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0 만세 시위를 주도한 후 구속된 이현상. 매서운 눈매와 우뚝한 콧날, 굳게 다문 입술이 그의 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듯하다.<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한반도의 등뼈를 이루고 있는 백두대간의 최남단 지리산. 깊은 골짜기 계곡물에 수백 명의 사람들이 알몸으로 어린아이들처럼 물장구를 치며 놀고 있다. 이때 산등성이에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계곡의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사람들은 일제히 그를 향해 만세의 환호성을 울린다. 그리고 이어지는 내레이션.

“내가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 이현상을 처음 보는 순간이었다. 이현상! 그는 남로당이 지하로 잠적하면서 일제하 독립운동 때의 경험을 살려 빨치산으로 투신한 철저한 공산주의자이며 또한 민족주의자였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남로당의 정통성을 고집하면서 북을 마다하고 남한 혁명을 꿈꾸어 온 고독한 투사였다.”

한국전쟁 당시 ‘조선중앙통신’의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이태가 쓴 <남부군>을 원작으로 한 정지영 감독의 영화 <남부군>에 나오는 한 장면이다. ‘남부군 총사령관’이자 ‘금기의 대명사’였던 이현상이 1953년 전사한 이후 거의 40년 만에 다시 한국현대사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이태의 <남부군>은 금기의 영역이던 지리산 빨치산과 그 지도자였던 이현상을 다시 현대사로 불러낸 의미는 있으나 철저히 남북 대결의 관점과 반북적 관점에서 서술한 것으로 비전향장기수들에게 맹비난을 받은 바 있다.

1990년 개봉한 이 영화를 보면서 충격을 받은 것은 지리산 빨치산들이 ‘토벌대’를 공격하는 장면이었다. 영화에는 빨치산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토벌대들이 죄 없는 민간인들을 학살하자 복수를 결정한 빨치산들이 매복전을 펼쳐 토벌대를 ‘토벌’하는 장면이 나온다. 순간 관객석에서는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아무리 6월 항쟁 직후 열린 공간이라고 하지만 군사독재의 연장인 노태우 정권 하에서 ‘반공’과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굳이 빨치산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잠시나마 극장은 ‘해방구’가 된 셈이었다.

이현상에게는 흔히 ‘북에서 버림받고 남에서 잊힌 혁명가’ ‘전설적인 남한 빨치산 대장’ ‘비운의 혁명가’ 등의 수식어가 붙는다. 과연 그런가? 이현상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정당한가? 인류의 역사가 탁월한 개인이나 영웅에 의해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민중과 함께 하는 지도자의 역할은 중요하고, 때로는 결정적이다. ‘모든 역사는 현대사’란 말처럼 오늘 평화와 통일이라는 지상의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한국 근현대사의 변곡점마다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자취를 함께 돌아보자.

6·10 만세운동의 불씨가 되어

이현상은 ‘을사늑약’으로 일제에 외교권을 빼앗긴 망국 전야인 1905년 충남 금산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의 나이 여섯 살에 조선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가 됐다. 이현상에게 해방과 독립 그리고 그것을 위한 항일은 태어나면서부터 숙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1925년 4월25일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서거했다. 조선공산당은 순종의 장례일인 6월10일을 기해 대대적인 반일 시위를 하기로 계획했지만, 거사 직전 적발돼 지도부가 체포되고 말았다. 결국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시위에서 가장 먼저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며 뛰어나간 사람이 당시 중앙고보 4학년이던 이현상이었다. 종로3가 단성사 앞에서 시작된 시위는 전국으로 번져 나가 5천여명이 연행됐고, 그는 처음으로 구속된다.

출소 후 보성전문 법과에 입학한 이현상은 고려공산청년연맹에 가입하고 학생운동에 투신해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제일고보·양정고보·경신고보 등에서 학생들의 투쟁을 지도하다 또다시 치안유지법으로 구속된다. 이때 감옥에서 만난 김삼룡·이재유 등과 출소 후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 트로이카’를 결성하고 서울지역에서 노동자들의 파업과 학생들의 동맹휴업을 이끌다 다시 구속된다.

1938년 12월 이관술·김삼룡·박헌영 등과 함께 ‘경성콤그룹’을 결성하고 국내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다 구속된다. 조직과 투쟁, 그리고 구속과 출소, 다시 조직과 투쟁 그리고 구속…. 일제 강점기 그의 이력을 보면 마치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며 싸웠던 투사의 전형처럼 생각된다.

1945년 마침내 일제의 압제에서는 벗어났지만 진정한 해방은 오지 않았다.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는 허리가 잘렸고, 남쪽에는 미군이 점령군으로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된 민중들의 ‘통일·독립과 진보적 민주 정부’에 대한 열망은 하늘을 찔렀다. 해방 이듬해 박헌영·김관술 등과 함께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한 그는 중앙위원 겸 노동부장직을 맡게 된다.

1947년 7월께,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기정사실로 굳어지자 이현상은 남로당에 군사부를 설치하고 무장투쟁을 준비하던 중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북으로 올라간다.

남북연석회의에 남로당 대표로 참석한 이현상은 석 달 동안 해주에 있던 강동정치학원에서 군사훈련을 받았다. 본격적인 빨치산 투쟁을 위해서였다. 이주하와 함께 남쪽으로 내려오기 직전 평양으로 올라와 김일성 수상을 만난다. 이때 김일성 수상은 “하고 싶은 말과 부탁이 있으면 서슴지 말고 하라”고 했고, 이현상은 잠시 생각하다가 “저의 아들딸 4남매의 앞날을 오직 당신에게 의탁합니다” 하고 부탁한다.

그러자 김일성 수상은 이현상의 손을 잡으며 “어서 아이들을 보내시오. 아들도 보내고 유망한 청년들도 보내라”고 말한다. 남쪽으로 내려온 이현상은 먼저 큰아들 이극(당시 21세)과 청년들을 먼저 북으로 올려 보냈고, 한국전쟁이 터지자 아내 최문기와 무영·문영·상진 세 딸은 인민군을 따라 북으로 올라갔다.

이현상의 아들 이극을 만난 김일성 수상은 그의 이름을 두고 “항상 이긴다는 뜻이구먼. 이름이 좋다”라고 했다고 한다. 전쟁 전 평양에서 김일성 수상을 만나고, 자식들을 북으로 올려 보낸 것은 몽양 여운형을 연상하게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자녀들의 운명도 그다지 다르지 않다.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이 주검으로 발견된 지리산 빗점골 너덜바위 아래 계곡. 사람들은 갔어도 역사의 흐름처럼 많은 사연을 안고 오늘도 계곡은 흐르고 있다.

반란의 산, 운명의 지리산으로

1948년 10월19일, 전남 여수에 주둔 중이던 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로 출동해 진압하라는 이승만의 명령을 거부하고 김지회와 지창수를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른바 ‘여순항쟁’이 터진 것이다. 반란군과 진압군은 곳곳에서 교전을 했고, 그 과정에 무수한 민간인들이 죽어 나갔다. 반란은 일으켰지만 사전 계획도, 뚜렷한 목표도 없었다. 전열 정비와 지도선이 절실했다.

며칠 뒤인 10월22일. 이현상이 순천역에 도착했다. 그리고 홍순석 대위와 지창수 상사를 만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이현상은 600여명의 군인들을 이끌고 지리산 문수골로 들어갔다. 일제 강점기에 산으로 들어간 ‘구빨치’들도 있었지만 본격적인 지리산 유격대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

지리산에 도착한 이현상은 지휘관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지시한다.

“인민의 군대인 여러분은 무엇보다도 인민을 사랑하고 아껴야 합니다.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인민을 함부로 죽이거나 괴롭히면 안 됩니다. 설사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정당한 인민재판의 절차를 거쳐 심판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총을 들이댄 적이라도 모두 우리의 동포, 우리의 형제입니다. 일단 포로로 잡으면 절대 죽여서는 안 됩니다. 이 규약을 어기면 가차 없이 처단할 것입니다.”

이현상의 이 지시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교전 중인 적 이외에는 절대 죽이지 않는다’ ‘인민을 믿고 인민에 의거해 투쟁한다’ ‘인민은 물이고 유격대는 물고기다’ 등은 중국 관내와 만주에서 투쟁하던 항일유격대의 불문율이었다. 다만 그는 복잡한 내전 과정에서 흐트러진 원칙을 다시금 강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상황 논리가 원칙을 방기하는 상황에서 인간 이현상의 성품과 혁명가로서의 원칙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봐야 할 것이다.

지리산에서의 빨치산 투쟁은 간고한 ‘고난의 행군’ 그 자체였다. 일제 강점기 항일유격대들이 가져야 했던 ‘3대 각오’, 다시 말해서 ‘(총)맞아 죽고, 얼어 죽고, 굶어 죽는’ 것이 현실이 된 것이다. 밀림과 같은 은신처와 육지로 연결된 지리적 후방도 없는 상황에서 고립은 불가피했고, 토벌은 잔인했다.

한국전쟁 직전 살아남은 전사들은 환자를 빼고는 70명 내외.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인민군과 함께 이현상 부대도 후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의 북강원도 세포군에 도착했을 때 이승엽(훗날 박헌영과 함께 미제 간첩 혐의로 처형) 남조선해방지구 군사전권위원이 달려와 지령을 하달한다.

“남조선 지역의 모든 빨치산을 ‘남반부 인민유격대’, 즉 ‘남부군’으로 통합하고 총사령관으로 이현상을 임명한다”는 것, 그리고 “남쪽에서 퇴로가 막힌 인민군 약 2만명을 규합해 후방을 교란하라는 것”이었다. 비정규전 원칙의 방기였고, 지리산 빨치산 비극의 시작이었다.

1950년 11월10일 창설된 ‘남부군’은 1951년 5월26일 청주를 공격하여 주요 기관들을 점령하고 청주교도소를 여는 전과를 올린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충격을 받은 이승만 정권은 4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박정희·백선엽·정일권 등 친일파들을 앞잡이로 활용해 벌인 간도토벌대의 재판이었다.

세 차례에 걸친 대대적인 토벌작전으로 ‘남부군’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는다. 특히 지리산에서 가장 깊은 골짜기로 알려진 대성골로 피신한 1천여명의 빨치산들은 ‘토끼몰이식’ 토벌작전에 몰려 처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당시 상황에 대해 소년 빨치산으로 지리산에서 활동했던 김영승은 이렇게 증언한다. “52년 1월 동계대공세 때 이현상의 대부대도 대성골에서 큰 타격을 받았어요. 토끼몰이로 대성골에 몰린 유격대와 민간인 1천500~2천명이 학살을 당했습니다. 치열한 전투에 휘발유와 네이팜탄을 쏟아부어 능선은 초토화되고 4월에 눈이 녹으며 시신들이 드러났어요. 20년 후에도 해골이 발견됐지요.”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그날 지리산의 통한과 심경은 한 편의 노래로 우리에게 남아 있다. <녹슬은 해방구>로.

“그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흘린 피로/ 앞서간 죽음 저편에 해방의 산마루로 피었지/ 그해 우린 춥지는 않았어, 동지들 체온으로/ 산천이 추위에 떨면 투쟁의 함성 더욱 뜨겁게/ 산 너머 가지 위로 초승달 뜨면/ 멀리 고향 생각 밤을 지새우고/ 수많은 동지들 죽어가던 밤/ 분노를 삼키며 울기도 했던/ 나의 청춘을 동지들이여 그대의 투쟁으로 다시 피워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조국 해방의 약속을.”

(다음 편으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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