대문감옥에서 있으면서도 기도와 묵상을 하며 보냈다고 한다. 그의 강렬한 민족주의와 독립사상은 기독교와 결합한 형태로 나타났다. 홍원과 블라디보스토크 그리고 두도구 등에 교회를 세워 이를 거점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했다. 유언에서도 청년들에게 기독교를 믿고 공부하라고 권하고 있다. 그는 동양평화론을 주장했다. 안중근이 뤼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다가 다 마치지 못하고 순국했는데, 강우규도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구상했다. 그가 직접 작성한 상고취지서에는 그의 우국충절과 동양평화론이 잘 나타나 있다.

강우규 의거의 영향

강우규가 일으킨 의거는 3·1 운동 이후 최초의 의열투쟁이었다. 그의 의거에 대해 조선 민중이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알려주는 문서가 있다. 1919년 10월21일 고등경찰 문서 중 평안북도지사가 보고한 ‘폭탄 범인 강우규에 대한 감상’이라는 제목의 보고서에는 “범인 강우규는 그 경력으로 보더라도 털끝만큼도 비난할 것이 없으며 더욱이 나이 60을 넘겨 노구를 이끌고 멀리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서울에 잠입해 신임 총독의 착임을 기해 남대문역 앞에서 벽력 일성의 폭탄을 투하했음은 그 용장자를 능가한 우리 조선 민족의 통쾌사라 할 수 있다. 극형에 처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라도 그 위훈은 조선 민족의 뇌리에 깊이 새겨질 것이며 우리 역사상 길이 한 토막의 미담으로 전해질 것”이라고 했다. 조선의 민심이 대부분 이와 같았을 것이다.

백발노인까지 나서 폭탄을 들고 독립투쟁을 하는 모습을 보여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고 조선 민중들에게는 독립투쟁의 정당성과 희망을 안겨 줬다. 강우규의 의거는 우리 의열투쟁사에서 최고령으로 기록되고 있다. 유언에 자신이 죽더라도 조선 청년들의 가슴에 인상만 배긴다면 그만이라고 한 것처럼 조선 청년들에게 크나큰 충격과 깊은 영향을 줬다. 1919년 11월 약산 김원봉 중심의 의열단이 중국 길림에서 결성돼 본격적인 투쟁의 막을 올린 것도 그 일환이었다.

▲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강우규 의사의 묘소는 현재 서울 동작구 서울국립현충원에 안장돼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이 추서됐다. 2006년 강우규 의사 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2011년 9월2일 서울역광장에 강우규 의사 동상을 세웠다. 오늘도 강우규 의사는 서울역광장을 오고 가는 사람들을 묵연히 내려다보면서 100여년 전의 거사를 증언하며 민족자주를 호소하고 있다.

그가 남긴 시 한 편을 소개한다.

단두대 위에 올라서니(斷頭臺上)
오히려 봄바람이 감도는구나(猶在春風)
몸은 있으나 나라가 없으니(有身無國)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豈無感想)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