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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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이후 만주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한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한반도 남쪽 태생도 많다. 그러나 해방 이후 분단과 전쟁, 냉전과 갈등의 장기화, 친미·친일·보수세력의 공세와 색깔론으로 조국 독립을 위한 이들의 피어린 발자국이 거의 조명되지 않고 있다. 휴전선 이남에는 자료도 없고 연구도 없고 홍보도 없다. 보훈은 아예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사상과 이념의 차이로 나라를 되찾기 위해 총을 들고 싸우다 숨져 간 역사의 인물들을 이렇게 잔인하게 지워 버려도 되는지 엄중히 묻지 않을 수 없다.

휴전선 이남 태생의 동북항일연군 지휘관들

동북항일연군 지휘관으로는 동북인민혁명군 1군 참모장인 경남 합천 출신 박한종(1911~1935), 동북항일연군 1군 3사 정치위원인 경북 안동 출신 류만희(1917~1940),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 사장 겸 정치위원인 경기 용인 출신 이홍광(1910~1935), 이홍광 전사 이후 1사 사장을 맡은 경북 안동 출신 김한호(1905~1935), 1사 군수부장 겸 당 지부 서기인 서울 출신의 한진(1900~1936), 동북항일연군 3로군 총참모장 겸 3군 군장인 경북 구미 출신의 허형식(1909~1942), 동북항일연군 5군 3사 9연대 정치위원에 이은 2로군 총지휘부 직속 경위대 정치위원인 강신태(1918~1950)와 그의 친동생 3사 8연대 정치위원 강신일(1920~1939), 동북항일연군 6군 1사 정치위원인 경남 밀양 출신 서광해(1907~1938), 6군 4사 정치위원인 경북 의성 출신 오옥광(1909~1938), 11군 정치위원인 경북 예천 출신 김정국(1912~1938) 등이 있다.
일제하 조선공산당(1925~1928) 해체 이후 코민테른의 1국 1당 원칙에 따라 중국공산당에 들어가 지하당 활동을 한 남쪽 출신 간부들은 중공당 만주성위원회 후보위원 겸 북만특위 위원인 경기 양평 출신의 홍남표(1888~1950), 탄원중심현위원회 서기인 경북 의성 출신 배치운(1893~1933), 만주성위 소수민족운동위원회 위원인 경남 산청 출신 진공목(1900~1935), 화룡현위원회 서기인 강원도 양양 출신 김일환(1902~1934), 반석현위원회 조직부장인 울진 출신의 이승우(1907~1933) 등이 있다.
또 동북항일연군과 중공당에 이남 출신 여성 간부들도 여럿 있었다. 중공당 반석중심현위 부녀책임자 겸 동북항일연군 1로군 재봉대 대장인 경북 안동 출신 김노숙(1906~1936), 동북항일연군 4군 부녀책임자·선전처장인 경북 예천 출신 이근숙(1909~1941), 중공당 탕원중심현위 위원·동북항일연군 6군 피복공장 공장장인 경북 청도 출신 배성춘(1902~1938) 등이 그들이다.

상주 빈농의 총명한 아들

동북항일연군의 간부급 인물 아닌 일반대원들 중에는 휴전선 이남 태생으로 만주로 이주해 간 집의 자손들이 더 많을 것이다. 위에 대강 나열한 인물의 생몰년을 보라. 만주 항일무장투쟁에 몸담았던 독립운동가들은 거의 20~30대에 전사했다. 유격전으로 일본 관동군과 위만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개중에는 살아남아 해방을 맞이하고 건당 건군 건국에 동참한 이들도 있다. 그러나 동북항일전쟁에 이어 중국 국공내전의 동북해방전투에서도 살아남았는데, 조국으로 돌아온 이후 동족상잔이자 국제전이었던 한국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이남 출신의 독립운동가가 있다. 그가 바로 해방 후 강건으로 이름을 바꾼 강신태다.
강신태는 1918년 경북 상주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10세 때 부모를 따라 만주 흑룡강성 영안현으로 이주했다. 일제 치하 그 당시에 소작농이라도 입에 풀칠할 수 있었던 전라도 사람들보다 겉보리 농사에 높은 장리에 시달리던 경상도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탈출하듯이 만주로 많이 이동했다. 그런데 조선인 만주 이주의 역사가 말해주듯이, 평안도 함경도 사람들이 먼저 압록강 두만강 건너 조국과 가까운 자리를 거의 차지하고 있었기에 경상도 사람들은 더 북쪽으로 북만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북만주 영안의 아동단-청년단-적위대-유격대 생활

강신태는 북만주 영안현 동경성에서 사립 소학교에 다니면서 1930년에 벌써 아동단에 들어가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2년 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했고 1933년 영안현 팔도하자 적위대를 거쳐 1934년 5월 영안 반일유격대에 입대해 본격적인 무장투쟁의 길에 들어섰다. 입대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의 나이 19세 때인 1936년에 동북항일연군 5군 3사 9연대 정치위원, 1940년 주보중이 이끄는 2로군 총지휘부 직속 경위대 정치위원이 됐다. 1941년 하바롭스크로 이동한 이후 국제연합군(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시절에는 2영 정치위원, 4영 영장을 맡았다.
강신태는 머리가 명석하고 중국어·러시아어를 빠르게 익히고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한문 약자도 자기식으로 만들어 사용할 정도였다고 하니 언어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보인다. 군사적 지식과 안목, 정치 간부로서의 책임성도 매우 높아 최용건·김책·김일성 등 조선인 간부들만이 아니라 중국인·러시아인 간부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책이 1차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석방 후 조선공산당 파쟁꾼들과 결별하고 북만주 영안으로 가서 잠시 교편을 잡고 있을 때 강신태가 소학생이었기에 사제지간이다. 훗날 김책은 “신태는 사립학교 시절에도 수재로 소문났지요. 그 시절에 벌써 ‘삼국연의’를 뜬금으로 외우더라니까요”라고 증언했다.
대국주의, 민족배타주의와 종파주의가 결탁해 동만주에서 사납게 불어 대는 반민생단투쟁의 극좌적 바람에서 벗어나 5군과의 공동투쟁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혁명역량을 발전시키기 위한 1934년 10월 1차, 1935년 6월 2차 북만 원정 중에 주보중 휘하의 강신태를 만났던 김일성도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명석한 두뇌, 군사적 재능, 높은 책임성

“로령 산줄기에 활동기지를 두고 목단강 좌우연안의 산악들과 개활지대들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면서 적들을 맵시 있게 족쳤다. 애젊은 지휘관이었지만 총명한 두뇌와 지칠 줄 모르는 정열을 가지고 있던 그는 전도가 촉망되는 군사지휘관으로 빨리 발전했다.”
“인민들이 고지식하고 소박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몹시 따랐다. 대오를 이끌고 부락들에 들어서면 인민들은 강 정위가 왔다고 열렬히 환영했다. 앞을 다투어 자식들을 부대에 받아 달라고 간청했다. 부대의 기강을 단단히 세워 놓았기 때문에 그의 부하들은 조직성과 규율성도 강했다.”
1939년에는 강신태에게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 그해 봄에 동북항일연군 5군 3사 8연대 정치위원으로 있던 친동생 강신일이, 남편이 희생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전사와 연애관계를 맺고는 처벌이 두려워 대오를 이탈해 8연대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며 항일투쟁을 벌이며 세력을 확대했다. 그러자 평소 인민혁명군의 엄격한 조직성과 규율성을 강조해 오던 강신태는 강신일의 무장을 해제하고 나무에 달아매어 죽게 했다. 가까운 혈육이라도 원칙을 저버리는 인간들은 용서하지 않는 강신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의 군사적인 재능은 1940년 소부대활동 시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매복습격과 열차전복 전투를 특히 잘했다. 일본 장교들만 실은 열차를 요정 낸 적도 있었고 철교·도로·군수창고 파괴전도 능숙하게 지휘해 적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줬다. 마침내 1945년 8월8일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국제연합군(동북항일연군 교도려)이 만주와 조선으로 진격을 시작했다.

중국 국공내전 지원 동북해방작전 지도

강신태는 일본 패망 후 박낙권·최광·김광협·김창봉 등과 함께 조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중국혁명을 돕기 위해 1945년 9월 만주로 파견됐다. 중국 국공내전 종식의 선결과제였던 동북지방의 해방을 위해 조선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연변의 중공당 서기 겸 동북민주연군 길동군구 사령관을 맡았다. 많은 조선인부대를 꾸려 동북해방작전에 참가시켰는데, 조선인의 수가 무려 25만명이나 됐다.
동북항일연군 2로군 지휘부 경위대 정치위원과 대장으로, 국제연합군(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시절의 만주 소부대활동까지 항상 강신태와 함께했던 박낙권은 동북민주연군 길동군구의 연길 경비 1단 단장으로 일했다. 국공내전이 발발하면서 1946년 4월 장춘전투에 동남종대 75단 단장으로 참전했는데, 박낙권은 29세의 젊은 나이로 애석하게 전사했다.
1946년 여름 드디어 강신태는 평양으로 귀국했다. 경북 상주를 떠난 지 18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보안간부 훈련소 2소 소장, 인민군 2사단장을 거쳐 1948년 2월 인민군 총참모장에 올랐다. 그의 나이 만 30세였다. 그해 3월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 9월 건국 이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조선인민군 총참모장으로 있을 때, 휘하에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나 혁명운동의 선배들도 한둘이 아니었으나, 누구나 강건을 어렵게 대했다고 한다. 혁명적 원칙성이 강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만주와 연해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할 때도, 귀국 후 건군 사업에 매진할 때도 자기 고향 상주 이야기를 많이 했다고 한다. 술과 감으로 유명하고 인근 낙동강과 속리산이 아름답다는 얘기를 할 때면 감정을 걷잡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1928년 만주로 이주할 때, 고향 상주에 남의 집 민며느리로 두고 온 누이에 대해서 늘 아프게 회상했다고 전해진다.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고향 땅 못 밟고 고향 지척에서 전사

그러나 운명의 장난일까. 한국전쟁 초반에 인민군대가 낙동강 계선에 진출하고 유엔군 이름의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반전을 시도하기 직전인 1950년 9월8일, 강건은 고향 상주과 멀지 않은 경북 안동에서 지뢰 폭발 사고로 전사했다. 그의 나이 만 32세 때 일이다. 북은 공화국영웅 칭호를 수여하고 제1중앙군관학교를 강건종합군관학교로 명명했으며, 1968년 공화국창건 20돌 때에는 사리원시에 강건의 동상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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