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이강복 선생(1910~1971)

현재 서울 중구 동국대 교정 안, 장충단공원 가까운 곳에 ‘이해랑예술극장’이라 명명한 건물이 있다. 이해랑은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 니혼대 예술학과를 다니며, ‘학생예술좌’에 참여하며 연극인이 된 인물이다. 해방 후에는 유치진과 활동하며 분단 이후 남쪽 극예술계의 대표적인 인물이 된다. 하지만 이해랑보다 앞서 극예술을 통해 무너진 민족혼을 부활시키려던 전설적인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연극동맹 서기장을 맡았던 이강복이다.

이강복은 1947년에 조선연극동맹이 주관한 ‘3·1기념 연극제’에 <태백산맥>과 <위대한 사랑> 등 두 작품을 출품한다. 서울 제일극장과 국도극장에서 한 달 공연했는데 약 4만명이 관람하는 쾌거를 올렸다. 이강복은 연극제가 끝난 이후에도 ‘1차 문화공작대’를 조직해 그해 6월30일부터 8월6일까지 전국을 돌며, 30개 지역에서 80여회 공연으로 10만여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지금으로 치자면 ‘천만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라고 부를 만한 대성공작이었다.

이강복은 1910년 8월14일 대구에서 대부호였던 이기양의 삼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친은 안희재·여운형과 교류하면서 독립운동가들을 후원했다. 덕분에 옥살이도 했다. 일제의 탄압으로 넉넉했던 가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1925년 대구고보 3학년이었던 이강복은 일본 동경으로 가 동아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대 정경과에 입학한다.

일본에서 연극활동

무일푼으로 일본에 간 이강복은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러던 중 각기병에 걸려 학업을 중단한다. 다행히 일본인 은사의 도움으로 병을 고쳤으나, 생계 문제로 더는 학업 수행이 어려웠다. 그래서 경제전문지 <에코노미스트(Economist)>와 연극잡지 <세아타(Theater)>에서 편집 일을 한다. 그리고 1933년 12월부터 일본 ‘츠키지(築地)소극장’ 단원이 돼 1943년 10월까지 약 10여년간을 일본 연극계에서 활동한다. ‘츠키지소극장’은 1920년 후반 당시 일본에 유행처럼 번지던 신극운동의 대표적인 극장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신극운동은 1929년 ‘일본프롤레타리아극장연맹(PROT)’을 발족시켰다. 이 시기는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예술문학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1930년대부터 일본은 치안유지법을 강화했다. 정당정치는 붕괴했고, 공산주의와 연계된 활동은 불법화됐다. 1933년에 작성된 일본 내무성의 기록에 ‘이강복’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때 이미 이강복은 ‘요주의 인물’로 성장해 있었다. 태평양전쟁 직전인 1940년 이강복은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 시기 이강복은 일본의 선진연극을 조선에 소개한다. 이미 일본에서 반향을 일으킨 <춘향전>을 1938년 10월 경성 부민관 공연을 시작으로 평양·대전·전주·군산·대구·부산을 돌며 순회공연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공연으로 국내에서는 많은 논란이 일었다. 연극이 일본어로 공연된 것이다. 반대쪽에서는 “연극은 언어의 예술이다. 조선 사람이 가장 사랑하는 춘향전을 일본 말로 조선공연을 한다는 것은 춘향전의 모독이요. 조선 사람의 모욕”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강복은 “신협극단이 가진 연극 기술은 조선연극계에 큰 자극을 줄 좋은 기회”라고 말하며 “셰익스피어 연극을 기회만 있으면 영어 공연으로 할 수도 있고, 또 명작 소설을 번역하는 문화교류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주장하며 일어 공연을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이 순회팀에는 조연출 안영일과 효과 이강복 외에는 모두 일본인이었다. 그러니 일본 말로 하지 않고서는 수준 높은 연극공연을 조선에 소개할 수가 없었다.

당시 조선 연극은 신파가 대세였다. 이강복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1. 문학적으로나 사상적으로나 예술적인 연극을 창조 못 한 신파 2. 배우 제일주의로 희곡의 존재를 경시하는 신파 3. 종합예술의 완전한 무대적 사명을 수행치 못한 신파 4. 관객조직에 있어서 반동적 역할을 한 신파. 이상과 같은 기형적 연극으로서 무대의 기술적 발달도 없이 인정과 의리라는 사회적 도피 속에서만 국척하는 봉건적 연극관념을 떠나는 것이 신극의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신극은 어떠한 창작활동을 할 것인가? 연극은 본질적 관념에 있어서 두 가지의 방향이 있다. 하나는 직감적인 감상으로 유도하는 방향 또 하나의 연극의 학적 체계화와 조직화가 곧 이것이다. 전자를 ‘신파’라고 하면 후자를 ‘신극’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시기, 조선연극동맹 서기장

해방 직전인 1943년에 귀국한 이강복은 낙후한 조선의 연극을 발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한다. 그는 극단 ‘아랑’과 ‘고협’에서 연출을 담당하지만, 총독부의 검열을 받는 관제연극만이 판을 치고 있어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었다. 기회는 해방이 되자마자 다가왔다.

1945년 해방 직후 조선에는 ‘조선연극의 해방, 조선연극의 건설, 연극전선의 통일’이라는 굵직한 슬로건을 내걸고 ‘조선연극건설본부’가 조직되고, 이어 9월27일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프로연맹)이 결성된다. 이때 이강복은 중앙집행위원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됐다. ‘프로연맹’ 산하 극단으로는 ‘자유극장’ ‘혁명극장’ ‘조선예술극장’ ‘서울예술극장’ ‘낙랑극회’ 등이 있었다. 그리고 같은해 12월20일에는 좌우익을 통틀어 조선 연극인 90%가 참여한 ‘조선연극동맹’이 결성된다.

이 과정에서 이강복은 매너리즘에 빠진 ‘신파’와 달리 리얼리즘에 바탕을 둔 ‘신극’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극의 현실감을 높이기 위해 정교한 무대장치와 음향을 도입한다. 이러한 역할 덕분에 그는 해방 1주년을 앞둔 1946년 7월 열린 ‘조선연극인 대회’에서 ‘조선연극동맹’의 서기장으로 선출된다.

그렇다면 당시 이강복이 주장한 신극운동의 내용은 무엇이었던가? 이에 대해 그는 1946년 8월16일 해방 1주년을 맞아 조선연극동맹을 대표해 ‘연극써클운동’이라는 글을 중외신보에 기고했다.

“강도 제국주의 일본이 물러간 후 흥분과 기쁨과 감격 속에서 진정한 민주주의적 민족연극 건설을 위하여 전진하여 온 조선연극운동은 새로이 전개되는 객관적 정세에 부딪쳐 혼란과 무질서와 후퇴하는 경향을 다시 노정하게 되었다. (…) 조선연극동맹은 이러한 곤란한 사태에서 때로는 계산된 후퇴가 있을는지 모르나 언제나 인민과 더불어 인민을 기초로 하여 민주주의 국가건설을 위하여 매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열정적인 이강복의 활동은 1947년 10만명의 관객을 끌어모은 ‘1차 문화공작대’ 활동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가기 시작한다. 미군정은 1947년 8월 중순부터 ‘좌익간부 총검거령’을 내려 조선연극동맹 구성원들을 감시하고 구속했다. 이강복은 이러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줄기차게 신극운동을 전개한다. 1949년에는 국가보안법으로도 구속됐다. 게다가 그해 10월 이승만 정부가 조선연극동맹을 불법화하자, 그는 더는 연극활동을 할 수 없었다.

이러한 탄압을 피해 많은 신극 연극인들이 당시 ‘조국재건’을 위해 신극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던 북으로 갔다. 이 시기 ‘황철’이라는 배우가 있다. 그는 일제강점기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에서 ‘홍도의 오빠’역을 맡아 일약 스타가 된 조선 최고 배우였다. 하지만 그는 해방 이후 이강복과 만나면서 신극운동에 눈을 뜨게 됐다. 그는 1947년 ‘파업선동혐의’로 구속된다. 또 이강복과 함께 문화공작대에 참여해 지방순회공연을 하던 중 우익청년들에게 테러를 당한다. 그는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에 연극인 대표로 참석했다가 그해 8월 북행을 선택하게 된다.

이러한 신극운동가들의 북행에 대해 이강복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근의 연극계는 8·15 직후와 같은 새로운 이념의 추구도, 또한 연극인의 정렬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주제의 빈곤과 연기의 매너리즘으로 인하여 퇴조한 가운데 신파극과 역사극의 유행이 특징적 현상을 이루고 있다. (…) 이리하여 연극계는 피폐하고 연극인은 생활 궁핍의 극에 달하였다.”

해방 직후의 활기는 정치적·경제적 압력으로 연극계가 침체에 빠지자, 이 같은 현실에 불만을 느낀 나머지 많은 수의 연극인들이 북으로 갔다고 이강복은 말했다.

잊힌 연극인으로 남다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불혹의 나이에 한국전쟁을 겪은 이강복은 전쟁 후에도 남북대결이 이어지자 더는 신극운동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대구에 머물면서 자영업을 하며 살았다. 그러던 중 1968년 7월 말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다. 반공정권은 조선공산당 경력을 지닌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그는 이 건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사건 수사 과정에서, 감옥에서 고통스러운 폭력이 가해졌고 1971년 10월18일 그만 옥사하고 만다.

2009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을 중앙정보부가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그의 무죄가 밝혀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신극운동을 통해 흩어진 민족을 하나로 모아 근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애썼던 흔적들은 아직도 역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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