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정 조동호 선생(1892~1954)

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여운형과 평생을 함께한 독립운동

유정(榴亭) 조동호(趙東祜, 1892~1954)는 노론 명문가 출신으로는 보기 드물게도 급진적인 이념 성향을 평생 간직한 채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신한청년당·대한민국임시정부·조선공산당·건국동맹·건국준비위원회·근로인민당·민주주의민족전선 등 여러 정치조직과 단체에서 활약했고 언론인으로도 활동하는 등 폭넓게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조동호는 1892년 충북 청산현 현내면 백운리(지금의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에서 아버지 조명하와 어머니 박빈의 3남2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5세 때부터 유학에 기반을 둔 전통 교육을 받았으나 1905년 향리에 신설된 초등학교에서 3년간 수학했고 1908년 서울로 올라와 경성측량학교에 입학함으로써 근대적인 신교육을 일찍 접했다.

1908년 서울에서 몽양 여운형을 처음 만났는데 그가 본격적인 항일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됐다. 조동호는 여운형보다 여섯 살이 아래였으나 평생을 동지, 막역한 친구로 지내며 고락을 함께했다. 1914년 조동호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할 때 여운형은 “바다에 맹서하니 물고기와 용이 감동하고, 산에 맹서하니 초목이 알도다”라며 조국의 독립투쟁에 몸 바칠 것을 맹세했다.

조동호는 중국 난징(南京)의 진링대학(金陵大學, 지금의 난징대학) 중문학부에 입학, 1917년 졸업한 뒤 상해에서 발간되는 중국어 신문 <중화신보(中華新報)> 기자가 됐다. 이 신문은 위안스카이 등 중국 군벌 통치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고양하는 진보적 언론매체였다. 그해 조동호는 박은식·신규식 등이 1912년에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이사로 참여해 활동했다.

신한청년당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조동호는 1918년 8월 상해에서 여운형·장덕수·김철·선우혁·한진교 등과 함께 청년층 내에서 독립운동 세력을 확장하고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신한청년당을 조직했다. 6인으로 시작한 신한청년당은 1919년 3·1 운동 후에는 150여명으로 확대됐다.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되고 파리강화회담이 결정되자 1919년 1월 신한청년당은 조선의 독립을 국제 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며, 국내외에 밀사를 파견해 독립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기로 했다. 국내에는 선우혁·김철·김순애 등을 파견하고, 일본에는 장덕수를 보냈으며, 만주와 노령지역에는 여운형이 가기로 했다.

여운형은 장덕수를 일본에 파견하며 “각지에서 우리 동포는 독립을 선언하고 운동을 개시할 예정이다. 연이나 일본 관헌은 반드시 이 운동의 진상을 해외에 보도하는 것을 금할 것은 명약관화하므로 귀하는 일본인을 가장하고 동경 및 경성(서울)으로 들어가 운동 정황을 상해 <중화신보> 기자인 조동호에게 통신하기 바란다”고 지시했다. 조동호는 중국에서 상황을 종합하고 각지로 연결했던 것이다.

신한청년당은 파리강화회담과 2·8 독립선언, 3·1 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크게 기여했다. 신한청년당 대표들은 일본 유학생들을 자극해 2·8 독립선언을 추진하도록 했고, 국내의 천도교와 기독교계를 자극해 3·1 운동을 촉진했다. 신한청년당의 여운형·조동호 등은 국내에서 온 현순·최창식 등과 함께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일본, 만주와 노령, 미국 등지에서 온 인사들과 함께 임시의정원을 조직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조동호는 임시의정원 충청도 의원 및 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했고, 여운형은 임시정부 외무차장으로 활동하며 핵심 실무를 담당했다.

조선공산당의 핵심으로 활동

조동호는 임시정부와 관계를 갖는 한편, 1920년 8월 상해에서 조직된 한인사회당 창당에 참여하고 기관지 <올타>를 간행하는 책임을 맡았다. 1921년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로 분열하자 조동호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도를 인정하는 이르쿠츠크파에 가담했다. 조동호는 김만겸·여운형과 함께 1921년 7월 이르쿠츠크파공산당 상해지부 위원이 되었고, 11월에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모스크바로 향했다. 1922년 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서 조동호는 조선 대표로 ‘조선의 경제상황’에 관해 연설했다.

조동호는 1922년 10월에는 한국노병회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한국노병회는 조동호·여운형·김구·조상섭·이유필·최석순·오영선·손정도 등이 본격적인 독립전쟁을 위한 군대 양성과 전비를 조성하려는 목적에서 창립했다. 하지만 조동호는 1923년 12월 조선 국내의 사회주의 운동을 강화한다는 사명을 띠고 귀국했기 때문에 노병회 활동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조동호는 1924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그해 11월 사상단체 화요회에 가담해 국내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에서 활동했다. 1925년 4월17일 서울시내 중국음식점 아서원(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위치)에서 화요회 인물들이 중심이 돼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조동호는 김찬·조봉암과 함께 중앙집행위원 7인과 중앙검사위원 3명을 선정할 전권을 가진 전형위원에 선출됐다. 이어 책임비서 김재봉, 조직부 조동호, 선전부 김찬, 인사부 김약수, 노농부 정운해, 정치경제부 유진희, 조사부 주종건 등을 중앙집행위원으로 하는 조선공산당이 출범해 활동을 시작했다.

1925년 5월 조선공산당 2차 중앙집행위원회는 조동호가 기초한 당 강령과 규약을 심의하고, 코민테른의 승인을 얻기 위해 조동호를 정식대표, 조봉암을 부대표 겸 공청대표로 삼아 모스크바에 파견하기로 했다. 조동호와 조봉암은 1926년 2월17일부터 3월1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집행위원회 6차 확대회의에 조선공산당 대표로 참석해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가입 승인을 이끌어 냈다.

이후 조동호는 상해로 돌아와 조선공산당 해외부 위원, 당기관지 <불꽃>의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1927년 1월 조선공산당을 대표해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단체협의회에 참가해 ‘만주공청’ 그룹의 조선공산당 입당 결정을 이끌어 냈다. 같은해 3월에는 조선공산당의 코민테른 파견 대표자로 모스크바에 파견되는 등 조선공산당의 핵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조동호는 1928년 2월 상해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돼 국내로 압송됐고, 재판에서 징역 4년형을 선고받고 1931년 12월까지 감옥에 수감됐다.

조선건국동맹을 조직하기 위한 나날들

감옥에서 나와 몸을 추스른 조동호는 1932년 3월 사촌동생 조동순의 매제인 충남 갑부 윤희중 등을 만났다. 그는 이들을 설득해 당시 자금난에 허덕이던 <중외일보>를 인수해 <조선중앙일보>로 개칭하고 편집고문으로 취임했으며, 사장에는 막역한 동지 여운형을 추대했다. 하지만 1933년 11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 파견할 유학생들을 비밀리에 선발하는 작업을 진행하던 중 신의주경찰서에 체포돼 2년형을 선고받고 또다시 감옥살이를 해야 했다. 1936년 2월 출옥 후 조동호는 조선중앙일보 편집고문으로 복귀했으나 조선중앙일보는 1936년 8월11일자 손기정 선수 가슴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끝내 폐간되고 말았다. 1937년 6월 조동호는 일제의 눈길도 피하고 생업도 하기 위해 경북 봉화군에 소재한 사금 광산에서 관리인으로 일했다.

1943년 8월10일 형집행정지로 풀려난 여운형을 문병하기 위해 경성요양원에 동지들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여운형·조동호 등은 일제의 패망과 조선 해방이 예견되는 정세에 따라 조선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조직체로 ‘조선민족해방연맹’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조선민족해방연맹은 실질적인 조직체계로 발전하지 않았으나 ‘조선건국동맹’의 출발점이 됐다.

그러나 상황은 만만치 않았다. 이미 1940년 2월부터 ‘조선사상범예방구금령’이 실시되면서 전향 가능성이 없거나 보호관찰이 불가능한 사람은 2년간 예방구금소에 수용할 수 있었고 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그 기간을 연장할 수 있었다. 요시찰 인물들에게는 고등계 형사와 끄나풀, 밀정이 따라붙었고, 전향을 거부한 많은 혁명가들이 예방구금소에 갇혔다.

항일투사들을 찾아내 조직하는 데서는 경험 많고 노련한 조동호의 역할이 빛을 발했다. 조동호는 전국 각지를 다니며 애국자들을 조직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전라도로 갈 때는 무명을 사러 가는 것으로, 함경도로 갈 때는 무명을 팔러 가는 것으로 여행허가를 받아냈다. 때로는 약장사로 위장하기도 했다. 서로 쉽게 속내를 말하지 못하고 조심해야 했던 터라 두 번 세 번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눠야 할 때가 많았다. 일제의 촘촘한 감시망을 뚫고 조동호의 건국동맹 조직사업은 계속됐다.

1944년 8월10일 서울 경운동 삼광의원 현우현의 집에서 여운형·조동호·현우현·황운·김진운·이수복·이석구 등이 모여 조선건국동맹을 정식으로 결성하고 여운형을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건국동맹은 친일분자와 민족반역자를 제외하고 민족적 양심이 있는 모든 사람을 망라해 회사·학교·대중단체·농촌·공장 등에 하부조직을 두기로 했다. 조동호는 내무부 책임자로서 각도 책임자들을 지정, 지방조직 사업을 진행했다. 이와 함께 건국동맹은 청년·농민·노동 등의 부문 조직사업도 했고, 이영선(중국 화북지역)·신국권(상해)·이상백(북경) 등의 해외 연락책임자도 뒀다.

일제 통치하의 만주국 장교로 있던 박승환에게는 군대를 조직해 결정적인 시기에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는 임무가 주어졌고, 건국동맹의 조동호·이석구 등과 화요파 공산주의자그룹의 최원택·이승엽 등으로 군사위원회를 조직해 반일무장봉기 가능성을 타진하고 그를 위한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조동호는 1945년 8월4일 일제의 경기도경찰국에 예비검속돼 감옥에서 해방을 맞이해야 했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조동호는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 조선인민공화국 내무부장 대리, 민주주의민족전선 중앙위원, 근로인민당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나 1947년 7월 평생의 동지였던 여운형이 암살된 이후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낙향했다. 조동호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거목 중 한 명이었으나 해방 후에는 건강 등 여러 사정으로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했고, 1954년 9월 62세를 일기로 향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조동호에게는 2005년 3월1일 뒤늦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서훈됐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