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가 1924년 작성한 감시대상인물카드 속 의열단원 6인의 단체사진. 사진 뒷줄 맨 오른쪽이 김원봉이다. 뒷줄 왼쪽부터 이성우, 김기득, 강세우, 곽재기. 앞줄 왼쪽은 정이소, 오른쪽 작은 사진은 김익상.<국사편찬위원회>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역사학자들이 재평가·복권 1순위로 꼽은 김원봉

김원봉이 단장으로 있었던 의열단은 1920년대 일제와 친일파가 가장 두려워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10일 조직해 1929년 12월2일 해산할 때까지 가장 치열하게 일제와 싸웠다. 일제의 경찰서·침략수탈기관을 폭파하고, 일본군 장교와 밀정을 저격하며, 일왕 거주지에 폭탄을 던지는 무장투쟁을 34건이나 수행했다. 이들은 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과 조선의용대(군)의 주요한 근간이 됐다.

그러나 의열단을 이끌었던 김원봉(金元鳳, 1898~1958)과 이 단체 출신들은 해방 후 남과 북에서 합당한 평기를 받지 못했다. 김원봉이 단장으로 활동했던 의열단 100주년이 되는 2019년 김원봉과 의열단에 관심이 높았으나 ‘색깔론’이 난무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조망보다 이념논쟁으로 본질이 흐려지고 말았다. 김원봉이 월북한 뒤 북한에서 요직을 지냈다는 이유로 그의 독립운동과 의열단 활동까지 매도당했고, 목숨을 걸고 ‘항일의 불꽃’으로 스러져 간 대원들까지 잊혔다.

2019년 2월 서울신문이 역사학계 전문가 25명을 대상으로 심층 설문조사를 한 결과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재평가가 시급한 인물로 가장 많은 이들이 김원봉을 꼽았다. 사회주의계열 독립운동가 전체, 박헌영·이동휘 등이 그 뒤를 이었다.

독립투쟁을 향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

약산 김원봉은 1898년 9월 경남 밀양읍 내이리에서 태어났다. 그와 함께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를 조직해 활동하다가 타이항산에서 전사한 윤세주도 같은 동네에서 태어났다. 김원봉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다 늦게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두 살 아래 윤세주와 함께 일장기를 똥통에 처박고 학교를 뛰쳐나왔다. 김원봉과 윤세주는 사립 동화중학에 편입학해 교장 전홍표에게 민족의식의 세례를 듬뿍 받았으나 일제의 압력으로 동화학교는 폐쇄되고 말았다.

김원봉은 임진왜란 때 큰 공훈을 세운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표충사에 들어가 손자병법·오자병법 등 각종 병서를 읽으며 조국 광복의 방안을 고민했다. 1913년 서울로 올라간 약산은 중앙학교에 편입했다. 이때 교사로 있던 안재홍·송진우·김성수를 만났고, 화가 나혜석의 오빠로 교사였던 나경석, 평생의 친구 이명건과 김두전도 만났다.

하지만 김원봉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중앙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지리산과 계룡산, 천년고도 경주와 부여 등 전국의 명산을 찾아 무전여행을 했으며 열아홉 살 되던 1916년 10월에는 중국 난징으로 가서 덕화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여름 국내로 오던 중 그는 단둥에서 대한광복회 부사령 김좌진과 손일민 등을 만났는데 이들의 무장투쟁에 대한 고민을 들을 수 있었다.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 단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은 신해혁명을 보면서 조선의 혁명을 위해서는 비밀·암살·폭동이 중요하다고 보고 실천했는데, 김원봉은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산처럼, 물처럼, 별처럼 살아가라

국내로 돌아온 김원봉은 이명건·김두전과 함께 국외로 나가 큰일을 도모하자고 결의했다. 이때 스승이자 고모부였던 백민 황상규는 ‘산처럼 살아가라’는 의미로 김원봉에게 약산(若山)이라는 호를, 김두전과 이명건에게는 각각 ‘물처럼’ ‘별처럼’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약수(若水)와 여성(如聖)이라는 호를 지어 줬다. 이들은 나이 차가 제법 있었으나 평생을 동지로, 절친으로 살았다. 약산과 김약수(김두전), 이여성(이명건)은 1918년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에 함께 입학했다.

1919년 약산은 봉천(지금의 심양)으로 가던 도중 3·1 운동 소식을 접했다. 3·1혁명 소식에 김약수와 이여성은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마음을 굳혔고, 약산은 길림으로 향했다. 당시 길림에서는 황상규가 조소앙·김좌진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결성해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총을 구해 무장투쟁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황상규와 약산은 ‘천하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열렬히 투쟁할 단체’, 즉 의열단을 고민했다.

체계적인 군사훈련을 받을 필요를 느낀 약산은 서간도에 있던 신흥무관학교로 가 폭탄 제조법과 총기류 취급법을 배웠고, 이종암·이성우·서상락·강세우·김옥·한봉근·한봉인·신철휴 등 8명의 동지를 만났다. 이들은 비밀결사를 조직해 ‘직접행동’에 나서기로 의기투합했다. 약산은 이종암과 함께 상해로 가 폭탄 제조법을 배운 뒤 그해 10월 길림으로 귀환했다.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한 의열단

김원봉·이성우 등 10여명의 청년들은 1919년 11월9일 밤부터 길림성 파호문 밖 중국인 반씨 집 화성여관에서 밤새워 숙의한 끝에 10일 새벽 의열단을 창립했다. 의열단 창립 멤버는 10인설, 13인설, 17인설 등 여러 주장이 있지만 의열단 창단에서 백민 황상규의 지도와 의백(단장)으로 선출된 약산 김원봉의 주도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다. 황상규와 김원봉·윤세주 등 창립 초기 다수 단원이 밀양 출신이었다. 엄혹한 상황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은 역시 고향사람들이었다. 동시 독립운동에서도 지연과 혈연, 학연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는 걸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20세 전후 청년들은 형제의 의로써 뭉쳐 “천하의 정의를 맹렬히 실행”할 결사대 조직으로 의열단을 결성했고, 1920년대 중반까지 가장 격렬한 항일투쟁을 실천했다. 의열단은 일제가 가장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항일단체였고, 단장 김원봉은 일제가 가장 잡고 싶었던 ‘불령선인’이었다. 1921년 6월 경성에서 윤세주 등 6명이 거사 전에 체포되는 등 실패도 있었지만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사건(1920년 9월),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폭탄사건(1920년 11월), 김익상의 조선총독부 폭탄사건(1921년 9월), 김익상·이종암·오성륜의 상해 황포탄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미수사건(1922년 3월), 김상옥의 종로경찰서 폭탄사건(1923년 1월), 김지섭의 일본 궁성 폭탄사건(1924년 1월), 김병현·김광추·박희광의 일제밀정 배정자와 일진회 이용구 암살 미수사건(1924년 6월), 나석주의 동양척식회사·조선식산은행 습격사건(1926년 12월) 등 의열단의 투쟁은 폭포처럼 쏟아지며 일제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1924년 약산은 당대 최고 문장가인 단재 신채호에게 부탁해 <조선혁명선언>을 내놓았다. 조선혁명선언은 문화주의·외교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 타도, 민중 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한 독립 노선을 천명했다. 의열단은 1926년부터는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해 점차 계급적 이념에 기반을 둔 급진적 노선으로 나아갔다. 김원봉은 1920년대 후반 무장투쟁을 위해서는 테러나 암살 등의 방식이 아니라 조직된 군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한국광복군 부사령 겸 충칭 임시정부 군무부장

1931년 9·18 만주사변으로 중국과 세계정세, 독립운동 상황이 급변했다. 김원봉과 의열단은 이러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독립운동 진영의 통일을 도모하고 1935년 7월 남경에서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했다. 또한 중국 국민당 지원 아래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위한 준비를 진행해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총대장 김원봉)를 조직했다. 조선의용대는 중국 관내에서 조직된 최초의 조선인 무장부대였으나 좌우로 분열되면서 그 영향력이 약화됐다. 김원봉이 이끄는 본대는 충칭에 남아서 한국광복군과 임시정부에 참여했고, 윤세주·최창익 등이 이끄는 주력부대는 화북으로 북상해 중국공산당 지역에서 활동하게 됐다. 화북으로 넘어간 조선의용대는 조선의용군으로 개편, 김두봉·무정 등 독립동맹의 정치적 지도를 받게 됐다.

충칭에 남은 김원봉의 조선의용대는 광복군 1지대로 개편됐고, 김원봉은 1지대장 겸 광복군 부사령이 됐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임시정부에 가담해 좌우합작정부를 구성했고, 김원봉은 충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이 됐다. 김원봉의 의열단은 조선의용대를 거쳐,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군으로 이어졌으며, 충칭의 좌우합작 임시정부를 구성했다.

해방 후 월북과 북한에서의 활동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방 후 임시정부 요인으로 귀국한 김원봉은 1946년 초 반탁투쟁의 선두에 서 있던 김구와 결별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에 참여했다. 분단이 가시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열린 1948년 4월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던 김원봉은 남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남한에서 친일경찰 노덕술에게 당한 수모도 그렇고, 경찰과 우익의 살해 위협이 심각했던 상황이었다. 김원봉은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대 내각의 국가검열상이 됐고, 1952년부터 1956년 7월까지 노동상으로 있는 등 북한 정권의 요직을 지냈다.

그러나 김원봉이 북한 정권의 고위인사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에 숙청됐다는 설이 유력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북에서도 제대로 대접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아직도 남과 북에서 복권되지 못하고 있다. 북한 정권에 참여한 것이 김원봉의 독립운동을 깎아내릴 근거가 될 수는 없다. 독립운동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평가가 필요한 것이다. 이념적으로 보면 약산보다 훨씬 좌파였던 그의 동지 윤세주도 독립운동가로 서훈을 받았다. 독립운동은 그것대로 평가하고 그에 맞는 대접을 해 줘야 마땅하다.

역사학자들이 독립운동가로서 재평가와 복권 1순위로 꼽은 김원봉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는 언제쯤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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