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0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속 벽초 홍명희(洪命熹, 1888~1968) 선생. <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북에서 시종일관 대우받은 홍명희

홍명희(洪命熹, 1888~1968)는 대하소설 <임꺽정>의 작가로서 널리 알려진 유명인사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남한에서 금서였으며,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도 금기시됐다. 1987년 ‘납북(또는 월북) 작가들의 해금조치’ 이후에야 그의 활동과 작품이 공식적으로 허용됐다.

홍명희는 북한에서 내각 부수상,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상무위원, 군사위원회 위원(총 6명), 북한 과학원 초대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초대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부위원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올림픽위원회 위원장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남로당을 비롯해 월북 인사들 상당수가 숙청 등의 곡절을 겪었던 데 비해 홍명희는 “시종일관 일정한 예우와 그에 걸맞은 직책을 수행”했다.

홍명희는 정부 수립을 앞둔 상황에서 남북 모두 탐낼 만한 인물이었다. 북에서도 홍명희 대우에 많은 신경을 썼지만, 남한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월북을 아쉬워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이인은 “해방이 되자 그(벽초)가 저쪽으로 가게 된 것은 우리들의 실책이었다. 계씨 홍성희가 벽초를 이북으로 인도해 갔지만 애석한 일이었다”라고 했다.

‘합방’ 직후 부친의 순직과 유언

홍명희는 1888년 충북 괴산에서 태어났다. 홍명희의 ‘풍산 홍씨’는 조선 후기 10대 벌열에 들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증조부 홍우길은 평안도 관찰사·이조판서 등을 지냈고, 조부 홍승목은 별시 문과 급제 후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1906년 중추원 찬의에 임명됐다. 아버지 홍범식은 소과 급제 후 내부 주사 등을 거쳐 1907년 태인군수, 1909년 금산군수에 임명됐다.

홍명희는 명문 집안 출신이지만 일찍부터 신학문을 접했다. 15세 때인 1902년 서울 중경의숙에 입학해 1905년 졸업했고, 1906년에는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동양상업학교 예과 2학년을 거쳐 대성중학교 3학년에 편입했다. 이때 유학생 이광수·문일평과 어울렸고, 서양과 일본의 근대문학을 비롯한 다양한 분야의 독서에 열중했다. 1910년 2월 졸업을 앞두고 귀국했다. 그는 문예에 탐닉한 나머지 졸업에는 관심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1910년 8월29일 일제의 국권 침탈로 국권을 상실하자 아버지 홍범식은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어 자결했다. 홍범식은 장남 홍명희에게 남긴 유서에서 “너희들은 죽을지언정 친일을 하지 말고 먼 훗날에라도 나를 욕되게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버지의 자결은 홍명희에게 큰 충격을 줬다. 그는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고 실천하려 노력했다. 많은 명망가들이 일제 말기 친일파로 전락했으나 그는 끝까지 지조를 지켰다. 반면 조부 홍승목은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 찬의를 1921년까지 지냈고, 1912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한일병합기념장을 받는 등 친일행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됐다. ‘아픈 가족사’다.

망명과 귀국, 괴산에서 3·1 운동 주도

아버지의 삼년상을 치른 홍명희는 1912년 겨울 만주 안동(단둥)으로 갔다. 1913년에는 정인보와 상해로 가서 박은식·신규식·신채호·김규식·문일평·조소앙 등과 독립운동단체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했다. 1914년 7월 정원택 등과 함께 싱가포르 등 남방지역을 돌아봤고, 1917년 12월 중국으로 돌아왔다가 1918년 7월 귀국해 향리 괴산에 거주했다.

홍명희는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괴산지역 시위운동을 주동했다. 홍명희는 고종이 승하하자 조문을 위해 서울로 갔다가 의병장 출신 한봉수와 함께 손병희를 만났다. 서울서 괴산으로 돌아온 홍명희는 이재성·홍용식·윤명구 등을 규합해 3월19일 괴산 장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홍명희는 장터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 앞에서 ‘독립만세’를 선창하며 시위를 이끌었다.

경찰이 홍명희·이재성·홍용식 등 18명의 주동자를 체포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압수했으나 시위군중은 더욱 늘어나 괴산경찰서로 몰려가 투석하며 체포된 사람들의 석방을 요구했다. 시위는 이튿날 새벽 2시께까지 이어졌다. 괴산의 만세시위는 3월24일에도 일어났다. 이 시위의 주동자는 홍명희의 동생 홍성희였다. 괴산의 만세시위운동에는 홍명희를 비롯해 홍성희·홍태식·홍용식 등 일가친척들이 대거 참가했다. 홍명희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6월을 언도받고 청주형무소에서 복역했다. 동생 홍성희도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사회운동 참여와 언론활동

출옥 후 홍명희는 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갔다. 1924년 5월 동아일보사 취체역(지금의 주식회사 이사) 주필 겸 편집국장에 취임한 홍명희는 민족개량주의 노선과는 거리를 뒀다. 그러나 김성수가 사장이 된 이후 영향력이 축소되자 1925년 4월 동아일보에서 물러났다. 홍명희는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겨 이승복 등 새로운 진용과 함께 시대일보를 민족지로 육성하려 했다. 홍명희의 노력에도 재정난에 봉착한 시대일보는 1926년 8월 휴간하고 말았다. 신문사에서 손을 뗀 홍명희는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1925년 9월15일 서울 돈의동 명월관에서 홍명희를 비롯해 한위건·백관수·백남운·김준연·안재홍·조병옥 등 26명이 참여한 가운데 ‘조선사정연구회’가 결성됐다. 조선사정연구회는 ‘조선의 역사, 민족성 등 조선민족을 연구하고 조선민족의 장점을 살려 민족정신을 높이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홍명희는 이미 사회주의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었다. 홍명희는 1923년 7월 홍증식·구연흠·김찬·김재봉·권오설·안기성·이봉수 등과 신사상연구회를 창립했다. 신사상연구회는 1924년 11월19일 ‘화요회’로 개칭, 종전의 연구단체에서 행동단체로 전환했다. ‘화요회’라는 명칭은 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인 데서 유래됐다. 화요회는 1925년 4월17일 1차 조선공산당 창건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홍명희도 조선공산당에 참여했으나 김철수에 의해 출당됐다. 김철수는 “나는 비밀당원으로 있던 여운형과 홍명희를 제명한 일이 있었다. 이들을 두고 주위에서 많은 공격을 받았다. 나는 그 두 사람이 유능하고 좋은 인물들이지만, 비밀을 지켜 함께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홍명희가 제명된 것은 아마도 1926년 9월부터 12월 사이로 추정되고 있다. 이후 홍명희는 공산주의 운동과는 거리를 두고 활동했다.

신간회 활동과 <임꺽정> 연재

1927년 2월 좌우세력이 함께한 신간회가 조직됐다. 신간회는 한때 전국에 120~150개 지회를 갖고 있었고, 회원수도 2만~4만명이던 일제 강점기 가장 규모가 컸던 민족운동단체였다. 홍명희는 신간회 창립과 활동에 핵심 역할을 했다. 신간회(新幹會)란 명칭은 홍명희가 제안한 “죽은 나무에서 새 가지가 돋는다”(新幹出枯木)에서 유래했다. 이상재와 홍명희를 초대 정·부회장에 선출했으나 그가 굳이 사양해 권동진을 부회장으로 정했다.

홍명희는 1기 조직부 총무간사를 맡아 신간회 활동을 주도하던 중 1929년 12월 민중대회 사건으로 투옥됐다.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인 반일시위로 확대하기 위해 추진한 민중대회 사건으로 간부 40명이 검거됐고, 홍명희를 포함한 11명이 보안법 혐의로 구속됐다. 이 사건으로 간부들이 대거 검거·구속되면서 신간회는 본부와 지회, 좌우익 사이의 갈등 등으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고, 홍명희가 감옥에 있을 때인 1931년 5월16일 해소되고 말았다.

1926년 10월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신간회 운동에 전념하면서 경제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던 홍명희는 안재홍의 권유로 1928년 11월부터 조선일보에 역사소설 <임꺽정>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홍명희는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을 연재했고, ‘의형제편’과 ‘화적편’은 출옥 이후 연재했다. 홍명희가 강조한 ‘신간출고목’을 가능하게 하는 민족협동전선의 실천적 지혜가 의형제편에 반영되고 있다고 강영주 교수는 해석했다. “의형제편은 <임꺽정>이 지닌 사실주의적이자 민중적이며 민족문학적인 특성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부분으로 평가된다. 이는 시대적 한계에 부닥친 작가가 신간회 운동 당시와 같이 민족의식·민중의식의 정치적 실천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그러한 의식을 창작을 통해서나마 구현하고자 혼신의 힘을 기울인 결과다.”(강영주, <벽초 홍명희 연구>)

일제 말기의 은둔과 해방 후 월북

1937년 중일 전쟁 이후 일제의 조선인 명사들에 대한 회유가 노골화됐다. 홍명희는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창동으로 이주해 은둔했다. 이듬해에는 정인보가 이주했다. 1942년 3월 홍명희의 차남 기무와 정인보의 차녀 경완이 혼인을 해 두 사람은 사돈이 됐다. 홍명희가 창동에 은둔했다고 일제의 감시와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장남 홍기문과 함께 며칠씩 예비검속을 당하기도 했고, 학병 권유 강연을 하라고 압박할 때는 이를 피하기 위해 청원군 시골로 도피했다가 돌아오기도 했다. 이광수·최남선과 더불어 “조선의 3대 천재”로 불렸던 홍명희는 두 사람이 변절한 것과는 달리 어려운 시기를 이렇게 버텨 냈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해방 후 홍명희는 좌우 이념대립을 넘어선 통일국가 수립을 염원했고,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다가 북에 남았다. 6·25 전쟁 때 국군이 홍명희의 괴산 집에 남아 있던 가솔들(머슴과 족친)을 학살한 뒤 홍명희에 대한 언급은 금기시됐다. 3·1 만세운동의 주역이었으나 괴산읍에 세워진 기념비에는 한동안 그의 이름이 빠졌다. 1998년에 세운 ‘벽초 홍명희 문학비’는 “빨갱이의 비석을 세울 수 없다”는 우익들의 반발로 부서졌다 세우기를 반복하다가 비문을 수정해 2000년 6월 재건립됐다. 괴산군이 추진한 ‘벽초 (신인)문학상’은 무산됐고, ‘홍명희 문학제’ 또한 괴산에 정착하지 못한 채 전국을 떠돌고 있다. 홍명희가 제대로 된 대접을 받는 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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