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가을이라지만, 밖에서 버티는 사람들은 추위를 안다. 두툼한 옷과 모자에 핫팩까지 한겨울 차림이 일상이다. 마지막에 껴입은 노조조끼 등판엔 요구 새긴 등자보를 붙였는데, 색 바라고 실밥 터져 그 싸움 짧지 않았음을 말한다. 국회 앞에, 또 대통령실 앞에 늘어선 비닐 움집이 된바람에 푸드득 운다. 노랗고 빨간 마른 나뭇잎들이 우수수 날려 쌓인다. 그
케이팝데몬헌터스의 영향 때문일까, 이 가을 고궁과 광장과 홍대 거리엔 외국인 관광객이 넘쳐난다. 화장품 가게에도, 동네 전통시장에도, 도심 가까운 산 정상에도 그렇다. 카페에 가방과 랩톱컴퓨터를 두고 자릴 비워도, 늦은 밤, 길을 나서 편의점을 이용하면서도 아무 일이 없었다며, 그들은 한국이 얼마나 안전한 나라인지를 사회관계망서비스에 남겼다. 감탄했다
큰 카메라 들고 완장이라도 찬 듯 으스대며 들이대는 기자 아니라도, 우리는 누구나가 사진을 찍고 영상을 담는다. 편집하고 글을 붙여 담장 없는 온라인 세상에 퍼뜨린다. 정보를 찾고, 가공하고, 소통한다. 틈틈이 논다. 요즘 거기 담긴 인공지능은 말벗이고 비서다. 강력한 생산의 도구다. 뚝딱, 못 하는 게 없어 환호성 터진다. 스마트폰은 과연 요물이다.
여름 장맛비처럼 주룩주룩 오래도 내리던 비 그치고 마침내 눈부신 하늘이 보이는가 싶었는데, 찬바람 쌩쌩 파고든다. 큰마음 먹고 산 재킷은 두어 번도 입지 못하고 장롱행이다. 화들짝 놀란 사람들이 두툼한 겨울 패딩 꺼내 월동 준비를 시작한다. ‘봄 여어름 갈 겨어울’이라고 계절을 부른다. 비 때문인지 무·배추 농사 다 망쳤다는 늙은 엄마는 사과 따러는
종이의 시대가 저물어간다고, 누군가, 누구나가 말한 지가 오래인데, 오늘 국회 곳곳에 종이의 탑이 높다. 국정감사 오랜 풍경이다. 종이 수만 장 분량의 방대한 자료라도 클릭 한 번이면 저 멀리 이국 땅 스마트폰으로 날아가는 시절이지만, 또 한편 종이에 인쇄해 묶은 책자가 그 내용의 신뢰성을 보장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하이브리드랄까. 자격 증명을
온갖 초록의 것들이 무성하게 자라 열매를 달 즈음, 다 자란 사람들은 고향집 찾아 다 늙은 부모 얼굴을 살핀다. 잘 익은 사과와 배를 나누고, 쑥쑥 자라는 아이 재롱에 함께 웃는다. 벼와 콩과 호박과 들깨, 또 지천으로 널린 꽃들까지, 자연 가까운 자리 어디든 빼곡하게 자란 것들은 지난 여름 뜨거운 열기 속 땀 흘린 노동의 결실이다. 지극한 관심의 성과다. 추석, 잘 자란 것들을 담아봤다. 실은 애써 키운 것들이다.
책임을 온전히 묻지 못했으니, 참사는 진행형이다. 위험은 외주화를 넘어 이주화로 치달았다. 터져버린 배터리보다 불안정했던 건, 이윤추구 목적의 불안정 노동 구조였다. 스물셋의 세계가 무너졌다. 언젠가 같은 자리에서 신분증을 내보이며 나도 국민이라고 울며 외쳤던 유가족이 오늘 또 울었다. 달라진 게 없었다. 떠나간 딸은 돌아오지 않았다. 눈물도 멈추지
새로 심은 나무 구불구불 또 앙상한 가지에 꽃처럼, 열매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흔들리던 노란색 분홍색 쪽지가 있다. 기억하겠다고, 꽃 피우겠다고, 일하다 죽는 일을 없애겠다고, 사람들이 꼬불꼬불 손 글씨로 적었다. 참담한 죽음을 잊지 않으려 애쓰는 일은 고된 일이었다. 처음엔 눈물을 쏟았고, 속절없이 쏟아지던 비를 맞았고, 콸콸 솟는 땀에 쫄딱 젖어가며
언젠가 공장에서 밥 짓는 일 했던 엄마는 밤낮으로 일했다. 야간 근무 마치고 돌아와서도 가족들 먹을 밥을 짓고, 학교 보낼 도시락을 싸고, 빨래와 청소를 하느라 쉽사리 쉬질 못했으니, 그건 가혹한 일이었다. 교대조는 끝내 없었다. 학교에서 돌아와 누워 자는 엄마를 흔들어 깨워서는 배고프다, 준비물을 사야 한다고 철없는 막내는 소리 질러가며 보챘다. 겨
거꾸로 본 세상이 어땠니, 까르르 웃는 걸 보니 재밌는 뭔가를 너는 봤구나. 걸을 때마다 삑삑 소리를 내는 신발 신고 너는 국회 본청 계단을 올랐지. 아직은 느린 네 걸음에 맞춰 아빠도 천천히 걸었다. 내내 손을 꼭 잡았다. 아빠 품에 폭 안겨, 너는 지금은 알지 못하는 말들을 많이도 들었다. 속도 경쟁이며, 과로사 같은 것들 말이야. 온 세상이 빨리
총리 올 때보다도 복잡하다고 누가 그랬다. 과연 거기 노동조합총연맹 건물 1층 로비에 기자도, 팻말 든 사람도 전에 비해 넘쳐났다. 고용노동부 장관이 방문하는 날이었다. 의례적인 것이었다지만 의미 있는 일로 여긴 사람이 좁은 자리 오래 지켜 짧은 만남을 기대했다. 시간 늦어 마지막 구간 십여 미터를 뛰어온 장관이 들어섰고, 요청 담은 외침이 줄줄이 따
갑질과 반칙, 또 차별과 위선 따위 일터와 일상에 번진 그 흔한 험한 것들 말고 끼이고 떨어지고, 질식해 퇴근하지 못하는 어느 일상다반사, 그 참담한 이야기 말고 4세 7세 고시며, 초등 의대반 열풍에 높이 쌓인 문제집 속 꼬부랑말과 수학 기호 말고 네 작은 손 잡고 떠난 길에 해질
여름, 땅 위에 모든 게 잘 자랄 때다. 집 옥상 작은 잔디밭과 푸성귀 대충 심어 둔 한 평 텃밭에도 초록 생명력이 맹렬하다. 한 이틀 찾지 않았다고, 이름 모를 풀이 한 뼘씩 자라 거기 빈 땅을 다 덮을 기세다. 허리 굽혀 하나하나 뽑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끝도 없다. 곧 허리가 끊어진다. 땀에 홀딱 젖는다. 정작 공들여 심은 것들은 시들
우리들 일하고 퇴근하는 모든 것들이 쉽지 않은 계절이다. 나날이 뜨겁다. 얼른 집에 가서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선풍기 에어컨 바람 앞에 앉아, 엊그제 큰맘 먹고 주문한 택배 상자를 열어보는 상상은 폭염을 버틸 작은 힘이다. 에어컨 설치·수리 노동자들이 땡볕 아래 특별한 연장근로에 내몰릴 때다. 택배노동자들이 달궈진 아스팔트 위에서 속절없이 젖어갈 철이다. 땅에서 올라오는 복사열에 어질어질하다던 그들 눈에 땀이 들어가 쓰리다. 저 앞이 신기루 보듯 흐릿하다. 좀처럼 바뀌지 않아 사막처럼 척박한 일터 현실이 기어코 사람을 잡는다. 푹푹
연일 푹푹 찐다. 벌써 이렇게 더우면 어쩌냐고, 온몸으로 울던 사진기자들이 그늘도 없는 땡볕에서 푸념을 나눴다.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누가 말했다. 여름 광장 분수처럼 솟아나는 땀이 흘러 눈앞이 흐렸다. 쓰라렸다. 괜히 한숨 내뱉는다. 큰일이다. 폭염주의보 빨간 경보 뜬 날, 조리복 껴입고 계단에 촘촘히 서 있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정수리가 지
여름 광장에 사내아이들이 분수에 뛰어들어 눕고 구르고 소리 지르다 웃었다. 한복 입은 관광객이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연신 사진을 남겼다. 나무 아래 탁자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마시던 사람들이 자주 웃었다. 젊은 연인은 습도 높아 끈적거리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꼭 붙어 분수대 옆을 걸었다. 광장은 평화로웠다. 빨간색 단결투쟁 머리띠 맨 건설노동자들이 그 앞길을 행진했다. 지난 정권의 가혹한 탄압과 일하다 자꾸만 떨어지고 끼이고 깔려 죽는 일터 현실을, 확성기 통해 말했다. 일하고 싶다, 대형 현수막을 펼쳤다. 깃발
발전소에서 일하다 기계에 끼여 죽은 비정규 노동자의 영정을 든 사람들이 용산 전쟁기념관 앞으로 행진했다. 가는 길에 차벽이 없었다. 대통령 비서실장이 나와 요구안을 받았다. 전에 없던 일이다. 흰 국화 들고 눈 붉은 사람들이 길에서 새롭지 않은 얘기를 오래 했다. 언젠가 발전소에서 일하다 죽은 비정규 노동자의 엄마가 맨 앞줄에 앉아 구호를 외쳤다. 새
물감 묻힌 종이를 반으로 접어서 문질러 표현하는 방식이다. 어린 시절 미술시간에 한 번씩 해봤을 테다. 파란색, 빨간색만으로는 밋밋했다. 노란색만도 그렇다. 빨주노초파남보 물감 아낌없이 짜내어 가지각색 무지개를 찍는 아이들이 많았다. 알록달록 번지고 섞인 색상들이 참 예뻤던 기억이 있다. 사진에서도 흔히 쓰는 표현 방식이다. 해질녘 호숫가에 비친 산과 나무는 풍경 사진의 단골 소재였다. 대칭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아름다움이 집중도를 높인다고 한다. 종종 붉은 머리띠 맨 노동자들이 눈 녹은 물 고인 웅덩이를 오체투지로 지나는 장면을 찍
와~ 함성과 함께 그 아래 땅 디딘 사람들 간절한 바람 새긴 현수막을 달고 풍선이 하늘로 오른다. 어라, 바람에 눕는다. 아차차 자꾸만 옆으로 기운다. 연 날리듯 실 끝 잡은 사람들 손만이 위로 솟는다. 높은 자리 농성 100일이라고, 마음 무거운 사람들이 준비한 상징 의식이다. 공기보다 가볍다는 헬륨가스 넣은 풍선이 높이 솟아 농성장 가까이 닿는 상상을 했을 테다. 여느 때처럼 빈틈이 많아 내내 심각한 표정 사람들이 그래도 잠시 웃었다. 풍선을 올리고, 풍등을 띄우고, 전에 없이 커다란 무언가를 펼치고 찢는 일이란, 마음을 잘 보
아침엔 네 발, 점심엔 두 발, 저녁엔 세 발인 것은 무엇이냐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는 모르는 사람이 없다. 아직 두 발로 서 있어 나는 저녁 어둠을 모른다. 하지만 높은 계단을 오를 때, 앉았다가 일어날 때면 그 시간이 아주 멀지만은 않겠구나 싶어 덜컥 걱정이 스민다. 운동하자 그 말이 쉬워 입에 달고 산다. 시작이 참 어려워 나는 그저 뜀박질 운동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