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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100주년 연중기획-독립운동가 열전 <삶과 넋> ⑰] 최근우,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민족통일운동의 부활을 위해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의 조선YMCA 강당. 일본에 유학하고 있던 조선 학생들이 삼삼오오 이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는 조선유학생학우회 총회가 열리기 때문이었지만, 또 다른 이유로 강당 안팎은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이윽고 오후 2시, 학우회장 백관수가 개회를 선언하자마자 최팔용이 “긴급동의!”를 외치며 단상으로 올라가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낭독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한다.”

장내에 있던 일본 경찰들이 고함을 지르며 저지에 나섰지만 피 끓는 조선 청년들의 자주독립 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일본 경찰의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팔용은 계속 사자후를 토해 냈다.

“우리 민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한다면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흘릴 것이며, 영원한 혈전을 불사한다!”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만방에 선포하고 삼천리 방방곡곡과 우리 동포들이 사는 세계 곳곳에서 피 흘리며 독립만세를 외쳤던 3·1 운동. 2·8독립선언은 일본 유학생들이 주축이 돼 3·1 운동에 앞서 제국의 심장부인 일본 도쿄에서 울려 퍼진 장엄한 자주독립선언이었다.

나중에는 친일로 전향했지만 당시만 해도 애국의 넋이 살아 있던 이광수가 작성하고, 최팔용 등 11명의 유학생 대표가 서명했던 2·8 독립선언서에는 우당 최근우(崔謹遇)의 이름도 있다. 2·8 독립선언서 초안은 최근우와 송계백에 의해 국내로 전해져 최남선이 ‘3·1 독립선언서’를 작성할 때도 참고하는 등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제국의 심장부에서 울려 퍼진 조선독립만세!

1897년 12월19일 경기도 개성에서 태어난 최근우는 2·8 독립선언 이후 일제의 탄압을 피해 1919년 4월 중국 상해로 망명해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정 기관지인 <독립신문> 기자로 활동하게 된다.

그는 이때 임정 외교부 차장이던 몽양 여운형을 운명적으로 만나 평생 동지이자 스승으로 모시게 된다. 1919년 11월 하라 다카시 일본 총리의 초청으로 여운형이 도쿄를 방문할 때는 수행원으로 동행했고, 그 과정을 4회에 걸쳐 <독립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최근우를 향한 몽양의 신뢰는 “정의감이 투철하고 일신의 이해에 연연하지 않고 오로지 일에 정열을 기울인다”는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일제의 조선 강점이 하루 이틀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몽양은 최근우와 같은 젊은이들이 선진문물을 배워 훗날 그 재능을 독립운동에 써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에게 유학을 권한다. 이리하여 최근우는 베를린과 파리에서 9년간의 유학생활을 거쳐서, 1928년 귀국해 사회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일본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던 1943년 세 번째로 일본을 방문하고 돌아온 여운형은 조동호(趙東祜)·현우현(玄又玄)·황운(黃雲)·이석구(李錫玖)·김진우(金振宇)·이수목(李秀穆) 등과 함께 ‘건국동맹’을 결성한다.

‘건국동맹’은 불문(不文)·불언(不言)·불명(不名)의 3대 원칙과 ① 각인·각파는 대동단결해 건국일치로 일본제국주의의 모든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② 반추축제국(反樞軸諸國)과 협력해 대일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세력을 박멸할 것 ③ 건설부면에 있어서 일체 시정을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동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의 강령을 내세운 비밀단체였다.

최근우는 여운형의 지시에 따라 만주 화북지부에서 ‘오족협화회’ 부회장이라는 간판을 달고 비밀공작을 맡게 된다. ‘오족협화회’란 만주지역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일본 관동군이 주도해 만든 친일단체로 일본인·한족·조선인·만주족·몽고족의 단합을 목적으로 내세웠다.

최근우의 이런 행보를 두고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훗날 일제의 통치기구 내부에 조선민족 독립운동의 교두보를 세우기 위해 몽양이 파견한 것으로 밝혀졌다.

몽양 여운형과의 운명적 만남

최근우는 해방 직후 몽양이 주도한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총무부장을 맡게 된다. 또 그는 1947년 몽양이 미군정 치하에서 근로인민당을 만들었을 때 부위원장을 맡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만 보더라도 그가 몽양과 얼마나 밀접한 연계를 가지고 활동해 왔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 등과 친일파 세력이 주도하는 단정단선에 반대해 좌우합작과 민족통일전선운동을 펼치던 여운형이 1947년 7월19일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지근(韓智根)에게 암살당하자 최근우의 삶도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몽양이 서거한 뒤에도 그는 몽양의 뜻을 받들어 근로인민당 당수가 됐지만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이에 대한 반대의 뜻으로 정계를 떠난다. 그 후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여러 차례 회유했으나 거절했고, 2·8 독립선언 대표자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유공자로 추천받았으나 이마저도 거절하며 단독정부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최근우는 4·19 혁명이 일어나자 병든 몸을 이끌고 혁신정당의 통합과 민족통일운동의 부활을 위해 생의 마지막 투혼을 불사른다. 사회대중당이 만들어지자 종로에서 민의원 후보에 출마하고, 낙선 후에는 최백근과 함께 사회당창당준비위원회를 출범시킨다. 그리고 자주통일운동에 불을 붙인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결성에 참여한다.

‘민자통’은 1960년 9월3일 발표한 발기문에서 “8·15 광복의 감격과 환희는 일장춘몽같이 스쳐갔으며, 15년간이나 우리는 억압과 빈궁 속에서 허덕였고 동족상잔의 비극까지도 겪어 왔다. 이는 실정의 누적과 민족자주 역량의 결여 등에 기인된 바 크다. 그보다도 더 큰 근인(根因)은 국토가 양단되고 민족이 분열되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지상명령이며 최대의 염원인 통일성업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우리 앞에는 고난과 민족적 치욕만이 더한층 가중될 것이며, 또한 6·25 전쟁과 같은 비극이 다시없으리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를 발의하는 바이니, 전체 정당, 각종 사회단체 및 애국동포들이여, 민족정기에 입각하여 3·1 정신을 회상하면서 민족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가 결정함으로써 통일성업을 전취하자”고 밝혔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도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만다. 쿠데타 세력은 ‘특수범죄처벌에 관한 특별법’을 조작해 그를 구속했을 뿐만 아니라 가족들의 보석 요청을 거부하고 면회조차 금지시켰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최근우가 8월3일 감옥에서 숨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숨겨 오던 쿠데타 세력은 무려 한 달이나 지나서야 동료들이 재판정에서 항의하자 비로소 그의 죽음을 인정한 것이다. 그의 죽음을 책임지거나 이로 인해 처벌받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세월은 흘렀어도 그 정신은 살아 있어

그렇게 무도한 세월이 흐르고, 그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2010년 마침내 진실화해위원회는 구속 당시 구타와 가혹행위가 있었다고 판명하고 “국가는 구타와 가혹행위에 대해 유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이루는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국가의 사과는 없었고, 가족들이 납득할 수 있는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 역사의 시계가 과연 몇 시를 가리키고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2019년은 3·1 독립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다양한 각도에서 인물과 배경, 의미와 영향력이 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3·1 운동의 전주곡이라 할 2·8 독립운동과 그 주역의 한 사람인 최근우에 대해서도 다시금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최근우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견지하고자 했던 뜻은 좌우합작과 혁신정당 통합, 그리고 자주통일운동의 부활이었다.

비록 살아 있는 동안 그 뜻을 실현하지는 못했으나 그의 정신은 오늘 남남갈등을 겪고 있는 우리가 성찰해 봐야 할 귀중한 발자취이며 진보정치의 통합, 남북화해를 위해서도 대단히 소중한 경험이다.

정용일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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