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에 있는 이현상의 후손들. 사진 왼쪽 꽃을 든 여성이 그의 셋째 딸 상진이다. 한국전쟁 당시 어머니, 두 언니와 함께 북으로 간 그는 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일성종합대학을 함께 다녔다고 한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만수대의사당을 찾은 김대중 대통령 일행을 안내했다.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51년 7월10일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이승만 정권은 휴전회담이 개시된 직후인 11월 말부터 대대적인 남부군 토벌작전에 나섰다. 이름하여 ‘쥐잡기작전’. 100여일간 지속된 토벌작전으로 남부군은 7천여명이 죽고 6천여명이 포로로 붙잡히는 궤멸적 타격을 입게 된다. 지리산뿐만이 아니었다. 토벌대가 회문산과 백운산·운장산·내장산·덕유산 등지를 휩쓸고 다니면서 전북도당과 전남도당·경남도당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피해를 수습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6개 도당 전원회의가 열렸다. 남쪽 실정을 무시하고 무리하게 대부대를 편성하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다고 생각하는 도당 위원장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가운데 노동당 중앙정치위원회 명의의 ‘94호 결정서’가 전달됐다. 내용은 휴전에 대비해 남쪽을 5개 지구로 재편하고 여기에 기존 도당 조직을 귀속시키라는 것이다.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와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은 평양의 남로당 지도부가 자신들의 야욕을 위해 비현실적인 지침을 내렸다며 반발했다. 격론 끝에 이현상이 5지구당 위원장, 박영발이 부위원장을 맡는 것으로 절충이 됐지만 박헌영·이승엽과 직접 이어지는 이현상의 권위는 커다란 타격을 받았고, 빨치산의 운명도 내리막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이현상의 죽음과 그의 삶을 둘러싼 논쟁

운명의 시간은 일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다. 1953년 8월26일 지리산 빗점골. 휴전 이후 처음으로 5지구당 회의가 열렸다. 아직 박헌영은 체포되지 않았지만 이승엽·이강국 등이 간첩혐의로 체포돼 조사를 받던 중이라 회의는 남로당 지도부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됐다. “반당분자 박헌영과 이승엽은 종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남반부의 실정을 무시하고 94호 결정서와 111호 결정서를 남발함으로써 무수한 전사를 죽음으로 내몰았고 각 도당의 혁명 역량을 소갈시켰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회의 이후 5지구당은 해체됐고, 이현상은 평당원으로 강등됐다. 새로운 투쟁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경남도당으로 이동하던 길, 그 길이 그에게는 이승에서의 마지막 행군이 됐다.

“1953년 9월17일 이현상 사령관과 헤어졌어요. 다음 날 빗점골에서 울리는 총소리를 들었습니다. 산을 내려가다 너덜바위에서 매복에 걸린 12명의 이현상 부대는 한 명만 생존했지요. 경남에서 일본을 통해 북으로 넘어가려다 희생된 듯합니다. 비보는 삽시간에 산중에 퍼졌고 자수를 권유하는 삐라가 온 산에 뿌려졌어요.”

소년 빨치산 김영승의 증언이다. 이현상의 최후에 대해 당시 서남지구전투경찰사령부 2연대장이던 차일혁의 수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다.

“9월17일, 나는 수색대로 하여금 빗점골 일대의 6개 지점에 매복케 했다. 수색대는 20시께 3~4명의 공비들과 조우해 접전을 벌였으나 공비들은 순식간에 도주하고 전과는 확인할 수 없었다. (…) 18일 상오 11시 김용덕이 지휘하던 수색대로부터 전과 보고가 있었다. (…) 방금 일대를 수색하다가 늙은 공비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 이현상이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백석의 시구처럼 “외롭고, 높고, 쓸쓸한” 죽음이었다. 그의 시신은 ‘빨치산의 종말’을 선전할 목적으로 서울시내에서 2주 동안 전시된 후 다시 지리산으로 돌아오게 된다. 고향 금산에 있던 그의 모친이 “내 아들은 죽지 않았다, 호락호락 맞아 죽을 애가 아니니 꼭 집에 돌아올 것”이라며 인수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시신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돌아온 차일혁은 이현상의 일제하 항일운동 공로와 인간적 품격을 존중해 약식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유격대원 출신 스님에게 독경을 시키고 화장한 유골을 직접 자신의 철모에 M1 소총으로 빻아 섬진강에 뿌린 후 세 발의 권총을 쏘아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친일경찰들이 득세하던 당시 상황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지만, 차일혁이 일제 강점기 조선의용대에서 항일유격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 출신이었기에 가능한 행동이 아니었을까.

▲ 이현상은 1951년 북에서 국기훈장 제1급을 받았고, 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53년 2월에는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8년 이현상은 열사증 000001번을 받아 신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됐다. 1990년 8월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조국통일상을 추서받았다.


북에서 버림받고 남에서 잊힌 비운의 혁명가?

이현상에 대한 남쪽의 평가는 표현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북에서 버림받고 남에서 잊힌 비운의 혁명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부군>을 쓴 이태는 “남과 북의 역사에서 처참하게 말살된 비운의 군상들”로 박헌영과 이승엽, 조일명과 이강국 등과 함께 ‘남부군 영웅’ 이현상을 들고 있다. 심지어 시인 고은조차 <만인보>에서 “남과 북 어디서도 버림받았으나/ 남과 북 어디서나 살아 있는 죽음으로/ 그는 죽어 갔다”고 묘사하고 있다.

과연 그런가? “북에서 버림”받았다는 말은 아마도 박헌영과 이승엽·이강국 등이 ‘간첩사건’ 등으로 처형당하고, 남로당 출신들이 대거 숙청당했다는 ‘사실’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현상이 박헌영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한 경성콤그룹’을 결성했고,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남부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할 때 이승엽의 직접 지시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박헌영·이승엽 등의 ‘간첩행위와 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 행위’가 “한국전쟁 패배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 북로당 지도부가 감행한 부당한 처사”라는 논리다. 과연 그런가? 일단 북한이 한국전쟁을 패배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은 차치하자.

북한에서 발표한 공식자료에 따르면 박헌영의 범죄 사실은 첫째 미제국주의자들을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둘째 남반부 민주 역량 파괴·약화 행위, 셋째 공화국 정권 전복 음모 행위 등이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김남식의 <박헌영 노선 비판>에 자세히 나와 있으니 더 이상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는다. 다만 북에 있을 때 최고검찰소 검사 신분으로 박헌영 공판을 직접 참관했던 유일한 인물인 비전향장기수 김중종(2000년 송환)의 증언(월간 <말> 1991년 5월호)은 들어볼 필요가 있다.

1955년 12월15일, 평양시 창광산공원에 있는 내무성 구락부에는 800여명의 북한 고위급 간부들이 들어찼다. 그들 중에는 남로당 출신들도 많았다. 박헌영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의 혐의를 순순히 시인했으며 이승엽·이강국·이원조 등과의 대질신문도 이뤄졌다. 이틀간의 심리를 마친 후 박헌영은 최후 진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내가 왜 일제 경찰의 앞잡이가 됐는가. 하도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서였다. 해방이 되고는 그것으로 그칠 줄 알았는데 미국이 계속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그것을 뿌리치지 못한 것이 지금에 와서 뼈저리게 후회된다. 내가 과거에 저지른 온갖 매국적 죄악이 인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매국자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경고가 되길 바란다.”

심리가 모두 끝난 후 재판부는 박헌영에게 간첩죄를 적용해 사형을 언도했다. 김중종의 증언에 따르면 사건의 심각성과 조직의 규모, 피해 범위에 비해 실제 처벌을 받은 인물들과 수준은 어이없을 정도로 관대했다고 한다. 사형을 당한 사람이 10여명, 실형을 산 경우도 20여명에 그쳤다고 한다. 이는 친일파 청산의 원칙을 적용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즉,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고위직에서 암약한 자들을 제외하고는 재교육을 통해 복귀시킨다는 것이다. 실제로 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루됐던 사람들도 지방으로 내려가 재교육 과정을 거친 후 60년대까지는 대부분 복권됐다고 한다.

북한 정부는 1951년 남쪽에서 빨치산 투쟁을 하고 있던 그에게 국기훈장 제1급을 수여했다. 이듬해인 1952년에는 자유독립훈장 제1급을, 1953년 2월에는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했다.

이현상이 죽은 지 15년이 지난 1968년, 북한은 평양 신미리에 ‘애국열사릉’을 조성하면서 열사증 000001번을 그에게 수여하고 묘역에 안장(가묘)했다. 1990년 7월 북한 최고인민회의는 “북과 남, 해외에서 민족의 자주권과 자주적 평화통일을 실현하기 위한 위업에 공헌한 애국인사”들에게 수여하기 위해 조국통일상을 제정하고 김구·김규식·조소앙·여운형·김책·강양욱 등과 함께 이현상에게 이 상을 수여했다.

이현상뿐만 아니라 남쪽에서 활동한 빨치산들도 ‘북에서 버림받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북으로 송환된 비전향장기수들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노동당에서는 휴전협정이 시작되기 전에 이미 빨치산을 해산하고 장기적인 지하투쟁을 준비하라는 것, 이를 위해 혐의가 가벼운 사람들은 하산시키고, 지도부들은 백두대간을 타고 월북하거나 일본으로 밀항해 월북하라는 지령을 하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이승엽은 이런 지령을 중간에 가로채거나 정반대로 왜곡해 전달함으로써 남부군이 역량을 보존하고 변화된 상황에 맞게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는 데 결정적 장애를 조성했다는 것이다. 비전향장기수들은 지리산에 있을 때도 의심과 논쟁은 있었으나 박헌영·이승엽의 간첩행위와 남반부 역량의 체계적인 파괴활동 증거는 출소 이후에야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이현상과 빨치산들에게 ‘버림받았다’거나 ‘잊혔다’는 수식어를 붙이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것일 뿐 아니라 대단히 악의적이다. 이는 수십 년간 ‘반공 이데올로기’가 강요한 역사 왜곡이자 운동의 변절자들, 역사의 낙오자들, 패배주의자들이 자신들의 비굴한 처신을 가리기 위한 역겨운 변명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실패한 혁명은 없다, 먼저 죽어 간 혁명가들이 있을 뿐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물론 이현상이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는 말은 아니다. 실수도 있었고 과오도 적지 않았다. 그가 박헌영과 이승엽 등의 ‘미제 간첩행위나 공화국 전복 음모’에 가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해 보이지만 이들의 종파주의적 행위와 좌경맹동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남쪽 실정에 맞는 운동을 전개했더라면 이후 우리 역사는 또 어떻게 바뀌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혁명이든 민족해방혁명이든 노동해방혁명이든 혁명가들은 당대의 과제에 몸과 마음 그리고 넋까지 던질 뿐이다. 그것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오늘에 되살리는 일은 오롯이 후대들의 몫이다. 무수한 사람들의 고통과 희생이 따르겠지만 세상은 한 걸음씩 전진한다는 것이 우리가 역사를 통해, 그리고 스스로의 삶을 통해 터득한 교훈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움직이는 것은 끊임없이 살아나는 민중들이다. 그들 속에서 무수한 혁명가들이 다시 태어난다. 따라서 비록 혁명가는 죽어도 혁명은 계속되는 법이다.

이현상의 호는 화산(火山)이다. 그는 조용한 성품의 사내였지만 한생을 활화산으로 살다 장렬한 불꽃으로 산화했다. 여기 그가 남긴 한시 한 수가 있다. <지리풍운(智異風雲)>. 마치 자신의 삶과 투쟁을 총화한 오도송(悟道頌)처럼 들리는 것은 필자만의 상념일까.

智異山雲當鴻動(지리산운당홍동) 지리산에 풍운 일어 기러기 떼 흩어지니
伏劍千里南走越(복검천리남주월) 남쪽으로 천 리 길, 검을 품고 달려왔네
一念何時非祖國(일념하시비조국) 오직 한 뜻, 한시도 조국을 잊은 적 없고
胸有萬甲心有血(흉유만갑심유혈) 가슴에는 철의 각오, 마음속엔 끓는 피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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