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속 허헌 선생. 1929년과 1943년 두 차례 옥에 갇혔다. <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3인’이 있었다. 오해하지 마시라. 단순히 세 사람이란 뜻이 아니다.

민중들은 일제강점기 노선의 좌우와 빈천을 막론하고 독립운동가들과 노동자·농민·학생들을 헌신적으로 변호한 조선인 변호사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세 사람을 일컬어 ‘3인’이라 불렀다. 긍‘인’ 허헌, 가‘인’ 김병로, 애산 이‘인’이 그들인데, 세 사람의 호나 이름에 모두 ‘인’자가 들어있어 그리 불렸다고 한다.

그들 중 가장 맏형 격인 허헌은 보성전문 법과를 나와 일본 메이지대학을 졸업한 다음 1908년 1회 변호사 시험에 합격해 사무실을 열었으나,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상심을 이기지 못하고 낙향하고 만다. 그가 다시 일어선 것은 3·1운동으로 구속된 민족대표 33인 등 48명의 변호를 맡으면서부터다. 이 일로 그는 대중들 속에서 일약 유명세를 얻게 되지만 민족·인권 변호사에 만족하지 않고 본격적인 변혁운동가의 길로 나아가게 된다. 1925년 조선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던 그는 이듬해인 1926년 돌연 딸 허정숙과 함께 세계일주에 나선다. 당 조직의 결정이었는지, 아니면 대중과 동떨어진 내부 파벌싸움에 환멸을 느껴서인지는 분명치 않다.

허헌이 세계일주에 나선 까닭은

요즘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당시는 세계일주를 하는 사람도 지극히 드물고 교통편도 배와 열차가 전부였을 때라 그의 행보는 세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1926년 5월부터 근 1년 동안 지구를 한 바퀴 돌아온 그는 잡지 <삼천리>에 세 차례에 걸쳐 자신의 체험과 생각을 연재했다. 과연 허헌이 세계일주에 나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비감한 마음으로 조선을 떠나 도쿄를 거쳐 하와이로 간 그는 동포들과 상봉도 하고 수십 차례에 걸쳐 시국연설도 했다. 그런데 미국 여행에서 파격적인 일이 벌어진다. 샌프란시스코와 할리우드를 거쳐 워싱턴으로 간 그는 당시 미국 대통령 쿨리지와 만나 면담을 하고 미 의회도 돌아본 것이다. 여행기에서 그는 쿨리지에 대한 인상과 미 의회에서 받은 깍듯한 대접을 소개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미주동포들이 면담을 주선했을 수도 있지만 당시 미·일 관계(가쓰라-태프트 밀약)와 조선의 위상으로 봤을 때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허헌은 여행기에서 그 배경에 대해서는 일절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자본주의 국가로 가장 고도의 단계에 이르렀을 뿐더러… 미국에 여러 달 머무른 사이에 이 나라 민중의 기실이라든지 또 노농러시아(勞農露西亞)와 양극단에 있어서 세계의 문화를 풍미하고 있는 ‘아메리카이즘’을 보았는데…”라고 쓴 것으로 보아 자신의 여행이 한가한 ‘유람’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뉴욕에서 대서양을 건너 아일랜드 퀸즈타운에 도착한 그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갓 벗어난 아일랜드 상황에 대해 “자유국이 된 뒤에 신정부의 손으로 부흥사업이 성(盛)히 일어나는 모양으로… 좌왕우래(左往右來)하는 아일랜드인의 얼굴 위에도 희망과 정열의 빛이 떠오르더이다. 나는 이 모양을 보고 잿속에서 날개를 털고 일어나는 ‘불사조’라는 새를 생각하였소이다”라고 적고 있다. 또 그는 1927년 2월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도 참여했다.

이런 과정을 종합해 보면 허헌이 세계여행에 나선 까닭은 ‘조선이 일제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가장 발전된 자본주의나라(제국주의)인 미국을 연구하고, 같은 처지에 있는 식민지 약소민족들과의 연대를 모색하며, 영국에서 해방된 아일랜드를 통해 조선의 미래를 그리고자 했을 것이다.

1년에 걸친 세계일주 직후인 1927년 좌우합작운동의 총아인 신간회 창립에 참여한 그는 1929년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으나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알리기 위한 대회를 준비하던 중 일제에 체포돼 2년여의 옥살이를 하게 된다. 출소 후 허헌은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태평양 전쟁의 전세를 파악하기 위해 단파방송을 청취하다 일제에 발각돼 1943년 다시 옥에 갇히게 되고, 모진 고문과 병마에 시달리다 해방 직전인 1945년 4월 말에야 병보석으로 출감하게 된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남조선노동당 대표로 참석한 허헌이 연설하고 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남조선노동당 대표로 참석한 허헌이 연설하고 있다.

허헌이 북으로 간 까닭은

해방이 되자 허헌은 여운형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부위원장을 맡는다. 그리고 1946년 11월 남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여운형과 좌우합작운동을 펼치면서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와 상종하지 않던 그가 남로당 위원장을 맡은 것은 뜻밖이다.

그러나 남쪽에서 허헌의 활동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군정에 의해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그는 체포와 테러를 피해 1947년 북으로 올라간다. 물론 이듬해 있을 남북제정당사회단체연석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회의에서 그는 김일성·김두봉·박헌영·김구 등과 함께 주석단에 선출됐고, 연석회의 이후 열린 남북지도자협의회에도 남로당 대표로 참여했다. 지도자협의회는 미국과 소련 군대가 철수한 다음 자주적 통일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남북의 지도급 인사들 15명만이 참석한 회의였으니 당시 그의 정치적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연석회의가 끝난 다음 허헌은 김구·김규식·조소앙 등과 달리 남으로 내려오지 않고 북에 남았다. 이미 미군정에 의해 체포령이 내려진 상황인 데다 북쪽에서 보고 듣고 겪은 것이 남쪽과는 너무 달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방 직후 북에 진주한 소련군은 군정을 실시하지 않았고, 인민위원회를 중심으로 철저한 친일파 청산과 토지개혁을 비롯한 제반 민주개혁, 여성권리 향상 등 모든 것이 남쪽과는 달랐다. 거기다 미국에서 유학하다 중국 관내로 넘어가 조선독립동맹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딸 허정숙이 북에 들어와 있었던 것도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북에 정착한 허헌은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등 요직을 맡게 된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김일성종합대학 개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임시 교사가 있던 정주로 가다가 홍수로 물이 불어난 청천강을 건너던 중 자동차가 전복되는 바람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마감하게 된다.

민족주의에서 사회주의까지, 남에서 북으로, 일제강점기에서 해방정국에 이르기까지 허헌의 삶은 잠시의 휴식도 없었지만, 그가 지향한 목표는 오직 하나였다.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통일독립된 조국을 위하여!’

허헌은 흔히 ‘중도좌파’나 ‘진보적 민족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러나 그가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은 것은 ‘공정公正’이었다고 한다. 같은 제목의 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공정은 사회의 생명이니라. 공정이 있어야 사회가 생존하고 공정이 있어야 사회가 진보하나니라.”

요즘 청년들의 화두가 ‘공정’이고, 세상에 대해 가진 가장 큰 불만도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라고 한다. 지역과 활동의 남과 북, 이념의 좌와 우를 떠나 평생을 조국의 독립과 통일된 나라를 세우는 데 혼신을 바친 그의 ‘좌우명’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이유다.

그는 오늘도 평양 인근 신미리 애국열사릉에서 못다 이룬 뜻을 품고 남과 북을 내려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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