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석정 윤세주(1900~1942)

3·1 만세운동 주도로 궐석재판을 받다

올해는 의열단이 조직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의열단 하면 가장 먼저 김원봉을 떠올릴 것이다. 박재혁·김익상·김상옥·김지섭·나석주 등 한국사 교과서를 장식하는 인물이 떠오를 것이고, 조금 더 들어가면 윤세주와 이육사가 생각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가운데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중량감 있는 민족해방운동가다. 그는 중국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 태항산에서 고귀한 피를 뿌려 조중 항일연합전선 동지들을 구한 조선의용대 지휘관으로 기억되고 있다. 또한 그는 조선민족혁명당 탄생의 산파요, 이론가였으며 탁월한 조직가였다. 그는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의 투쟁 역사 17년(1919~1935)의 시작과 끝을 열고 닫은 역전의 용장으로서 강인한 혁명이념의 소유자였다.

윤세주는 독립운동·혁명가의 산실인 밀양에서 1900년 6월24일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재적등본에는 1901년생으로 기재돼 있으나 족보와 친족 증언은 1900년생이어서 거기에 따른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집은 약산 김원봉(1898년생)의 집과 지척 간이었다. 두 사람은 ‘늘 한곳에서 놀고 한곳에서 자랐’으며 ‘특별히 친밀’했다. 세주와 약산은 4년제 밀양공립보통학교 때 일장기를 학교 변소 똥통에 처박고 뛰쳐나왔고, 동화학교에서 전홍표 교장의 민족교육 영향을 받아 독립운동에 투신할 각오를 세웠다.

1919년 3월13일 수천 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주도한 윤세주는 체포를 면했으나 궐석재판에서 가장 무거운 1년6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일경의 추적을 피해 만주로 떠났고, 1916년에 이미 중국으로 망명해 있던 김원봉을 만주 길림에서 재회했다.

의열단 결사와 국내 잠입·체포

1919년 11월10일 길림시 파호문 밖의 중국인 반씨 집 화성여관(현재 중국 지린시 광화로 57호)에서 김원봉·김상윤·한봉근·이종암·이성우·서상락·강세우·신철휴·곽재기, 그리고 윤세주(병으로 현장에는 불참)의 10인(한봉인·윤치형·배동선을 포함해 13인이라는 설도 있음)의 청년들이 의열단을 창립했다. 청년들은 형제의 의로써 뭉쳐 “천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義烈)할 결사대 조직으로 의열단을 결성했다.

의열단 결성 후 단원들은 거사를 위해 속속 국내로 잠입했다. 그러나 윤세주 등의 1차 거사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국외에서 들여온 무기류가 발각돼 1921년 6월16일 경성의 한 요릿집에서 윤세주 등 6명이 체포됐던 것이다. “기미운동 이후로 가장 세상의 이목을 놀라게 한 제1차 의열단-일명 밀양폭탄사건”이라며 언론을 크게 장식한 이 사건으로 윤세주는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윤세주는 법정에서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당당한 자세로 “영원히 조선 사람의 애국열혈을 약동하게” 할 웅변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그는 “우리의 1차 계획은 불행히도 실패했지만 피체되지 않은 우리 동지들은 도처에 있으니 반드시 강도왜적을 섬멸할 것이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의열단은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을 실천했고, 일제가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항일단체가 됐다.

국내의 신간회 활동과 2차 망명

1924년 4월20일 윤세주는 5년으로 감형을 받았으나 밀양 3·13 만세시위 사건의 궐석재판 결과인 1년6월이 추가됐다. 1927년 2월 초 대사면으로 석방돼 비로소 자유의 몸이 됐다. 출소 후 윤세주는 신간회 밀양지회 총무간사를 맡았다.

1929년 1월 윤세주는 결혼 10년 만에 아들 남선을 얻었으나 이듬해 9월 부친이 별세하고 1931년 5월에는 신간회가 해체되는 아픔도 겪었다. 1931년에는 항일투쟁 선배로서 산처럼 의지했던 황상규가 세상을 떠났다. 같은해 9·18 만주사변과 함께 정세가 급변하고 있었다. 더 이상 국내에 있을 수 없었다. 1932년 여름 그는 망명을 결행했다.

1932년 여름 윤세주는 중국 남경에서 10여년 만에 약산과 재상봉했다. 그는 이때 “나의 경험과 교훈에 근거해 단혈 열정과 용기만으로는 목적을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그러므로 나는 나의 혁명적 인생관·세계관 등 과학적 혁명이론으로 나의 두뇌를 재무장해야, 나아가 정확한 혁명운동을 추진할 수 있다”라고 피력했다. 그가 출소 후 활동을 통해 사회주의로 나아갔음을 알 수 있다.

윤세주는 그때 막 개설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1기생으로 입교했다. 혁명시인 이육사도 함께였다. 간부학교 졸업 후 1933년 9월부터 시작된 2기생 교관이 돼 의열단운동사를 비롯해 조선민족해방운동사, 각국 혁명사, 중국 혁명사, 유물사관과 유물론 철학, 당 조직 문제 등을 강의했다.

이 무렵부터 윤세주는 간부학교 졸업생들의 관리와 특파 공작원에 대한 각종 임무 부여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특파 예정 단원들에게 개인별 공작지와 임무, 이동경로, 통신연락 방법 등에 관한 지령을 내리고 대적공작을 지도하는 일을 약산과 함께 전담했다. 1934년 6월께 상하이 주재 ‘코민테른 원동국(遠東局)’ 대표인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미프(Miff)를 만나 조선 정세에 관해 협의한 것도 석정이었다. 석정은 김원봉의 최측근 참모이자 실질적인 2인자로 활동했다.

조선민족혁명당과 조선의용대의 이론가·조직가

1935년 7월5일 김두봉 등의 한국독립당, 김원봉·윤세주 등의 의열단, 최동오 등의 조선혁명당, 윤기섭·이청천 등의 신한독립당, 재미국민총회 등이 함께하는 민족혁명당이 결성됐다. 김구를 중심으로 한 임정 고수파만 불참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오래가지 못했다. 운영 주도권 문제 때문에 우파들이 탈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해방운동자동맹(김성숙)·조선혁명자연맹(유자명)·조선청년전위동맹(최창익) 등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조직했고, 1938년 10월에는 그 무력조직으로 조선의용대(총대장 김원봉)를 창설했다. 100여명의 대원으로 출범한 조선의용대는 임시정부의 광복군보다 2년이나 앞선 무장부대였다. 석정은 조선의용대 훈련주임으로 있으면서 기관지 <전고(戰鼓)>의 주간으로 활동했다.

의용대 대원들은 일본군을 대상으로 한 반일 선전활동을 펴는 한편, 공연을 통해 전쟁에 지친 인민들을 위무했으며, 일본어 교육·일본인 포로 심문 등을 통해 중국 군대 지원활동도 했다. 의용대 활동에서 주목할 것은 일본군속이나 일본군으로 징병된 조선인 포로 설득과 귀순 공작이었다. 포로 공작을 주도한 이가 윤세주였다. 1938년 10월 100여명으로 출발한 조선의용대는 1년 후인 1939년 가을에는 31명의 포로 출신들이 가담했다. 해방 당시에는 1천여명으로 늘어났는데 그중에는 포로 출신도 상당했다.

포로 공작이나 의열단 출신 간부학교 졸업생 관리 등 핵심 업무를 윤세주가 담당했다. 전선연맹 내 분파들 사이에 사람 획득 경쟁이 치열했는데 김원봉으로서는 윤세주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측근이자 동지였다. 또한 윤세주가 사람을 설득하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의 활약

1941년 봄 조선의용대 주력부대들이 황하를 건너 화북지역으로 이동했고, 6월에는 이들이 공산당 지구로 들어갔다. 조선의용대 규모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해 오고 있던 화북지역에서 활동할 필요가 있었다. 중국 국민당의 통제에서 벗어날 필요도 있었다.

화북으로 이동한 조선의용대는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청년들과 합세해 1941년 7월7일 조선의용대 화북지대(지대장 박효삼)를 결성했다. 1942년 7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했다.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1941년 7월부터 1942년 7월까지 1년여 동안 조선의용대·조선의용군 7년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처절하게 싸웠다. 그 투쟁 속에 조선의용대(군)가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1941년 12월12일의 호가장(胡家庄) 전투와 1942년 5월의 반소탕전(反掃蕩戰)이 자리하고 있다.

화북지역 일본군 사령부는 1942년 2월부터 3월 말까지 4만여 병력을 동원해 팔로군 공격에 나섰다. 5월부터는 20개 사단 약 40만명을 동원했다. 5월 하순께 팔로군 총사령부와 조선의용대 지대본부가 있던 태항산 자락 마전(馬田)까지 일본군의 포 사격권 안에 들면서 팽덕회·등소평 등 팔로군 최고 지휘부와 의용군 최고위급 간부들이 모두 포위되는 위기를 맞았다.

조선의용대는 박효삼 지대장의 지휘 아래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통해 활로를 열어 나갔다. 그 사이 팔로군 사령부는 두 고지 사이를 통해 탈출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팔로군 사령부 참모장 좌권 장군과 조선의용대 지휘부의 윤세주·진광화가 전사했다.

1942년 5월28일 일본군에게 쫓기던 중 진광화는 총을 맞고 절벽에서 떨어져 바로 전사했고, 다리에 총을 맞은 윤세주는 고통 속에서 사투를 벌이다가 5월31일 끝내 사망했다. 다른 사람들이 하루 종일 망을 보는 사이에 윤세주는 움집에서 지켜보는 이도 없는 가운데 유언도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42세였다. 최채와 하진동은 “열 손가락에 피가 흐르는 것도 모르고 돌덩이같이 굳은 땅을 파헤치고” 윤세주를 묻고 흙과 돌로 덮어 줬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윤세주·진광화 등은 피로써 목숨을 바쳐 조중 연대를 실천했다. 조선의용대원들의 목숨을 건 투쟁의 결과 팔로군 사령부는 그곳을 탈출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도 이들의 영웅적인 투쟁을 잊을 수 없었다. 1942년 10월10일 중국공산당은 놀랄 정도의 웅장한 ‘조선혁명열사 석정 동지의 묘’를 조성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이후 중국에서는 1942년 5월 “2만명의 일본군이 팔로군 총사령부를 포위했을 때 조선의용군 30여명이 팽덕회와 유관인원의 철퇴를 엄호했고, 조선동지 진광화·석정 등이 영용하게 희생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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