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정(1905~1951) 장군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항일투쟁 시기 전설적 명성을 떨친 장군

작가 김성동은 ‘백발백중 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이란 글에서 “항일투쟁사에서 조선 인민들이 꼽아 주었던 ‘장군’ 세 사람이 있으니, 김원봉 장군과 무정 장군과 김일성 장군이다. 홍범도 장군과 김좌진 장군이 있지만 그들 투쟁은 봉오동대첩과 청산리대첩 이후 이어지지 않았고, 김원봉·무정·김일성 3김 장군만이 조선 인민의 희망이었다”고 썼다. 이런 평가에 대해 사람들마다 생각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무정 장군이 ‘전설적 항일투사’ 중 한 명으로 널리 회자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학자 염인호가 정리한 ‘민족문화대백과사전-김무정’ 항목의 경력란에는 “팔로군 총부 작전과장, 팔로군 포병단장, 화북조선청년연합회 회장, 조선의용군 총사령, 북조선제2군단장, 북조선수도방위사령관”으로 돼 있다. 무정은 해방 후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중앙위원, 북조선공산당 간부부장, 북조선노동당 제2비서 등 중요한 정치경력도 갖고 있지만 군사경력이 부각된 편이다. 또한 그에 대해서는 항일시기의 높은 명성에 비견될 정도로 해방 후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했다는 평가가 많고, 한국전쟁 중 군사적 책임 문제로 군단장에서 철직(해임)당한 얼마 뒤 심장마비로 사망했기 때문에 ‘비운의 혁명가’란 꼬리표를 붙이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무정에 대해 군사적 능력에 비해 정치적 경험과 수완이 부족했으며 전쟁 중 군인들을 자의적으로 총살하고 전쟁 과정에서 방어사령관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북한노동당 부부장 출신 박병엽의 평가도 있다.

대장정 완주하고 홍군 팔로군 포병단장 역임

무정(武亭, 1905~1951)은 1905년 함경북도 경성에서 지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김병희(金炳禧)고 김무정은 별명이라고 한다. 보통 무정으로 부르고 있다. 1919년 15세 나이로 3·1 운동에 참여했으며, 1920년 서울의 중앙학교에 입학했지만 중퇴하고 조선중앙기독교청년학관 중등과에 편입해 1923년 졸업했다. 기독교청년학관 시절 서울청년회에 가입해 이영 등과 함께 활동하고, 노농대회 조직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정은 1924년 중국으로 망명해 바오딩(保定)군관학교(강무당) 포병과를 졸업했다. 1925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 1927년 장제스의 4·12 상하이 쿠데타 때 위기를 당했으나 탈출해 중국공산당의 해방구였던 루이진(瑞金)소비에트로 갔다. 무정은 중공노농홍군에 입대해 펑더화이(彭德懷)부대에서 활동하면서 국민당군에서 노획한 야포 등을 운용해 큰 전과를 올렸고, 그 바람에 공산당 지휘부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포 사격을 기가 막히게 잘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무정은 1934년 10월부터 전개된 중국공산당의 2만5천리 대장정에 참여해 끝까지 완주했다. 대장정에는 조선인 10여명이 참가했으나 도중에 거의 희생되고 1935년 10월 섬북(陝北)까지 도착한 사람은 양림(본명 김훈)과 무정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장정이 끝난 뒤 홍군주력이었던 15군단 75사(사장 린뱌오) 참모장으로 활동하고 있던 양림은 황허 도하 작전의 선봉대를 지휘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부상이 악화돼 사망하고 말았다. 양림이 전사한 이후 홍군 내에서 무정의 가치는 더욱 높아졌다.

2차 국공합작에 따라 1937년 8월 중국공산당의 노농홍군이 중국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개편될 때, 무정은 총사령부 작전과장에 임명됐다. 그는 성급하고 과격한 성격이 단점이었지만, 군인에 어울리는 강인한 의지와 결단력도 있어서 홍군 총사령 주더와 부사령 펑더화이의 신임을 톡톡히 받았다. 1938년 1월 팔로군 최초로 창설된 포병단(병력 1천여명) 단장이 됐고, 1940년 하반기 팔로군이 일본군에 대공세를 퍼부었던 백단대전에 포병단을 이끌고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의용군 사령관 무정의 귀국과 활동

1938년 10월 중국 후베이성 한커우(현재 우한)에서 창립된 조선의용대(대장 김원봉)의 주력부대는 항일전쟁을 위해서 북상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1940년 11월부터 북상을 시작했고, 1941년 3월 중국공산당의 팔로군 작전지역인 타이항산으로 이동해 7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로 개칭했다. 조선인 무력부대와 항일혁명가들이 북상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은 이들을 조직하고 지도할 정치적 책임을 무정에게 맡겼다. 이에 따라 1941년 1월 타이항산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회장 무정, 부회장 진광화)가 설립됐는데 1942년 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주석 김두봉)으로 확대 개편됐다. 동시에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해 무정이 사령관에 취임했다.

연안에서 정치조직인 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은 김두봉이었으나 조선의용군을 장악한 무정이 최고 실력자였다. 무정은 이 시절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최창익·박효삼·박일우 등 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핵심간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급한 성격과 포용력 부족, 군사 활동에 익숙한 직선적이고 독단적인 행동방식이 문제였다. 이는 해방 후 ‘연안파’로 불리는 독립동맹·조선의용군 세력이 구심력을 갖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활동하다가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항일빨치산세력에게 밀리게 된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1945년 8월11일 홍군 총사령관 주더는 무정에게 조선의용군을 이끌고 동북으로 진군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의용군 대원들은 8월 말에 출발해 60일간의 강행군 끝에 10월 말 동북 선양(瀋陽)에 도착했다. 그전 선양에는 한청의 지도 아래 1천여명의 조선의용군 선견종대가 조직돼 활동하고 있었다. 조선의용군 선견종대는 압록강을 넘어 북한으로 행진해 들어갔으나 소련군에 의해 추방됐고, 12월 초에도 북한으로 갔으나 재차 추방됐다. 소련군으로서는 대규모 무장부대가 들어오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한편 그해 11월10일 선양시 우홍구에 있는 오가황조선소학교에서 전체 조선의용군 대원들과 독립동맹원들의 대회가 개최됐다. 그런데 이 대회에서 간부들만 조선으로 돌아가고 전사들은 동북 각지로 파견돼 중국 해방전투에 참전한다고 결정됐다. 12월 초 무정 등 조선의용군과 독립동맹 지도부 70여명만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들어갔다. 손발과도 같은 군대를 중국에 남겨두고 뒤늦게 귀국한 연안파는 북한에서 위치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래도 무정은 귀국 후 곧바로 공산당에 입당해 간부부장에 임명됐으나 정치적 역할을 제대로 해 내지 못했다. 연안파는 귀국 이후에 대한 아무런 준비나 계획도 없었고, 내부적으로 단결돼 있지 않아서 세력화가 어려웠다. 각개약진하면서 동지들끼리도 서로 불신하고 분열됐다.

무정은 항일활동 시기의 명성에 어울리는 정치적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전쟁 중 징계를 받은 상태에서 사망했으나, 후에 복권돼 평양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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