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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66] 중국 인민이 추앙하는 위대한 음악가, 혁명투사 ‘조선사람’ 정율성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 해방 후 북으로 들어가 황해도당 선전부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의 정율성과 아내 정설송.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2000년 평양을 방문한 김대중 대통령을 위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준비한 사열식에서 연주된 노래가 있었다. <조선의용군행진곡>이다.

2015년 중국 천안문광장에서는 전승절 70주년 기념열병식이 열렸다. 중국 역사상 규모와 초청 인사만 놓고 보자면 가히 ‘역대급’ 행사였다. 이날 열병식에서 연주된 주요 노래들도 조선사람이 작곡한 것이다.

2014년 국가주석 취임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시진핑은 서울대에서 열린 강연에서 중국과 한국의 전통적 우의를 상징하는 인물로 특별히 한 사람의 이름을 언급했다.

‘정율성’이다.

“조선의 흙이 나를 만들고
중국의 광활한 대지가 나를 키웠다”


정율성은 우리나라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 직후인 1914년, 지금의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서 아버지 정해업과 어머니 최영은의 슬하에서 4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정해업은 광주수피아여고 교사였다. 수피아여고는 3·1 독립운동에 학생 전원이 참가했고,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한 명문학교다. 일제가 강요한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당하기도 했던 이 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유진 벨이었다. 그의 자손들이 만든 ‘유진벨재단’(이사장 스티브 린튼)은 선대의 뜻을 이어받아 대북 의료지원사업을 가장 헌신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단체이기도 하다.

정율성의 형제들도 모두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큰형 효룡(독립운동가, 건국훈장 애족장)과 충룡(항일투쟁 중 사망), 누나 봉은과 매형 박건웅(의열단 단원), 셋째 형 의은(의열단 단원) 모두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목숨을 바친 애국투사들이다. 그의 고백처럼 이런 “조선의 흙”이 있었기에 어린 율성이 애국의 넋을 조국의 대지에 뿌리내릴 수 있었으리라.

율성은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감수성이 뛰어났다. 외삼촌 집에 있던 축음기를 꽃 본 듯이 찾았고, 동네 교회에서 울려 나오는 풍금소리에 귀를 떼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는 사춘기 소년을 음악에만 빠져 있도록 놓아두지 않았다. 광주 신흥중학에 다닐 때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큰형을 비롯한 선배들이 시위에 나서고, 일본 경찰에 잡혀가고, 고초를 당하는 걸 고스란히 지켜봐야 했다.

설상가상이라 했던가.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자식들을 돌봐 주던 아버지가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집안의 기둥인 아버지의 죽음과 쇠락한 집안 형편 탓에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율성은 1933년 공작 차 조선으로 잠입했던 셋째 형 은성을 따라 상해를 거쳐 남경으로 건너간다. 그리고 매형 박건웅이 교수로 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열단 간부학교)에 입학한다. 간부학교의 1기 입학생으로는 시인 이육사가 있었고, 정율성은 2기 입학생이 된다.

일곱 달 동안의 고된 훈련을 마친 정율성은 적정 감시, 도청 등의 임무에 종사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상부의 배려로 수백 리 떨어진 남경과 상해를 오가며 꿈에도 그리던 음악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게 된다. 선생은 상트페테르부르크 마리아 극단의 프리마돈나였던 크리노아 교수였다. 총칼과 목숨을 건 싸움이 절실했던 그 시절에 어떻게 이런 결정이 가능했을까? 자세한 내막이야 알 수 없으나 혁명이 목표였지만 사람을 한갓 도구가 아니라 동지들이 가진 재능을 혁명의 자산으로 승화하려 했던 선배 투사들의 혜안이 깃든 결정이 아니었을까.

이때 그는 음악으로 혁명에 이바지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담아 본명 정부은에서 정율성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10여년 전 임종을 앞둔 아버지가 “독립군들이 부를 군가가 없다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노래로 독립운동을 하는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 중국 남경에서 ‘음악으로 일가를 이루겠다’는 의지와 염원을 담아 이름을 율성(律成)으로 바꾼 것이다.

▲ 흑룡강성 하얼빈시 인민 음악가 정율성 기념관 1층 전시실에 세워진 정율성 동상.<한국학중앙연구원>


혁명과 시련 그리고 사랑의 나날들

정율성은 남경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후 중국의 지식인과 예술가들의 모임인 ‘5월문예사’에 가담한다. 그때 그가 가장 즐겨 불렀던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인연이란 묘한 것이어서 그는 그곳에서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의 주인공 김산과도 각별한 사이였다. 황포군관학교 출신의 김산은 매형인 박건웅의 고향 친구이기도 했다. 김산이 노래 <아리랑>을 좋아해서 율성이 즐겨 부르게 됐는지, 아니면 율성의 노래에 감동한 김산이 <아리랑>을 자신의 정서적 기둥으로 삼아 책의 제목으로 삼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식민지 조국을 떠나 만리타국에서 풍찬노숙하며 일제와 싸우던 독립투사들에게 <아리랑>은 눈물 없이는 부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어머니의 노래가 아니었을까, 짐작할 따름이다.

이 무렵 중국공산당의 항일투쟁과 혁명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모택동과 주은래·주덕 등이 이끄는 홍군(紅軍)이 1만5천킬로미터에 달하는 연안으로의 ‘대장정’을 완수하면서 중국 정세는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한마디로 공산당의 약진과 국민당의 몰락. 장개석의 국민당이 항일투쟁이 아니라 공산당과의 싸움에만 몰두하자 어떤 것이 참된 투쟁인지 고민하던 율성은 마침내 1937년 10월 연안행을 결심한다.

노동과 훈련으로 점철된 연안 시절. 그러나 삶에는 노래도 있고 사랑도 있는 법이다. 산베이공학(陝北公學) 1기생으로 입학해 노래와 지휘를 공부하게 된 율성은 이어 노신예술학원 음악학부를 다니면서 자신의 대표작이자 ‘중국의 <아리랑>’으로 불리는 <연안송>을 작곡·발표한다. <연안송>은 힘겹고 어렵지만 혁명의 근거지를 지키고, 응원했던 모든 중국 인민들에게 가장 큰 위로와 격려가 되는 ‘혁명의 송가’였다. 지금도 중국 인민들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 중 하나가 <연안송>이다.

혁명을 향한 열정은 하늘을 찌를 듯했지만 생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간단치 않았다. 모두가 먹을 것이 없어 초근목피 하던 상황에서 증산투쟁에 매달리던 그에게 폐결핵이 엄습한다. 고통의 시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번엔 뜻밖의 인연이 다가왔다. 투쟁과 노래만 있던 그의 삶에 마침내 사랑이 등장한 것이다. 정설송(丁雪松). 당시 설송은 항일군정대학 여학생대대장이었다. 그리고 중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원한 총리’ 주은래와 등영초의 수양딸이기도 했다. 주은래와 등영초는 결혼할 때 혁명에 모든 것을 바친다는 뜻에서 자식을 낳지 않기로 맹세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슬플 때나 기쁠 때나 노래를 부른다. 목숨을 건 전쟁의 한 가운데서도 그렇다. 연인원 1천800만명이 혹독한 한겨울 추위를 뚫고 기어이 적폐정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촛불항쟁에서도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든 것은 노래였다. 투쟁의 현장에서는 장문의 연설보다 한 곡의 노래가 훨씬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법이다. 수백만명이 함께 불렀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우리의 마음과 의지를 하나로 단단히 묶어 주는 동아줄이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은 마침내 애국가의 반열에 올랐다.

연안 시절의 중국공산당과 홍군들은 비록 초근목피 하는 현실이었지만 ‘대장정’을 승리로 결속한 환희와 항일대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자신감, 그리고 혁명을 통해 새롭게 펼쳐질 세상에 대한 기대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것을 목청껏 부를 노래가 간절했다. 그리고 거기에 정율성이 있었다.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팔로군 대합창>에 들어 있던 <팔로군 행진곡>은 당시 연안뿐만 아니라 중국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마침내 <중국인민해방군가>로 승인받게 된다. 중국에서 열리는 국제행사나 국가적 기념일, 군사퍼레이드에서 항상 연주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내 영혼 고향에 묻힐 날은 언제인가

1945년 8월, 마침내 연합국이 승리하고 일제가 패망한다. 해방이 돼 조국으로 돌아가는 조선의 혁명가들 대열에는 정율성도 있었다. 태어난 고향인 남이 아니라 북으로 들어간 정율성은 해주에서 황해도당 선전부장으로 일하면서 음악전문학교를 창설하고 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중국으로 간 그에게 마지막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1960년대 온 중국 땅에 몰아닥친 ‘문화대혁명’. 조선 출신이라 ‘민족주의자’로 매도당했던 그는 1966년 문화혁명의 광풍이 한창일 때 모든 창작활동을 금지당했다. 당시 유일하게 그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은 사냥과 낚시였다고 한다.

그는 훗날 회고록을 통해 당시의 심경을 이렇게 피력했다.

“이것이 무슨 문화대혁명이냐! 이것은 문화대학살이다.”

정율성은 1976년 12월 적적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북경 근처에서 낚시를 하다 급성 뇌출혈로 생을 마치게 된다. 향년 62세. 그의 시신은 북경 팔보산 혁명공묘에 모셔졌다.

정율성의 고향인 광주시 남구 양림동에는 ‘정율성로(路)’가 있다. 200여미터 남짓한 거리에는 그를 기념하는 여러 조형물과 함께 흉상도 서 있다. 매년 10월에는 정율성국제음악제가 열린다. 반갑고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다. 광주 시민들이 이런 활동을 하는 동안 정부는 손을 놓고 있었다. 그의 독립운동이 사회주의 계열이었다는 이유 때문이다.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이미 오래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어야 할 이데올로기를 잣대로 독립운동을 반쪽으로 축소시키는 일은 자신의 뿌리를 불구로 만드는 자해행위이자, 민족적·역사적 자부심을 훼손하는 어리석은 소행이다. 굳이 비교할 바는 아니나 남의 역사도 자기 역사라고 우기는 중국과 자신의 역사도 방치하거나 심지어 백안시하는 한국. 독립운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하는 이유다.

정용일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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