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양림(1901~1936년)

중국공산당에서 최고위 조선인 혁명가

1930년대 중국 동북지역에서 중국공산당의 지도 아래 전개된 항일무장투쟁에서 조선인 역할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1931년 9·18 사변과 함께 일제의 만주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공산당은 대중을 조직해 항일투쟁에 동원함과 동시에 무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이 무렵 중국공산당 만주조직의 경우, 동만과 남만, 북만의 사정이 차이가 있었지만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동만지역(북간도)은 90% 이상, 일찍부터 항일독립투쟁이 활발했던 남만지역도 절반 이상을 조선인들이 점했다. 하얼빈 주변 북만지역은 동만이나 남만에 비해 조선인들이 적었지만 공산당원은 결코 소수가 아니었다.

중국 동북지역에서 초기 항일유격대를 조직하는 데서는 조선인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마지막까지 주요 핵심 간부들에 조선인들이 다수 포진해 있었다.

양림(김훈)은 초기 항일유격대 건설에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1932년 7월 중국공산당 중앙의 요구에 따라 소비에트 지역으로 넘어가면서 동북지역과는 관계가 단절됐다. 그는 1934~1935년 중국공산당의 대장정을 함께했고, 1936년 2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사망할 때까지 조선인으로서는 중국 공산당과 정부·군에서 최고위급에 있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에서의 역할과 비중이 워낙 막중했기 때문에 그의 활동과 관련해서는 그 부분만 주로 언급되고 있다.

광동코뮌 참가와 모스크바 유학

양림(楊林, 1901~1936)의 본명은 김훈(金勛)이다. 그는 평양에서 3·1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제의 추적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이회영·이상룡 등이 설립한 류허현의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북로군정서 교관이 됐다. 1920년 10월 그는 1개 중대를 이끌고 청산리 백운평전투에 직접 참전해 큰 공을 세웠다. 일제의 토벌작전을 피해 대부분의 독립군이 러시아로 넘어간 것과 달리 1921년 중국 관내로 들어가 운남 강무학당에 입학했다. 운남 강무학당은 중국인민해방군 총사령군 주더와 10대 원수 중 한명인 예젠잉, 베트남의 전쟁영웅 보응우옌잡 장군, 북한의 부주석을 지낸 항일유격대 출신의 최용건 등이 졸업한 곳으로 황포군관학교를 능가하는 중국의 최고 명문 군사학교다.

양림은 1차 국공합작에 따라 1924년 6월 중국 국민당 지도자 쑨원이 설립한 광저우의 황포군관학교 교관이 됐다. 당시 황포군관학교 교장은 장제스였고, 정치부 부주임은 저우언라이였다. 이 학교에는 많은 조선인 교관과 학생들이 있었다. 양림은 4기부터 교관을 했는데, 5기 최용건·오성륜(전광), 6기 박효삼 등이 교관으로 있었다. 광저우 시절 그의 연인이자 동지였던 이추악이 중국으로 망명해 부부가 됐다. 그들 부부는 최용건·김원봉 등 조선인 혁명가들과 교류하며 조선과 중국의 혁명운동에 대해 깊은 교감을 나눴다.

양림은 신흥무관학교 동료였던 김원봉의 입교와 의열단 진로에 도움을 줬다. 1926년 늦봄, 양림은 김원봉·윤세주·오성륜(전광)·김산 등과 함께 ‘조선혁명청년동맹’(후에 조선민족독립당)을 결성했다. 이로써 의열단은 기관 폭파, 요인 암살·저격 등의 활동 방식에서 조직된 무장부대들의 무력투쟁으로 방향 전환을 하게 됐다. 김산을 비롯한 많은 청년들이 광저우에 남아서 북벌전쟁을 지원하는 조직사업과 선전활동·후원사업에 참가했다.

양림은 1925년 2월 중국 광둥정부의 1차 동정(東征)에 참가해 군벌들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국민혁명군 제3영장으로 승진해 맹활약을 펼쳤다. 그러나 1927년 4월12일 장제스의 반공쿠데타로 수많은 공산당원이 체포·학살됐다. 이러한 위기를 모면한 양림과 이추악은 중국공산당의 결정에 따라 11월 류보청 등 30여명과 함께 소련 유학길에 올랐다. 모스크바에서 양림과 예젠잉 등은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류보청 등 10명은 소련홍군 고급보병학교에 입학했다. 이추악은 모스크바 동방공산대학에 입학했다. 2년 학제의 중산대학을 1년 만에 이수한 양림은 모스크바 레포르토보 보병학교에 입학·졸업했다. 그는 이 보병학교에서 중국특별반(중국련) 연장으로 활동했다.

연변의 당조직과 군사위 조직사업 지도

1930년 봄 양림은 모스크바 유학을 끝내고 이추악과 함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가 있는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양림은 중공당 만주성위 군사위원회 서기로 임명됐다. 그는 1930년 10월 새로 부임한 동만특위 서기 요여원과 함께 연변에서 중공동만특위를 구성, 왕청현위·훈춘현위를 조직하고 지도했다. 당시 양림은 최상동·방상범 등 황포군관학교 출신과 소련 군사유학 출신의 박윤서·김명균 등으로 동만특위 군사위원회를 조직했다. 양림의 노력으로 연변의 유격대 사업은 활기를 띠게 됐다.

1931년 2월15일 중공동만특위 군사위는 동만유격대의 활동 경험을 전면적으로 총화하고 연변 실정에 맞는 ‘동만유격대 사업요강’을 제정했다. 사업요강은 양림이 작성했는데 유격대의 임무와 의의 등 9가지 문제에 대해 7천여자로 정리했다. 사업요강은 연변당조직에서 유격대 사업에 대해 종합적으로 정리한 최초의 군사문건이었다.

양림의 동만유격대 사업요강은 동만지역 유격대 활동의 지침이 돼 유격대 사업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만주성위 군사위원회에 한 보고에 따르면 “동만유격대는 100여명이고 80여자루의 총을 확보했으며 일반 유격대원들도 전투에 참가했다”고 한다. 1931년 봄 이후에는 화룡현에서 평강구유격대·개산툰유격대·달라자유격대·삼도구유격대가 새로이 조직됐고, 달라자에서는 산속에 병기공장까지 만들어 칼·단도 등과 작탄(손으로 던져 터뜨리는 작은 폭탄)까지 만들었다.

항일유격대의 기틀을 세우다

군사경험이 풍부하고 기량이 뛰어났던 양림은 일제의 9·18 만주사변 후인 1931년 겨울 만주성위 군사위 서기에 임명됐다. 그는 1932년 봄 만주성위 순시원 신분으로 남만지역에 파견됐다. 유격대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남만지역의 중심지역은 반석이었다. 반석 일대는 산간지역에 자리 잡은 반석·이통·쌍양·화전·휘남·해룡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1928년 여름 황포군관학교 출신 진공목 등 조선족 공산당원들이 반석에서 지하사업을 하면서 남만의 정치상황이 획기적으로 변화했다. 양림은 반석에 도착해 만주성위의 ‘전면적인 무장항일투쟁’ 방침을 전달하고 이홍광과 함께 4·3, 5·1, 5·7 농민투쟁을 연속적으로 조직·지도했는데, 특히 5월7일의 하마하자 폭동은 농민들의 기세가 대단했다. 5·7 농민폭동은 남만항일투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고 반석유격대 발전의 출발점이 됐다.

1931년 9·18 사변 후 반석에서는 일본제국주의를 타격하기 위한 적위대로 “개잡이대(打拘隊)”가 조직돼 활동하고 있었는데, 1932년 1월 이 적위대를 이홍광을 대장으로 하는 “반석노농유격대”로 개편했다. 양림은 이 무장대오를 ‘반석노농의용군’으로 발전시켰다. 7월 반석노농의용군은 4개 중대를 가진 대오로 확대됐고, 후에 남만유격대와 동북항일연군 1군의 모태가 됐다. 양림은 이홍광과 함께 이 무장조직을 창건해 남만 일대 항일유격투쟁의 시원을 열었다. 이때 만주성위에서 파견된 중국인 간부 양징위도 결합했다.

양림은 남만의 항일무장투쟁을 조직한 뒤 다시 동만지역 4개 현의 항일유격투쟁 조직·지도에 나섰다. 1932년 봄에서 여름 사이 양림은 동만특위와 화룡·연길·왕청·훈춘 4개 현에서 유격대 활동을 지도했다. 화룡·연길·왕청·훈춘의 동만 4개 현 산간지역에 잇달아 항일유격 근거지가 세워지고, 남만·동만 지역에 항일유격대가 조직되는 과정에서 양림의 역할이 대단히 컸다. 양림은 1932년 7월 중공중앙 서기 저우언라이의 지시에 따라 강서 중앙소비에트로 옮겨 감으로써 동북지역과는 관계가 멀어졌으나 초기 동만과 남만지역 항일유격대 조직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홍군의 최고위급 조선인 지휘관

1932년 7월 양림은 중국공산당 중앙 서기 저우언라이의 부름을 받고 동북을 떠나 장시 중앙소비에트구역으로 소환됐다. 양림은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 노전위원회 참모장, 홍군 23군 군장, 월감군구 사령원, 홍군 1방면군 1군단 참모장, 중앙혁명군사위원회 총병참부 참모장 등으로 활동했고, 1934년 1월 임시수도 서금에서 열린 중화소비에트 2차 전국대표대회에서는 중화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에 당선됐다.

1934년 10월16일 중국공산당은 국민당군의 공격을 피해 장시 서금소비에트를 탈출해 대장정 길에 나섰고, 1935년 10월 산시성 섬감변구에 도착할 때까지 1년여에 걸쳐 새로운 길을 열어 나갔다. 양림은 중국공산당의 2만5천리 대장정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완수했다. 그는 1933~1934년 중국 홍군 1군단장 린뱌오와 정치위원에 이어 서열 3위의 참모장으로 활약했다. 후에 린뱌오가 중국의 10원수 중 최고 위치에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양림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장정 때 간부단 참모장으로서 위기 때마다 최일선에서 돌파구를 열었고, 유명한 ‘금사강 전투’ 때 뛰어난 지휘 역량을 발휘했다. 1935년 11월 장정이 끝난 뒤 양림은 홍군 15군단 75사 참모장에 임명됐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1936년 2월 초순 홍군 1군단과 홍군 15군단은 섬감근거지에 대한 국민당군의 공격을 막아 내고 해방구를 확대하기 위한 동정에 나섰다. 75사단 참모장 양림은 선두부대의 황허강 도하작전을 일선에서 지휘하던 중 복부에 총탄을 맞았다. 도하작전이 성공한 홍군 주력부대는 파죽지세로 산서성 석루진 의첩진을 공격·점령했다. 그러나 홍군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피를 너무 많이 흘린 양림은 부상 이틀 후인 같은달 22일 끝내 사망하고 말았다.

양림은 1932년 7월 아내 이추악과 헤어진 후 끝내 만나지 못했다.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지역에서 혁명활동에 매진하다가 같은해 사망했다. 양림은 1936년 2월에, 이추악은 9월에 각각 자신이 싸우던 투쟁 현장에서 파란 많은 혁명가의 생을 마감했다. 이때 두 사람의 나이는 35세였다. 같은해 태어나 같은해 사망한 두 사람은 천상의 배필이자 동지였다. 그들은 중국 혁명과 한국 독립이라는 이중의 과제를 안고 남의 땅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웠던 혁명가·독립투사였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