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1월2일 조선중앙일보에 실린 최백근의 시 <바다의 아버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는 곡물을 실어 나르던 배고픈 민중들의 시대상을 담았다.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엄동설한 추운 날의 이른 새벽에 / 기적소리 들려오면 울 아버지는 / 조그마한 배타시고 윤선에 가죠 / 쌀가마니 실어내려 열 번 스무 번 / 선창가에 쌀가마니 산과 같아도 / 울 아버지 실어내신 그 쌀이라도 / 오늘 아침 우리 집엔 양식이 없어 / 울 어머니 걱정하며 쌀 꾸려갔죠 / 갈매기 떼 울며 나는 바다 위로 / 저녁노을 빛을 실고 울 아버지는 / 고기 많이 잡아갔고 돌아오셔도 / 오늘 저녁 우리 집엔 파래김치뿐

1934년 1월2일 조선중앙일보(사장 여운형)에 실린 최백근의 시 <바다의 아버지>다.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되는 곡물을 실어 나르던 배고픈 민중들의 시대상을 담았다.

최백근은 1914년 2월20일 광양 태인도에서 태어났다. 태인도는 섬진강 하류에 위치해 수산물이 풍부한 고장이었다. 그가 여섯 살 되던 해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광양에서는 3월27일에 처음 만세운동이 벌어지고 4월2일에는 소년·소녀들이 태극기를 들고 시내를 돌다가 일경에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앞서 그의 조부와 부친은 1910년 경술국치를 전후해 벌어진 항일의병 투쟁에 참여했다. 그는 3·1운동이 벌어진 다음인 1926년에 열 살이 돼서야 하동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광주항일학생운동의 주요 인사로 성장

최백근이 항일운동에 눈을 뜬 것은 1928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이었다. 한·일 학생 간 충돌로 나주역에서 시작된 광주학생운동은 전국 각지로 확산했다. 이때 그도 선배들을 따라 광주 학생시위를 지지하는 반일시위에 참여했으며, 일경에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해 고막이 터지기도 했다. 또 보통학교 6학년인 1931년 3월에는 동맹휴학을 계획하다가 다른 학생 3명과 청년 2명과 함께 잡혀갔는데, 주모자인 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석방됐다. 그는 진주소년원에 갇혀 있다가 8개월 뒤인 11월5일에 출옥했다. 이후에도 그는 수차례 감옥을 들락거리게 된다. 1932년 11월에는 러시아혁명기념일을 앞두고 예비검속을 당했다.(동아일보 1932년 11월9일자) 또 1933년 5월에는 메이데이 행사 관련해서 예비검속됐다.(동아일보 1933년 5월6일자) 그리고 1938년 12월에는 비밀결사 혐의로 체포됐으나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되기도 했다.(동아일보 1938년 12월25일자)

보통학교를 졸업한 최백근은 광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다. 광주고보는 광주학생운동의 중심학교였다. 입학 후 그는 항일운동을 지속했으며, 이를 눈여겨본 학교 선생님이 항일운동을 잘하려면 더 배워야 한다며 일본유학을 권유했다. 그는 선생님의 충고에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야간학부에 들어갔다. 낮에는 신문배달과 노동으로 학비를 벌어가며 공부를 했다. 이 시기 먼저 일본에 와 공부를 하고 있던 광주고보 선배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접하게 됐다. 그러나 곧 일경에 쫓기는 신세가 되고 끝내 학업을 다 마치지 못한 채 귀국하게 됐다.

그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1936년 경성외국어전문학원에 들어간다. 공부를 마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전남지역 항일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였던 ‘전남운동협의회’ 재건 활동에 참여한다. 협의회는 소작료 인하 같은 경제투쟁을 벌이다가 1933년 김홍배·황동윤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단체로 성장했다. 협의회 수칙에는 ‘애국자들이 생명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일제를 쫓아내고 우리 민족의 뜻에 따라 우리 조국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적혀 있었다. 이 단체는 나중에 적색농민조합 건설준비위원회로 바뀌었다. 1934년 3천200여명이 연루된 반일사건으로 558명이 검거되고 57명이 기소됐다.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을 항일운동으로 인정했다.

이 사건이 일어났을 때 최백근은 체포를 피해 전남지역을 벗어나 행상을 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러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중일전쟁을 벌이고 있던 일제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강제징병을 실시했다. 항일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함부로 돌아다닐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리산 입산 길을 선택한다.

좌우합작운동에 참여

서른한 살에 해방을 맞이한 최백근은 여운형의 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공산당(장안파)에 참여한다. 건준은 조선인민공화국을 창건했지만, 좌우 양 진영의 불참으로 큰 힘을 받지 못하고, 미군정에 의해 해산당하고 만다. 또한 장안파 조선공산당 역시 박헌영에 의해 부정당하고 새로운 조선공산당이 창당된다. 이후 최백근은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 참가해 서울시 성동구당 부위원장과 당 중앙위원 겸 총무부 차장이 된다. 또한 좌우합작운동의 하나로 건설된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성동구 준비위원회 총무부장을 맡아 활동했다. 하지만 1947년 7월, 수차례 방북과 열 번의 암살시도에도 포기하지 않고 북의 김일성을 만나 좌우합작운동을 벌이던 여운형이 살해당했다. 김규식마저 독자노선을 택하자 좌우합작운동은 구심점을 잃고 중단되고 만다.

1948년 2월26일 유엔총회에서 ‘유엔의 참관이 가능한 한반도 지역에서의 선거를 통해 조선의 정부를 수립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남북분단이 현실화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김구와 김규식이 분단을 막기 위해 나선다. 이 과정에서 최백근은 여운형의 뒤를 이어 다섯 차례의 방북을 통해 남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다섯 번의 방북

김구와 김규식은 공동명의로 북의 두 지도자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남북요인회담’을 제안했다. 하지만 북에서 이렇다 할 답이 없었다. 3월19일, 최백근은 미군정의 눈을 피해 38선 이북으로 건너간다. ‘남북요인회담’을 촉구하는 근로인민당 최근우·백남운·장건상 등이 연명한 서한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드디어 1948년 3월25일 북로당은 “4월14일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를 평양에서 개최하자”고 평양방송을 통해 발표했다. 북에서 긍정적인 답이 나오자 그때까지 북에 머물던 최백근은 다음날 3월26일 남으로 내려왔다.

남으로 내려온 최백근은 서둘렀다. 우선 3월에 발기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에 참여하고 있는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들을 만나 연석회의에 참여할 것을 종용했다. 미군정과 우익진영의 반대로 김구와 김규식의 월북이 늦춰지고 있었다. 이런 탓에 역사적인 ‘전조선제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는 북로당의 제안보다 6일이 늦은 4월20일 평양에서 개최됐다. 최백근도 근로인민당의 대표 자격으로 두 번째 월북한다. 30일까지 계속된 남북연석회의에는 남북의 56개 정당과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여했다.

성공적인 연석회의 결과에도 남쪽에서 5·10 제헌의원 선거가 강행되고, 북에서도 정권 수립을 위한 절차가 진행됐다. 8월21일부터 황해도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 근로인민당 대표로 뽑혀 다시 북으로 올라갔다. 대회를 마치고 9월 초에 남으로 내려왔다.

그의 염원과 반대로 남북에 각각의 정부가 출범했다. 남쪽 정부가 그가 활동하고 있던 근로인민당을 불법으로 규정하게 되자 남에서는 더 머물 수가 없었다. 그는 1949년 4월 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북에 잔류해 있던 근로인민당원들이 조직한 재북 근로인민당 당무부장이 돼 또다시 북으로 갔다. 그러나 1950년 남쪽의 5·30 선거를 앞두고 선거에 출마한 장건상·김성숙 등 근로인민당 계열 인사들의 당선을 돕기 위해 다시 남하했으며, 결과적으로 2대 국회에서 남북협상파들이 대거 당선됐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그는 9월28일 미군이 서울에 들어오기 전까지 서울에 머물면서 근로인민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다가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북으로 올라갔다. 1952년 12월 지루한 휴전회담이 이어지고 있을 무렵 최백근은 일신의 안위를 위해 북에서만 머무를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남하를 결심하게 된다.

최백근은 남으로 내려오자마자 곧바로 체포된다. 그는 ‘경남지방 근로인민당 재건을 위해 남파된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구속됐다. 최백근은 대구와 춘천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55년 2월14일 만기출옥했다.

4·19 혁명과 사형

1960년 4·19 혁명은 이승만 독재치하에서 숨죽여 살던 그를 다시 사회운동 전면에 나서게 했다. 그해 ‘7·29 민의원 선거’에 ‘혁신동지총연맹’ 후보로 추대돼 고향인 광양에서 출마했다. 당시 그의 동향 후배이자 광양선거 참모로 활동했던 김영옥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고문은 “최백근은 민의원 선거에 대해서 평하기를 ‘우리 같은 상황에서 원내 투쟁을 통해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은 몽상에 지나지 않는다. 조직화된 민중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나의 선거의 목표는 조직화된 대중을 얻는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선거에 패배한 최백근은 혁신계 통합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이에 동의하는 동지들을 모아 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최근우가 준비위원장이 됐고, 자신은 조직부장을 맡았다. 그의 이러한 통합 노력은 1961년 2월에 결성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로 결실을 본다. 민자통은 결성이 되자마자 ‘2·8 한미경제협정 반대투쟁’, ‘2대 악법 반대투쟁’, ‘남북학생회담 성사투쟁’ 같은 민족자주통일운동을 벌여 나갔다.

그러나 4·19 혁명 시기의 노도와 같은 그의 활동은 마지막 남은 목숨을 불태우는 일이 되고 말았다. 박정희는 최백근을 쿠데타 6일 만인 1961년 5월22일에 체포해, 같은해 12월21일에 사형을 집행하고 말았다. 망우리에 묻혔던 그는 이장해 마석모란공원에 안장돼 있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사람이 사람을 억압해서는 안 되고 사람이 사람을 수탈해서도 안 되며 나라가 외세의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하고 분단된 나라가 자주·민주·평화적 방법으로 통일돼야 한다던 선생의 높고 참된 뜻은 이룩되고야 말 것입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