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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77] 김산이 넘어온 혁명의 열두 고개, <아리랑> ②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 연안 시절 김산(왼쪽 사진)과 님 웨일즈. 님 웨일즈가 찍은 것으로 알려진 유일한 김산의 전신 사진이다.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30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 일제에 체포돼 악랄한 고문과 회유에 시달렸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석방된 김산.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동지들의 환영이 아니라 불신과 당적 박탈, 그리고 가난과 병마였다. 그러나 김산은 굴하지 않는다. 1934년 병마에 시달리던 그는 자신을 헌신적으로 돌봐 주던 조아평과 결혼했다. 그리고 조선의 해방을 위한 독자적인 조직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더 이상 물속에 녹아 있는 소금처럼 우리 자신을 잃어버릴 처지가 못 된다. 우리는 쫓겨난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세력에 가담하는 세력으로서 중국에 가세해야 한다. 장래의 행동을 위해 조선인의 운동을 건설하고 준비하는 방향으로 재빨리 우리의 정력을 기울여야 한다.”

김산은 김충창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하고 대표 자격으로 중화소비에트의 수도 연안으로 파견된다.

연안 시절 ‘운명의 고개’에서 만난 님 웨일즈

김산은 연안에서 ‘운명’을 만나게 된다. 100년 전의 그와 오늘의 우리를 연결해 준 바로 그 사람을. 당시 그는 군정대학에서 일본 경제와 물리·화학을 가르치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한 미국인 여성이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님 웨일즈. 조선의 아름다운 산하와 ‘유순하기 짝이 없는’ 조선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던 중 김산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1910년 이래 조선 사람이 왜놈들과 싸우지 않은 날은 단 하루도 없었습니다. 아직은 한반도 내에서 식민지 체제를 때려 부수지는 못하고 있지만 만주에서부터 무장투쟁이 일어나고 있어요. 가장 친한 친구가 지금 만주에서 1개 사단을 지휘하고 있는데, 얼마 전 그 친구가 자기와 함께 싸우자는 편지를 몇 차례나 보내왔어요. 이 사단은 7천명의 조선인으로 이루어져 있지요.”

처음에는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는 님 웨일즈의 제안을 거절했던 김산은 무장투쟁에 참가하기 위해 만주로 떠날 결심을 굳힌 다음, 신변안전을 위해 2년 뒤 출간해 줄 것을 조건으로 파란만장했던 자신의 일대기를 풀어놓게 된다. 때는 1937년. “어디선가 젊음을 잃어버렸다”는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장투쟁으로 조국해방에 여생을 바치겠다던 그의 꿈은 실현되지 못한다. 도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여러 나라의 혁명사를 돌아보면 좌경이든 우경이든 혁명의 도정에 등장한 모든 편향은 조직을 파괴하고 막대한 희생을 초래하며 운동을 말아먹는 법이다. 특히 극좌모험주의·좌경맹동주의는 그 후과가 치명적이다. 동지를 의심하고 대오 내에 불신과 대립을 조장하며, 간자(間者)를 불러들이고, 대중을 무모한 폭동에로 내몰아 희생시키고, 마침내는 적들에게 투항함으로써 혁명을 안으로부터 파괴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김산의 최후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었지만 1986년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를 죽인 것은 중국공산당 보안 책임자였던 강생(康生)이다. 요녕인민출판사에서 간행된 <조선족항일렬사전> 2권에는 “1938년 섬감녕변구 보안처에서는 김산 동지의 역사를 심사하였다. ‘반역자가 아닐까?’ ‘일제특무가 아닐까?’ ‘트로츠키가 아닐까?’ 하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심사하였지만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는 없었다. 이에 강생은 비밀리에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산 동지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그때 그는 33살이었다.”

일제와 괴뢰 만주국 경찰들의 체포와 투옥, 모진 고문과 살해위협에도 굴하지 않았던 무쇠 같던 혁명가가 ‘혁명’의 탈을 쓴 극좌모험주의자·출세주의자 동료의 손에 허망하게 죽어 간 것이다.

혁명대오를 피로 물들인 ‘극좌모험주의 고개

그렇다면 이 무모한 피바람을 일으킨 강생이란 자는 어떤 인물인가.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인 강생(본명 장숙평)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으로 보안과 정보조직 수장이었다. 모스크바 유학 중에는 당시 한창이던 스탈린의 숙청을 흉내 내 소련에 있던 중국공산당원들을 트로츠키주의자로 낙인찍어 강제수용소로 보내거나 처형하는 데 앞장섰다.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던 연안으로 돌아와서는 당의 보안을 책임진 사회부장으로 모택동의 신임을 등에 업고 수많은 동지들을 일제와 국민당 첩자로 낙인찍어 처형했다. 1942년부터는 소위 ‘정풍운동’이란 미명하에 정적을 제거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스파이·배신자란 명목으로 체포·처형했다. 극단적 ‘적색테러’에 대한 원성이 자자해지자 강생은 공개 사죄하고 지방으로 좌천됐지만,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했던가. 중국 대륙을 증오와 파괴, 피로 얼룩지게 했던 ‘문화대혁명’ 시기 복권돼 강청과 함께 ‘내몽골 인민당사건’과 ‘운남성 당서기 스파이 사건’ 등을 조작해 또다시 수많은 인사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유소기·등소평·팽덕회 박해에도 앞장섰다.

물론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이라는 비극이 빚어진 데는 모택동의 관념적 좌경주의가 배경이 됐지만, 강생 같은 악질 행동대장이 없었더라면 그렇게까지 후과가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셀 수 없고, 가늠하기도 힘든 수많은 반혁명적 맹동과 패악질에도 지위와 모택동의 신임은 높아져 1974년에는 당 부주석에 취임하고 당 서열 4위까지 올랐다. 그의 손에 억울하게 죽어 간 혁명가들의 원한을 뒤로 한 채 주은래와 등소평 제거 작전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이듬해 암으로 죽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웅덩이를 흐려 놓는다”는 속담도 있지만, 혁명대오 안에 기어든 좌경기회주의자들이 지도부 신임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면서 혁명에 얼마나 막대한 후과를 미쳤는가를 가르쳐 주는 실례가 바로 강생인 것이다.

비단 김산뿐만이 아니었다. 1937~1938년에는 극좌모험주의로 인해 혁명 역량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반혁명의 누명을 쓰고 희생된 인물들 가운데는 박헌영·임원근과 함께 ‘화요파 트로이카’로 불리며 1925년 조선공산당을 창당했던 김단야도 있다. ‘김춘성(가명)’이란 이름의 조선인이 코민테른에 김단야를 종파주의자로, 가까운 동료인 “김찬·조봉암·박헌영·김한 등 밀정으로 전락한 자가 많다”고 고발했다. 고문을 못 이겨 자백서를 제출한 김단야는 1938년 2월13일 총살형을 선고받고 바로 다음 날 처단됐다.

1925년 카프(KAPF) 창설 회원이이었으며 우리나라 최초 희곡 <김영일의 사(死)>와 역사극 <파사(婆娑)>를 발표한 작가이자 시인인 조명희도 그런 희생자 중 한 사람이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그는 조선사범대학과 하바롭스크에서 교수로 재직 중이던 1937년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정책 당시 내무인민위원회(NKVD)에 일본 스파이와 협력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된 후 이듬해 4월15일에 사형을 선고받고, 한 달 뒤 총살형을 당했다가 1956년 7월20일 흐루쇼프 정권 때 복권됐다.

‘공포의 붉은 별’로 악명 높았던 강생의 연안 시절 사진. 강생은 중국 비밀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 모택동의 연안 정풍운동을 주도하고,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4인방의 배후로 활약했다. 김산도 이 자의 명령에 의해 스파이로 몰려 처형당했다.

조선인 혁명가들이 피눈물로 넘어야 했던 ‘민생단 고개

강생 같은 극좌모험주의자들이 등장하기 전에도 조국해방을 위해 중국 땅에서 싸우던 조선인 혁명가들의 앞길은 온통 가시덤불투성이였다. 1930년대 초반 만주지역에서 발생한 ‘반민생단투쟁’이 그 대표적 사례다.

‘민생단’이란 1932년 간도지방의 친일 부역자들이 조선인의 생존권 확보와 자치를 명분으로 설립한 단체였으나, 실제로는 일제의 중국 침략을 지지하며 친일·반공으로 일관한 주구(走狗)조직이었다. 불순한 의도로 설립된 민생단은 중국공산당과 조선 독립군의 협공을 받은 데다가, 일제마저 등을 돌리자 불과 1년여 후에 해산의 운명을 면치 못하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반일유격대에 생포된 일본 헌병 분견대 통역관이 “자신들은 유격대를 내부로부터 파괴하기 위해 파견됐다”며 20여명의 조선인 간부와 당원들을 ‘민생단’으로 지목하면서부터 대대적인 ‘반민생단 투쟁’이 벌어졌다.

처음에는 조선인들 내에 침입한 첩자를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시작된 숙청은 원칙도, 기준도,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로 진행돼 사소한 잘못이나 불평만 해도 바로 ‘민생단’으로 찍혀 체포·학살당했다. 심지어 밥알만 흘려도 이적행위자(식량 낭비)로 몰려 처형당하다 보니 일제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보다 민생단으로 몰려 처형된 조선인이 훨씬 더 많은 어처구니없는 대참극이 빚어졌다.

약 3년간의 반민생투쟁으로 희생된 조선인들 대부분이 오랜 경험으로 단련되고 이론도 겸비한 지도급 혁명가들이었으니 타격은 치명적이었다. 주보중(周保中)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동북항일연군 지도자 중 한 명이던 김일성도 민생단으로 몰려 희생당할 뻔했으나 극적으로 화를 면했다고 한다. 김일성 사령은 마안산 지구에서 민생단 혐의자 100명을 상대로 면담과 조사를 벌인 결과 이들이 혐의가 없다고 확신하고 민생단 보따리를 불사르는 과감한 결단을 내리는 한편, 이들을 동북항일연군 주력부대로 편입시켜 3사의 7단과 8단을 구성하게 된다.

사지에서 다시 살아난 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움으로써’ 훗날 ‘김일성부대의 신화’를 창조하는 주력부대가 됐다. 이들은 장백현과 국내에 공작원으로 파견돼 조국광복회 결성에 나섰으며, 1937년 6월 초에는 국내진공작전인 보천보 전투에서도 주역으로 활약하게 된다. 그러나 전화위복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희생이 컸고, 단순히 좌경적 오류라고 하기엔 피가 거꾸로 솟는 반동적 패륜이 아닐 수 없었다.

끝내 넘지 못한 ‘해방의 고개’ 그러나…

김산에게 상해는 ‘재회의 도시’였다. 광동에서의 봉기 실패 이후 몸을 피하지 않고 숨어 지냈던 김충창을 다시 만난 것도 상해였다. 어느 날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거지꼴을 한 오성륜을 극적으로 재회한 곳도 상해였다. 그러나 재회의 감격도 잠시,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임시정부에서 내무차관과 국무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충창은 해방 후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혁신정당운동에 헌신하다 1969년 병고와 가난에 시달리다 숨을 거두었다. 오성륜은 만주에서 동북항일군 2사에서 정치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일제 관동군에 체포돼 전향했다. 이후 친일로 변절해 동지들을 때려잡는 일제의 개로 전락했다. 사필귀정. 해방이 되자 그는 옛 동지들에게 붙잡혀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 김산이 살아서 이 광경을 보지 않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 할지….

중국공산당은 김산이 처형된 지 45년이 지난 1983년에야 “그의 처형은 특수한 역사 상황 아래서 발생한 잘못된 조치”라며 명예를 회복시켰다. 2005년 노무현 정부는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김산은 자신의 삶을 이렇게 총화한다.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내 전 생애는 실패의 연속이었어요! (…) 그렇지만 나는 사람에 대한 신뢰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의 능력에 대한 신뢰를 잃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 민중과의 계급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배웠어요. 왜냐하면 민중의 의지는 역사의 의지이기 때문이지요. (…) 그 무엇도 사람이 역사라고 하는 운동 속에서 점하는 자리를 빼앗을 수 없지요. 그 무엇도 사람을 빠져나가게 할 수 없어요. 유일한 그의 개인적 결정이라고는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후퇴할 것인가? 싸울 것인가, 아니면 굴복할 것인가? 가치를 창조할 것인가, 아니면 파괴할 것인가? 강해질 것인가, 아니면 나약해질 것인가? 하는 것밖에.”

김산의 생애를 관통한 화두는 ‘민중에 대한 신뢰’였던 것이다. 독립운동관장을 지낸 김삼웅은 박건웅이 만화로 다시 그린 <아리랑> 추천사에서 “일제강점기 최고의 선행은 독립운동이고 최대의 악행은 친일행위였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분단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최고의 선행은 무엇이고 최대의 악행은 무엇인가.

정용일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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