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권영벽(1909~1945) 

우리에게는 권영벽(權永壁, 1909~1945)이란 이름이 낯설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널리 알려진 항일운동가다. 그는 동북항일연군 2군 6사(때로는 조선인민혁명군으로 불림) 정치공작원으로 활동하다 ‘혜산사건’으로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1945년 사망했다. 현재 북한의 혁명열사릉에 묻혀 있다.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 그의 활동은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제는 이념과 체제를 넘어 항일투쟁에 몸 바친 이들의 생애가 객관적으로 알려져야 할 때가 됐다.

혁명가의 길로 들어서다

권영벽은 1909년 함경북도 경성군 용성면 수성리(현재 청진시 송평구역 근동리)의 빈농가정에서 권호립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권창욱이고, 김수남·김창만 등으로도 불렸다. 그의 집은 온 가족이 소작에 매달려야 겨우 입에 풀칠을 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수성사립학교에 입학했으나 월사금을 내지 못해 중도에 포기했다.

1918년 4월, 10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따라 연길현 팔도구 등거우(동골)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사립봉명학교에 입학했다. 권영벽은 체력이 좋고 몸이 날렵해서 만능 운동선수로 이름을 날렸다. 학교 대항 경기에서 아홉 개의 우승기를 타 오기도 했다. 봉명학교 졸업 후 가난 때문에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하고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지으면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결국 늦은 나이에 용정에 있는 대성중학교에 입학했다.

권영벽은 대성중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연구단체 등에 참여했다. 2학년 때 반일단체 가담으로 퇴학을 당하자 등거우 마을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혁명가의 길에 나섰다. 1931년 9·18 만주사변 후 연변팔도구위원회 지도 아래 반일투쟁에 참가했다.

뛰어난 대중조직 능력 발휘

1932년 봄부터 등거우 근처 부암유격근거지 지원사업을 했고,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 무렵 아버지가 사망했다. 권영벽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 일제는 아버지 시신과 함께 그의 초가집을 불태워 버렸다. 그는 비운 속에서 어머니와 헤어져 연길현의 삼도만 유격근거지로 떠났다. 이것이 어머니와의 마지막이었다.

당시 연길현에는 4개의 반일유격근거지가 있었다. 1933년 초에 창설된 삼도만유격근거지는 왕청·돈화·안도 등의 접경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해 10월 옹구구위 당서기로 일하던 권영벽은 연길현 부녀회 순시원으로 활동 중이던 황금옥(黃金玉)을 만났다. 두 사람은 부부이자 동지로 항일투쟁을 함께하게 된다.

권영벽은 뛰어난 대중 친화력을 바탕으로 능숙한 조직능력을 발휘했다. 당시 주민들은 ‘타고난 팔자는 어쩔 수 없다’는 운명론에 빠져 일제와 위만군(괴뢰만주국)의 악선전에 놀아나고 있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권영벽은 주민들과 친해지는 일부터 시작했다. 곧이어 헌신적인 활동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대중사업을 전개해 좋은 성과를 냈다.

유격대 정치공작원 파견

1935년 3월 권영벽은 항일유격대에 입대해 내두산·돈화지구·교화현 팔가자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해 겨울, 유격대는 고정된 유격근거지를 떠나 넓은 지역으로 진출해 일본군과 격전을 치렀다. 그는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 2단의 지도원 겸 지부당서기로 활동했다.

이듬해 3월 ‘미혼진 회의’ 이후 항일유격대는 동만지역에서 한중 국경과 접한 장백지구로 진출했다. 장백지구로 진출한 유격대는 대덕수 전투와 소덕수 전투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그런 다음 백두산 주위에 유격근거지를 창설하기 시작했다. 권영벽은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의 선전과장으로 안도현·돈화·화전·무송 등지에서 활동했다.

1936년 9월 초순 권영벽은 조국광복회 조직 임무를 띠고 곰골밀영을 떠났다. 권영벽은 김수남으로 이름을 바꾸고 합법적인 거민증을 받았다. 압록강 건너로 조선 혜산이 보이는 장백현 17도구 왕가동에 터를 잡았다. 황금옥이 그와 함께 파견됐다.

권영벽은 20도구 신흥촌 야학 교사 이제순과 연결돼 주경동·반재구·도천리·가재수·흥산·19도구·지양개골·약수동·평강덕 등 장백현의 여러 마을을 돌아다니며 조국광복회 조직사업을 했다. 합법적인 야학교·농회 등을 이용해 조직을 확대했다. 대중과의 친화력을 바탕으로 개개인의 개성에 맞게 사업을 펼쳤다. 폭우가 쏟아지고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밤길을 수도 없이 걸었고, 산마루를 한없이 넘나들었다.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와 갑산위원회

권영벽은 토벌대에 끌려갔다가 죽은 아들과 토벌대장에게 잡혀간 뒤 소식이 끊어진 딸을 둔 김씨 노인을 조국광복회에 끌어들여 백두산밀영으로 가는 길목을 확보했다. 촌장이나 구장보다 영향력이 컸던 천도교인 이전흥 노인을 설득해 동북항일연군 활동을 지원할 튼튼한 기반을 마련했다. 권영벽은 괴뢰만주군 내부에 협조자를 확보함으로써 경찰의 움직임과 백두산 일대의 집단부락 건립계획 전모를 파악했다.

1937년 2월, 6개월여의 노력 끝에 장백현위원회를 조직하고 상강구 상방면특별지부·중방면특별지부·하강구특별지구를 만들었다. 이어 장백현위원회 지도 아래 이제순을 회장으로 하는 조국광복회 장백현위원회를 건립했다. 그 산하에 3개 구위원회와 수십 개의 지회, 수백 개의 분회를 조직했다.

권영벽은 유격대 사령부 지시에 따라 장백현 건너편 조선에 대한 조직사업도 진행했다. 1936년 초겨울 박달을 만나기 위해 이제순과 함께 갑산으로 떠났다. 그는 중국 장백현위원회와 조선 갑산위원회 등 조국광복회 조직들을 세우고 강화하는 활동을 했다. 권영벽·이제순·박달 등의 노력으로 중국 장백현과 갑산·혜산 등의 조선 북부지방에 조국광복회 조직이 확대됐다.

보천보 전투 참가

같은해 6월4일 밤 10시 동북항일연군 2군 6사(조선인민혁명군) 주력부대 150여명이 압록강을 건넜다. 부대는 2개 습격조와 2개 차단조, 1개 정치공작조로 구성됐다. 1습격조는 일제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소방서를 공격했다. 2습격조는 우편국·농사시험장·산림보호구를 습격해 기관 건물들을 전소시키고 일본 군경을 제압했다.

주력부대가 공격하는 동안 권영벽이 이끄는 정치공작조는 조국광복회 10대 강령과 포고문·격문 등을 뿌리며 정치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유격대는 순식간에 보천보를 공격·제압한 다음 철수했다. 유격대는 추격하는 일본군을 간삼봉에서 섬멸했다.

보천보 전투는 수많은 항일전투 중에서 규모로만 보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유격대는 권영벽 등 조국광복회 조직의 지원을 바탕으로 치밀한 사전답사와 준비, 전광석화 같은 습격작전 등 일제의 허를 찔러 완벽한 승리를 거뒀다. 이 전투로 일제의 이른바 ‘무적 신화’가 무참히 깨어지고 말았다. 민생단 사건으로 큰 타격을 받았던 동북항일연군 내에서는 좌절을 딛고 견고한 조중 연대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을 포기하고 변절하는 자들이 속출하고 패배의식이 팽배하던 상황에서 이 사건이 국내에 준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조선 민중은 이 사건을 통해 조선의 독립투쟁 의지가 죽지 않고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희망을 갖게 됐다. 이 사건은 동아일보·조선일보 등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이 과정에서 김일성의 명성이 크게 알려지면서 이후 ‘김일성 장군 신화’가 만들어지는 계기로 작용했다.

36세로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하다

일제는 보천보 전투 이후 권영벽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1937년 9월 유격대 활동을 지원했다가 재차 혜산읍에 잠입했던 3명이 체포되면서 단서가 드러났다. 10월10일 갑산공작위원회를 조직·지도하고 보천보 전투에 앞서 정찰활동을 하면서 도강과 전투를 지원했던 권영벽 등 8명이 장백현에서 체포됐다.

일제가 11월 중순까지 조선에서 162명, 장백현에서 52명을 체포하면서 조국광복회 조직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2년이 지난 1939년 9월 갑산공작위원회 책임자 박달 등이 체포되면서 사건은 종결됐다. 친일 고등계 형사(경부) 최연은 이 사건 공로로 경찰공로기장을 받았다. 해방 후 월남한 최연은 친일경찰을 미군정에 연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 ‘혜산사건’으로 총 739명이 체포됐고, 그중 188명이 기소됐다. 1941년 8월 함흥지방법원이 권영벽·이제순·박달 등 6명에게 사형, 박금철·이효순 등 4명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징역 15년 4명, 13년 6명, 12년 9명, 10년 18명, 8년 14명 등이었고, 7년 이하도 104명이나 됐다. 박달은 병으로 집행이 연기돼 1945년 8월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할 수 있었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권영벽은 1945년 3월10일 해방을 불과 5개월여 앞두고 형장 이슬로 사라졌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권영벽은 마지막으로 동지이자 아내인 황금옥에게 “반드시 우리의 혁명이 승리할 것을 믿기 때문에 떳떳하게 사형장으로 간다. 죽음은 두렵지 않으나 혁명을 위해 자유로운 몸으로 더 살고 싶소! 내 몫까지 더 살아서 많은 일을 해 주기 바라오”라고 유언했다. 이후 황금옥은 권영벽에 대해 이렇게 회고했다.

“권영벽 동지는 자기의 생애를 끝마치는 최후의 순간까지 조국에 대해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조국, 그것은 나의 마음이며 어머니다’라고 항상 노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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