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공산당 김천그룹 재건협의회 검거사건을 다룬 1935년 12월24일자 동아일보. 국사편찬위원회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임종업(林鍾業, 1907~1950)은 황태성(5·16 쿠데타 직후 대남밀사), 박상희(박정희 셋째 형)와 함께 경북지역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3인방’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하 경북지역 민족해방운동을 이끈 이 삼총사는 박상희가 1946년 10월 인민항쟁 당시 대구에서 미 군정의 총탄에 맞아 제일 먼저 쓰러졌고 임종업은 그로부터 4년 뒤 한국전쟁 직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무참히 학살당했으며, 황태성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김종필을 만나 평화통일문제를 협의하려다가 붙잡혀 처형됐다. 임종업은 경상북도 김천 출신으로 임업이(林業伊)·임기업(林基業)·임송춘(林松春)이라는 가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부인 황경임(黃庚壬, 1910~1994)은 진명고녀(고등여학교)를 졸업한 여성독립운동가로서 황태성의 여동생이다.

첫 번째 투옥, 6·10 만세운동 주도

임종업은 배재고보 재학 시절에 지금으로 치면 ‘재경경북학우회’ 정도가 될 ‘동향 모임’을 통해 황태성을 만나 친분을 쌓았다. 그는 1924년 9월에 벌어진 ‘배재고보 동맹휴교 사건’을 주도했다가 퇴학처분을 받았다. 1925년 다시 중앙고보 3학년에 편입학해 졸업했다. 임종업은 황태성과 서울청년회에 가입해 같이 활동했다. 중앙고보 재학 시절인 1926년 6·10 만세운동을 주도한다. 임종업은 당일 태극기와 전단을 소지하고 훗날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李鉉相, 1905~1953) 등과 함께 순종의 장례행렬이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전단을 살포했다. 이 사건에서 체포돼 첫 감옥살이를 했다. 1927년 졸업 후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후베이성 우창에 쑨원이 설립한 중산대학 예과에 입학해 수학하다가 1년 뒤 고향 김천으로 돌아온다.

당시 김천에는 황태성이 내려와 조직활동을 하고 있었다. 임종업은 황태성과 같이 3차 조선공산당(ML당)에 가입하고 경북도당을 조직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조선공산당 경북도당 책임위원 및 고려공산청년회 경북책임자를 맡았다. 그리고 신간회·금릉청년회·청년동맹, 김천지역 노농조합 결성과 활동에 관여했다. 하지만 일제가 신간회와 사회주의 계열 항일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자 일경의 감시를 피해 부산으로 내려가 노동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두 번째 투옥, 부산 조선방직 파업 지원

그는 부산에서 조선방직 노동자들의 파업지원을 펴다가 부산경찰서에 검거된다. ‘우리들은 일어섰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하고 그 식민지 착취정책에 반대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격문 200여장을 작성해 배포했다는 혐의였다.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이듬해인 1931년 1월19일에 출옥한다.

감옥생활을 마친 후 임종업은 다시 고향 김천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1931년 12월21일 금릉농우동맹의 백낙도(白樂道, 1900~?)와 대구고보 출신 학생운동가 나정운(羅鼎雲, 1909~?), 김천철육단 위원 김창식 등과 함께 김천에서 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비밀 지하조직 ‘김천그룹’을 만든다. 1928년 코민테른으로부터 3차 조선공산당 지부 승인이 취소된 이후 최초의 지역 전위조직으로 ‘김천그룹’을 결성한 것이다.

김천그룹은 당 재건의 물적 토대를 강화하기 위해 적색농조·적색노조·반제동맹을 조직하려 했다. 그리고 조직화 작업의 일환으로 청년동맹원과 소년회원들이 중심이 돼 공개적인 ‘독서회’를 만들었다. 독서회는 김상호를 책임자로 해서 수십 회의 회합을 통해 공산주의 이론을 공부했다. 또 금릉학원에 30여명을 모아 김천 노동야학을 개설, 공산주의 사상을 확산하려 했다.

세 번째 투옥, 지역 전위조직 ‘김천그룹’

이러한 김천그룹의 조직방법은 1920년대 조선공산당의 조직방식과는 달랐다. 개별 공산주의자들을 모아 조직을 구성하던 과거 방식에서 탈피해 김천지역 대중운동조직들에서 성장한 활동가들을 모아 지역 공산당을 재건하려 한 것이다. 이러한 조직방식은 당내 단결력을 높이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대중조직의 주요 활동가들이 참여한 김천그룹이 결성되자, 김천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의 투쟁 수위가 높아졌다.

1931년 9월 조선운송주식회사 김천출장소 인부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10월 철도 경북선 건설공사 노동자들이 임금인상·노동시간단축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고, 11월에는 인쇄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일으켰다. 이렇게 연이어 파업이 일어나자 일제 경찰은 그 배후에 공산계열의 조직이 개입된 것으로 판단하고 일단 김천에서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는 활동가들을 수배했다.

내사를 마친 일제는 1932년 2월부터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벌인다. 김천소년회 이종원과 김시동이 3월 검거됐고, 곧이어 김창제·나정운·백낙도 등 청년동맹 간부들도 체포됐다. 그러자 ‘김천그룹’의 존재가 발각될 것을 우려한 임종업을 비롯한 지도부는 김천을 떠나 피신했다. 그러나 4월에 임종업과 정동필(鄭東弼)이 서울에서 체포되고, 5월12일 김천노동친목회의 간부 김만규가 검거됐다. 임종업은 1933년 2월 대구지법에서 김창식·나정운·백낙도와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동지 규합을 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이 적용돼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임종업은 복역 중 결핵성 척추염으로 인해 1934년 6월23일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다.

이 시기 일경은 김천그룹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다. 일경이 이 사건을 ‘김천그룹 사건’이 아닌 ‘김천청년동맹원 검거사건’으로 발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4월에 검거된 임종업도 김천청년동맹과 소년회 주요 간부로 발표됐다. ‘김천청년동맹원 검거사건’으로 김천그룹이 김천에서 공산당 재건활동을 계속 이어 가기는 힘들었으나, ‘김천그룹’의 실체를 모르던 일제는 그룹 구성원들을 곧 풀어 줬다. 덕분에 하부조직은 온전히 보전됐다.

네 번째 투옥, 김천그룹재건협의회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김천그룹’을 재건한 이는 황태성이었다. 황태성은 광주학생운동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1933년 1월 석방된 뒤 김천으로 돌아왔다. 1933년 4월 김천읍 금정 ‘사산’에서 열린 재건모임에서 황태성은 “즉각적인 당 재건을 위해 활동했던 김천그룹노선을 지양하고, 우선은 당 재건을 위한 물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대중운동노선을 강화하자”고 설득했다. 그리하여 총책임 및 농민부에는 백낙도를, 운수노동 및 학생부에는 이병일을, 일반노동 청소년 및 여성부는 나정운이 담당하게 했다.

황태성은 ‘김천그룹재건협의회’를 주도했지만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이미 김천에서의 신간회 지회활동과 서울에서의 경성제일고보 동맹휴학, 광주학생운동 개입으로 징역을 살았기 때문이다. 일경은 황태성을 요시찰 관리대상으로 찍어 두고 감시했다. 그는 은밀히 재건협의회 지도부들을 만나 당 재건을 위한 교양과 지도를 해 나갔다. 이렇게 주도면밀한 황태성의 활약으로 김천에서의 당 재건운동이 착실히 진행돼 갈 무렵, 복역 중이던 임종업이 1934년 6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나게 된 것이다.

임종업은 김천그룹 활동의 문제점에 대한 황태성의 지적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김천그룹 재건협의회’에 참여했다. 임종업과 황태성은 경상북도 책임자 박승원을 서울로 보내 중앙의 움직임을 면밀히 파악하도록 했다. 서울에서도 이재유·김삼룡 등이 당 재건활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서울의 적색노동조합에도 참여해 중앙의 당-노동조직들과의 연계를 시도했다.

그러나 일경은 황태성이 1935년 4월 김천소비조합의 주도권을 확보하는 등 공산주의 관련 조직이 확대되는 것을 감지하고 주요 인사 300여명을 구속하면서 ‘김천그룹 재건협의회’의 실체를 파악하게 된다. 임종업은 황태성과 함께 이 사건으로 투옥됐다가 1939년에 가서야 출소하게 된다. 그는 네 번의 투옥으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그러다가 해방되기 한 해 전인 1944년에 건국동맹에 참여했으나 일경의 감시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8·15 해방도 경찰서에 구금돼 있다가 맞이했다.

다섯 번째 투옥, ‘10월 인민항쟁’ 주도

▲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해방이 되자 임종업은 ‘건국준비위원회’ 김천군 인민위원장으로 선출됐고, 그해 11월의 전국인 민위원회 대표자회의에 김천군 대표로 참석했다. 부인 황경임은 경북 여맹에서 활동했다. 이 부부는 ‘10월 인민항쟁’이 일어나자 인민들과 함께 투쟁을 벌였으며, 곧 미 군정에 체포돼 임종업은 5년, 황경임은 3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다만 황경임은 부부가 같이 구속됐다는 점이 고려돼 재심을 거쳐 석방됐다. 김천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임종업은 1948년에 가서야 가석방됐다. 그리고 당시 좌익인사를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결성된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으며, ‘김천군 보도연맹’의 간사장으로 임명됐다.

1949년 말까지 전국의 보도연맹 가입자는 30만여명이었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이승만은 보도연맹원들이 인민군에 부역할 것으로 예단하고, 일체의 사법적 절차 없이 경찰과 극우 서북청년단 등을 동원해 ‘보도연맹’ 관련자들을 집단학살했다. 이 광란의 학살극에서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도 꿋꿋이 맞서 싸웠던 독립운동가 임종업도 어처구니없이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다.

2008년 진실과화해위원회가 발표한 내용을 보면 학살자들은 1950년 7월14일, 임종업을 비롯한 김천군 거주 보도연맹원들을 금릉군 지례면(현 김천시 지례면) 산골짜기로 끌고 가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한 후, 일렬로 세워놓고 총살시키고는 그냥 흙으로 덮어 버렸다고 한다. 이들 외에도 1천200여명의 김천군 보도연맹원들을 ‘구성면 광명리 대뱅이재’와 ‘구성면 송죽리 돌고개’ 등지에서 처형했다. 독립운동가들이 해방된 나라에서 이렇게 떼죽음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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