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학중앙연구원

3·1 운동은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뒤 일어난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이다. 무참히 짓밟혔어도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만주나 연해주 지역이 아닌 머나먼 미국 땅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길을 개척한 이가 있다. 바로 박용만이다. 그는 이승만·안창호와 더불어 미주에서 3대 독립운동가의 한사람으로 꼽고 있다. 이승만의 외교론이나 안창호의 준비론과 달리 한평생 무장투쟁의 길을 고수했으며 그들과 결이 다른 삶을 살았다. 박용만은 다분히 무인 기질을 가진 사나이였으며 대륙 스케일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군인의 풍모만 지닌 것은 아니었다. 언론사 주필로서 필봉을 휘둘렀으며 독립운동의 방략을 제시한 이론가이자 사상가였다. 학자나 언론인으로서도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는 인물이었지만 독립운동의 가장 근본적인 길인 무장투쟁의 한길을 꿋꿋이 걸었다.

소년병학교를 설립하다

1909년 6월. 박용만은 망국을 앞두고 미국 네브래스카주 커니시의 한 농장에서 국외 최초 군사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Young Koreans’ Military School)를 설립했다. 첫해 입학생은 13명이었는데 대부분이 10대였지만 50대의 조진찬 같은 이도 있었다. 수학 과정은 3년이었고 여름방학 기간 8주간의 군사훈련을 받는 하계 군사학교 체제로 운영됐다. 이듬해 커니시 인근에 있는 헤이스팅스대학 구내로 군사학교를 옮길 수 있었다. 군사학교는 6년간 존속했는데 폐교된 이유는 1914년 여름에 샌프란시스코 주재 일본 총영사관이 군사학교 정보를 듣고 헤이스팅스대학 학장을 찾아가 항의해 학교에서 더 이상 교정을 빌려주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때는 이미 박용만이 새로운 일을 찾아 하와이로 떠난 후여서 박용만의 부재로 인한 요인도 컸다. 조국과 멀리 떨어진 미국 대륙의 한복판인 네브래스카에 군사학교를 설립한 그의 의도는 무엇이었나? 그의 애초 구상은 소년병학교에서 청소년들을 군사지도자로 육성해 만주나 연해주로 파견할 계획이었던 것 같다. 어떻든 그 계획이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소년병학교에서는 170여명의 학생이 등록해 수학했는데 그들은 미주 한인 사회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국내에 들어와 유한양행을 설립한 기업인 유일한도 소년병학교 출신이었다.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군단 창설

박용만은 하와이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하와이는 5000여명의 교민이 살던 곳으로 최대의 한인 공동체가 형성돼 있는 곳이었다. 1912년 12월 하와이에 도착한 박용만은 교민 사회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한인 자치제도를 정비해 삼권분립체계를 갖춘 지방총회를 하와이 지방정부에서 자치기관으로 인정받고 특별경찰권까지 얻었다. 이렇게 준정부 형태를 띠자 교민들에게 국민의무금제도를 시행해 일종의 납세를 받게 돼 재정 형편도 좋아지게 됐다. 다음 단계로 그의 꿈인 무장력을 키울 군대를 양성하고자 했다. 1914년 6월 대조선국민군단과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를 창설했다. 소년병학교 경험을 살려 더 발전된 형태로 운영됐다. 소년병학교처럼 둔전병제, 즉 농장에서 일을 하면서 군사훈련과 교육을 받는 병농일치 시스템으로 운영했다. 100명으로 시작한 대조선국민군단은 300명으로 확대됐다. 미국식 군사편재로 했으며 사관학교 교재는 28종이었는데 그가 집필한 <군인수지>는 주요 교재로 사용됐다. 1916년 말에는 북간도에서 군사양성을 시도했던 노백린·조용하 등이 합류했다. 그러나 대조선국민군단 활동은 1917년 중단됐는데 이승만 일파와의 내분과 일제의 탄압에다가 농장 수익 감소가 그 원인이 됐다.

그럼 박용만은 어떻게 해서 미국으로 건너가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군대를 육성하고자 했는가? 그의 출생과 성장 과정을 살펴보자.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에서 1881년 음력 7월2일에 태어났다. 몰락한 양반 가문이었지만 집안은 유복했다. 부친의 뜻이었는지 어렸을 때부터 개화지식인이던 숙부와 박희병과 같이 다니며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의 호가 우성(又醒)인 것은 박희병의 호가 성촌(醒村)이었는데 숙부를 닮고 싶어서 호를 ‘또 우’(又)자를 써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그만큼 숙부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이다. 서울에 와서 관립 일어학교에 와서 공부한 것도, 그리고 일본에 유학 가서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2년간 정치학을 공부한 것도 숙부와 동행한 때문이었다.

박용만은 두 번에 걸쳐 투옥됐다. 첫 번째는 일본에서 박영효 등과 교분을 맺고 활빈당에 가입했는데 1901년 3월 귀국 후 활빈당 사건으로 투옥됐으나 숙부와 선교사의 도움으로 수개월 만에 풀려났고 두 번째는 당시 진보적인 청년들이 모인 상동청년회에서 활동했는데 그 영향으로 일본의 황무지 개척권 반대투쟁을 하다가 1904년 9월 옥살이를 하게 됐다. 이때 옥중에서 이승만과 정순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게 됐는데 이름 끝자가 ‘만’으로 끝나 3만으로 불렸다고 한다. 정순만은 이후 미국과 만주·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11년 37세 나이로 사망했다. 박용만은 출옥 후 평남 순천에서 삼촌이 관여한 시무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다가 이승만이 출옥 후 먼저 미국으로 가자 그도 1905년 숙부의 도움으로 도미하게 됐다. 샌프란스시코에 도착해 캘리포니아에서 6개월간 체류하다가 삼촌이 국내에서부터 알고 지냈던 네브래스카 출신 선교사의 소개로 네브래스카 커니주로 이주했다. 삼촌 박희병은 1907년 6월 콜로라도 덴버에서 위암으로 사망했다.

박용만은 앞서 소개한 소년병학교를 운영하면서 그 자신도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는데 1908년 네브래스카 주립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해 4년 과정을 마치고 1912년 8월 졸업했다. 정치학을 공부하면서 독립운동 방략을 연구했고 이후 무형 정부론을 제창하는 이론적 바탕을 마련했다. 또한 대학을 다니면서 ROTC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군사학 이론 습득과 훈련을 통해 이후 소년병학교와 사관학교를 운영하는 데 도움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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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과의 악연

이승만은 박용만보다 6살 연상으로 초기에는 호형호제하며 동지적 관계로 서로 돕고 지냈다. 그런데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박용만이 일구어 놓은 공조직을 자신의 사조직으로 만드느라 분탕질하는 바람에 적대적 관계가 됐다. 이승만은 자신의 재정 남용 문제가 드러나자 이를 피하기 위해 오히려 적반하장식으로 고소를 했다. 이승만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고소 내용은 박용만 패당이 국민군단을 설립해 위험한 배일 행동을 하고 일본 군함 이즈모함(出雲號)이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이를 파괴하려고 음모하고 있는 무리들이라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이니 조치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결국 이는 증거 없음이 드러났다. 이 외에도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등 교민 사회를 분열과 갈등으로 몰아넣었다.

이승만의 이러한 작태에 대해 참다못한 박용만은 1918년 3월19일 장문의 ‘시국소감’이란 글을 발표했는데 그 글에는 “이승만이 국민회 재무직임을 가지고 공금을 잘못 쓴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교정하려는 대의원들을 모함해 경무청에 체포되고 재판받게 한 것은 염치없는 일이다. 더욱이 재판석에서 국민군단의 항일운동이 죄이고 국제평화의 소란을 음모하는 것이니 조처하라고 호소한 것은 우리 동포의 애국정신을 변천시키고 독립운동을 음해하는 악독한 행동이다”고 주장하며 말미에 “후일 학자가 있어서 하와이 한인 사회 실정을 기록하면 보는 자 누구나 책상을 치면서 질책할 것인데 행여나 이것이 우리 민족 장래에 거울이 되기를 바라는 바이다”고 경종을 울리는 글을 남겼다.

이승만이 임시정부 대통령으로 추대되고 그는 외무총장으로 피선됐지만 그는 이승만의 실체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임시정부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다. 끝까지 임시정부와는 다른 노선을 걸었으며 대안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박용만은 언론사 주필로서 날카로운 필봉을 휘날렸다. 그는 1911년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주필을 한 적이 있으며 1912년 하와이에서는 신한국보와 국민보에서도 주필로서 역할을 했다. 신한민보 주필로서 그는 ‘무형국가론’을 주장했는데 일종의 임시정부론이었다. 국가가 성립되려면 국민과 영토와 주권이 있어야 하지만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는 현재 영토는 없으나 국민이 있고 자치권이 있는 무형국가를 먼저 건설하면 국권회복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이러한 이론 바탕 위에서 1912년 2월 대한인국민회의 중앙총회를 열었으며 하와이에서도 이러한 입장에서 조직을 만들었다.

중국과 러시아에서의 활동

하와이에서 사실상 이승만 세력에게 축출당한 박용만은 이후 중국으로 건너가 만주와 연해주 등지를 살펴보고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대를 통일시켜 독립전쟁을 수행하고자 하는 방략을 실천하고자 골몰했다. 여러 가지 시도를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중국이나 러시아에는 동포들이 많이 있었으나 독립운동 진영은 분열돼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적이지 못했다. 그는 끝까지 만주와 내몽골에 둔전병제에 기초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고자 했으며 200만 동포를 기반으로 만주에 또 다른 국가 대조선국을 세우려고 했다. 단재 신채호의 영향도 있었고 고토 회복에 상당한 미련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시점에서 이를 망상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그 당시 정세는 시시각각으로 변하던 때라 꼭 그렇게 치부할 수만은 없다.

석연찮은 죽음

▲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 노세극 4·16 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그런 의지를 갖고 북경에서 결혼도 하고 가정도 꾸리며 활동하던 중 뜻하지 않게 그는 동포의 손에 피살됐다. 47세 한창때였다. 이해명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돈 1천원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언쟁을 벌이다 총질을 했다고 한다. 그전에 그가 조선으로 밀입국한 사실이 있었는데 이를 두고 총독부와 내통설이 불거졌고 일제에 빌붙은 밀정이 아닌가 의심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증거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다. 인간 박용만의 죽음은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사후 그의 묘소는 어디 있는지 알 길이 없으며 후손들도 뿔뿔이 흩어지거나 죽어 찾을 길이 없다. 그는 가장 먼저 군사학교를 설립하고 임시정부 이전에 무형국가를 주장하고 대동단결을 주창한 민족의 선각자였으며 독립운동의 거목이었다. 이승만과 임시정부에 의해 가려진 그의 업적을 재조명하고 그의 사상과 투쟁을 재평가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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