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송암(松菴) 오동진(吳東振) 장군

항일 무장투쟁의 빛나는 별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송암(松菴) 오동진(吳東振) 장군. 1889년 평북 의주군 광평면 청수동에서 태어나 1927년 일경에 체포돼 해방 1년 전인 1944년 공주교도소에서 순국하기까지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던 그의 삶과 행적을 살펴보노라면 저절로 경외심이 들며 숙연해진다.

그는 안창호가 설립한 평양 대성학교 사범과를 나와 고향으로 돌아가 일신학교를 세워 교육운동에 헌신했다. 후에 길림에서 안창호의 시국강연을 주선하기도 한 것을 보면 스승 안창호에 대한 존경심은 일생 지속됐던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안창호의 실력양성론이나 애국계몽운동 차원에 머물지 않고 극렬한 무장투쟁론자로 변신했다.

1919년 3·1 운동을 맞아 의주에서 맹렬히 운동을 벌이다가 경찰이 검거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체포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국경을 넘어갔다. 그가 자리 잡은 곳은 만주 관전현 안자구였다. 이곳을 근거로 1919년 10월에는 군자금을 모금하기 위해 국내로 파견되기도 했으며 1920년에는 광복군총영이라는 독립군 부대의 총영장이 돼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해 나갔다.

오동진이라는 이름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고 대중에게 회자된 계기는 1920년에 국내에 파견된 부대원들이 감행한 국내 진공작전이다. 작전은 동시다발적 테러공격 양상을 띠었다.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게 된 배경에는 1920년 8월14일 미국의회 모리스 의원 등 동양시찰단 일행과 가족 70여명이 서울로 온다는 정보가 있었다. 그들이 와서 시찰하는 중에 조선인들이 일제에 반발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보여 준다면 국제여론이 유리하게 형성돼 독립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었다. 여성 두 명을 포함해 10명의 부대원을 3대로 나눠 파견했는데 안경신이 속한 일행은 안주경찰서의 일제 경찰인 궁동종삼랑(宮東宗三郞)과 친일 경찰 김동균을 사살했으며 평양의 평북경찰서 신축건물을 폭파했다. 정인복 일행은 신의주 철도호텔에 폭탄을 투척해 일부를 파괴했고, 임용일 일행은 선천경찰서를 파괴했다. 일제기관을 파괴하고 일제요인들을 암살하는 성과를 거두자 사회적으로 미치는 영향이 컸다. 이 사건으로 일제는 오동진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됐으며 궐석 재판에 회부해 징역 10년형을 선고했다.

이후에도 오동진의 무장투쟁은 가열하게 진행된다. 1920년 한 해 광복군총영 전투기록을 보면 일본 군경과의 교전이 78차, 일본 주재소 습격이 56개소, 면사무소 및 영림창 소각이 20개소, 일제 경찰 사살이 95명이 이르고 있다.

만주에 근거를 두고 무장력을 기른 다음 국내진공작전을 통해 국권회복을 하겠다는 계획은 오동진뿐만 아니라 당시 만주에서 독립투쟁을 하던 대다수 독립운동가의 생각이기도 했다. 오동진은 이를 실천적으로 수행해 서간도 지역 무장투쟁의 한 축을 형성해 국내 진격으로 일제에 타격을 주고 대중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1921년 6월26일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했다.

광복군총영의 부대는 주로 40~50명의 1개 부대가 국내로 들어와 다시 5~10명으로 분산해 부대별로 유격전을 전개한 후 다시 일정한 장소에 모여 대단위 전투를 수행했다. 광복군총영은 1922년 8월께 대한통의부로 합류하고 뒤이어 정의부가 결성됐는데 오동진은 군사부장 겸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초산경찰서의 추목주재소·외연주재소와 벽동경찰서의 여해주재소·차련관주재소 등을 습격해 일경과 친일 주구들을 제거했다.

일제의 평북경찰부가 기록한 것을 보더라도 연인원 1만4천149명의 부대원을 지휘해 일제 관공서 습격 143회, 일제 관리 살상 149명, 일제 주구인 밀정 등 친일파 처단 765명 등 전과가 적지 않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무장 투쟁으로 인해 그는 백두산 호랑이로 불리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을 보건대 오동진 장군은 홍범도·김좌진 장군처럼 대규모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지만 1920년대 항일 무장투쟁사의 찬연한 별 중의 하나였다.

1920년 상해에서 간행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광복군총영과 오동진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대한광복군총영은 청년연합회와 대한독립단 두 단체가 합쳐져 만들어진 것이다. (…) 김승만·오동진 등이 가산을 기울여 무기를 구입해 마련했다. 내외로 연락해 본부를 만주에, 중앙기관을 서울에 뒀으며, 각 도·군에는 영을, 각 면에는 대를 설치했다. 암살대·방화대를 선봉으로 삼아 일인관리·친일파·매국적을 격살하고, 각 경찰서에 불을 지르고 무기를 탈취해 광복군이 도강하는 날에 일제히 호응해 전국이 일치해 항일전쟁을 개시할 계획을 세웠다.” 광복군총영 약장 3조에 충영을 서울에 두고 각 도·군에 도·군영을 각 요새지에 별영을 둔다고 한 내용을 근거로 책에서는 그렇게 기술한 것 같다. 그러나 전국적 조직을 구축해 총력전을 펼치지는 못했지만 천마산에 근거를 둔 천마별영과 벽파별영을 통해 국내 유격전을 감행했다. 천마별영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를 활동부대로 삼아 활발한 이동 유격전을 전개했는데 광복군총영의 부대원들이 국내로 진입해 전투를 벌일 때 이들과 합세해 전투를 벌였을 뿐만 아니라 임무를 마치고 만주로 돌아가는 부대원들의 안내와 엄호를 담당했다

그의 이름이 알려지자 1925년 10월10일 상해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는 국무위원으로 임명한다고 통보했으나 만주에서의 무장투쟁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상해에 가지 않았다. 그는 이듬해 2월18일에 해직됐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다. 1926년에는 고려혁명당을 조직해 활동했으며 1927년 4월에는 농민호조사의 건립에도 관여했다.
 

▲ 1939년 경성형무소가 작성한 일제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국사편찬위원회>

옥중에서 비타협적인 투쟁

그의 목에 현상금 10만원이 걸리자 옛 동료에서 일본 앞잡이로 변절한 김종원의 밀고로 1927년 12월16일 길장선 흥도진역에서 ‘3대 악질 친일경찰’ 중 한 명인 신의주 고등계 형사 김덕기에게 체포됐다. 일본 경찰은 검거기록 곳곳에서 ‘독립운동 거괴’ 오동진을 검거했다는 사실을 기록해 두고 있다. 그가 체포되자 그를 따르는 부하 몇몇이 그를 탈옥시키기 위해 신의주 감옥에 잠입했다 되레 체포당하기도 한 사실이 있었던 것을 보더라도 독립운동진영에서 그가 존경과 신망을 한 몸에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분파 투쟁이 속출하던 시기 10년 동안 수천여명을 통솔하면서도 한 번도 배척받지 않았다는 감화력의 소유자였다.

체포 후 신의주지방법원은 좀처럼 재판을 열지 않았다. 1929년 말에 겨우 예심이 결정됐으나 이후 1년 넘도록 개정하지 않았다. 5년을 끌은 끝에 1932년 6월24일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그 기간 동안 그가 당한 고통의 세월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재판을 변론한 이인 변호사의 증언에 의하면 재판장이 인정심문을 하려고 이름을 부르자 “이놈 감히 어른의 함자를 함부로 부르느냐”고 불호령을 내리고 “이놈들 심판받아야 할 네놈들이 나를 심판해? 이놈들 이리 내려와서 내 심판을 받아 봐라” 하고 외치면서 비호같이 몸을 날려 재판장에게 돌진해 멱살을 잡기도 했다. 공판이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이후 피고석에 끌려와서는 심문에 일체 응하지 않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일제의 재판을 거부한 그는 옥중에서 1929년 11월11일부터 33일 동안 단식투쟁을 했다.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일제하 악명을 떨친 경성형무소로 이감됐는데 1934년 6월11일부터 48일 동안 단식투쟁을 벌인다. 이 초인적인 단식투쟁에 일본인인 경성형무소장도 그의 정신력에 감복해 그에게만은 먼저 경례를 하며 예를 갖췄다고 한다. 1944년 경성형무소 수감 중 형무소 정신병이라는 기이한 병명을 만들어 내어 공주형무소로 이감시켰다. 당시 공주형무소는 정신질환자들이 수용된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그해 5월20일(12월1일설도 있다) 쓸쓸히 순국했다. 오동진의 옥중투쟁은 해방 후 분단에 맞서 긴 옥살이를 한 수많은 장기수들의 모습이 그대로 오버랩 되는 듯하다.

지금 공주시 금성동 연문광장 앞 공산성 주차장 한편에 그의 추모비가 서 있다.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그의 생애를 아는 사람들은 외로이 서 있는 그의 추모비를 짬을 내서 한번은 찾아 볼 일이다.

남과 북이 모두 기리는 인물

▲ 노세극 4·16안산시민연대 공동대표

대한민국 정부는 오동진의 독립운동 행적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유족을 찾지 못해 아직까지 훈장은 전수되지 못하고 있다. 그에게 아들이 하나 있으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의 애국열사릉에는 그의 묘소가 조성돼 있다. 오동진은 남과 북에서 모두 높이 평가하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인 것이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도 여러 차례 언급되고 있으며 김 주석의 아버지 김형직과 절친한 사이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남과 북의 화합, 독립정신과 민족 정기를 고취하자는 취지에서 남과 북의 학자들이 모여 오동진 장군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열어 보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사족 하나. 오동진을 체포했던 악질 친일 형사 김덕기는 1949년 2월8일 반민특위에 체포돼 사형이 언도됐으나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산하는 바람에 석방됐다. 그러나 석방된 후 정릉 야산에서 산책 중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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