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일제의 주요 감시대상 인물카드에 보이는 이재유의 32세 때 모습. 1936년 12월26일 형사과에서 작성했다.<국사편찬위원회>

김삼룡·이현상·정태식·이관술·이금순·박진홍. 이들은 1939년 박헌영을 앞세워 결성한 경성콤그룹, 해방 후에는 조선공산당(후에 남로당)의 핵심들로 활동했다. 1930년대 이 쟁쟁한 혁명가들을 지하에서 이끈 사람은 이재유였다. 그러나 해방을 1년도 채 안 남긴 1944년 10월26일 청주보호교도소에서 옥사했기에 박헌영·이현상·김삼룡·이관술 등과는 달리 오랫동안 잊힌 존재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90년부터 이재유에 대한 연구 논문들과 단행본·소설 등이 나오면서 알려지게 됐고 지금은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일찍이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이재유는 1920년대 공산당운동에 전혀 참가하지 않았다가 30년대 뒤늦게 활동을 시작했으나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직접적인 실천을 통해, 20년대 중반 이미 지도자적 위치를 확보하고 있던 박헌영보다 강력하고 탁월한 지도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을 정도로 그의 활약은 대단했다.

1930년대 서울서 노동운동 본격 전개

1905년 8월28일 함경북도 삼수군에서 태어난 이재유는 12살 무렵까지 조부에게 한문을 배웠다. 3·1 운동 후 공부를 더 하고 싶은 욕심에 무작정 상경했다. 그는 막노동을 하며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잠시 다녔으나 경제 사정으로 중퇴했다. 1925년 개성에 있는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사회과학연구회를 조직, 동맹휴학을 주동하다 1926년 11월 퇴학당했다.

192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대학 전문부에 학적을 뒀으나 학비 때문에 그만뒀다. 이때 신간회 동경지회·동경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등 본격적으로 사회운동과 노동운동에 발을 들여놓았다. 도쿄에서 생활하는 동안 경시청 등에 70여 차례나 검속될 정도로 맹렬하게 활동했다. 4차 공산당 사건으로 1928년 8월 체포된 그는 3년6개월의 형을 선고받았다.

이재유는 1932년 12월 경성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한 뒤부터 서울과 인천 등지에서 본격적으로 노동운동·혁명운동을 전개했다. 이후 그는 7차례의 탈주와 신출귀몰한 피신술을 펼치며 1936년 12월25일 체포될 때까지 놀라운 활약을 펼쳤다.

노동현장을 기반으로 한 ‘경성 트로이카’

1932년 12월 출옥 후 이재유는 이인행의 집에 머물면서 많은 운동가들을 만났다. 이때 그는 기존 운동방식을 강하게 비판했다. 이론을 앞세운 인텔리들이 노동대중 위에 군림하면서 일방적으로 지도하려는 행태를 비판했고, 만나는 사람마다 직접 노동자가 돼 공장으로 들어가 활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이 살아 있으려면 노동대중에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가들이 직접 공장으로 들어가 노동대중을 조직해야 한다고 봤다. 김삼룡·이성출·변홍대·안병춘 등이 이재유의 지도에 따라 노동현장에 들어가 조직을 만들기 시작했다. 1933년 9월 노동현장을 기반으로 한 ‘경성 트로이카’가 결성되기에 이르렀다.

트로이카는 새로운 조직 방식이었다. 그것은 “각각의 운동자가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개인적으로 접촉하고 대중을 획득해 상당한 그룹이 만들어질 때 비로소 조직을 만든다”는 원리에 기초하고 있었다. 모든 활동가들이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자신과 조직의 운명을 결정하고 그 결정에 따라 실천하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방식이었다. 이는 당시 지배적인 조직 방식이었던 ‘오르그’(organizer)에 의한 중앙 집중의 하향식 조직방식과는 대조적이었다. 민주적 요소는 무시한 채 일방적 하향식의 집중만 강조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조선의 현실에 기초한 주체적 운동노선

이재유의 이런 조직 방식은 운동에 대한 주체적 사고에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코민테른을 비롯한 국제 혁명조직이 식민지 조선의 운동에 대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방침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고 봤다. 그랬기에 국제선의 권위를 내세우는 운동가들에 대해서도 그다지 신임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현실에 기초한 운동방침·운동노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파벌 중심의 기존운동에 비판적이었다. 또한 그는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계급적 사고에 치우치지 않고, 반일투쟁을 위한 전 민중의 참여를 고민했다. 노동운동을 민족해방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바라보고 전체 민중과 함께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노력했다.

‘경성트로이카’는 섬유·화학·금속 등 주요 공장에서 대중의 불만과 요구를 파업으로 이끌어 내고 지역의 연대파업으로 확장하는 노력을 펼쳤다. 1933년 하반기 편창제사·중앙상공회사·소화제사·고려 고무회사·동명고무회사·조선견직·서울고무·종연방직·경성제사·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등 서울의 주요 기업에서 연쇄적으로 파업이 일어난 것은 이재유의 활동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자 일제는 배후 색출에 혈안이 됐다. 이현상·안병춘 등 1차 경성트로이카 사건으로 200여명이 검거되기에 이르렀다. 1934년 1월 이재유가 체포되면서 경성트로이카 운동도 사실상 막을 내렸다.

경성제대 미야케 교수 집에 도피

일제는 체포된 이재유에게 갖은 고문을 다했다. 국제선과 연락해 전국 조직을 결성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 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1934년 3월 어느 날 감시하던 간수가 졸고 있는 틈을 타 이재유는 탈옥을 시도했다. 1차 실패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재차 탈옥을 시도해 성공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이끌고 탈출한 이재유는 경성제대 미야케(三宅) 교수의 집에 숨어들었다. 이재유는 미야케 교수의 집 아래 토굴을 파고 한 달가량 숨어 지냈다. 그러나 1934년 5월17일 경성제대 조수 정태식과 미야케 교수가 검거되면서 더 이상 그곳에 머물 수 없게 됐다. 미야케 교수가 하루 동안 시간을 벌어 줘 이재유는 그 집을 탈출할 수 있었다.

1934년 8월부터 이재유는 경성트로이카에서 활동했던 박진홍과 신당동 아지트에서 동거하면서 조직의 재건에 들어갔다. 그는 박진홍을 통해 동료들과의 연락관계를 재개하는 한편 이관술·박영출 등과 운동 방침을 다시 짜 나갔다. 10월 일제 경찰은 이재유의 활동 단서를 포착, 다수의 운동가를 검거·고문했으나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다. 일제는 체포된 사람들을 모두 석방하고 뒤를 추적하기로 작전을 바꿨다.

1935년 1월4일 이인행이 검거됐고, 그 열흘 뒤 박진홍도 동료를 만나러 갔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이재유는 박진홍 검거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박영출을 신당동 아지트로 보냈으나 잠복 중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박영출은 모진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임신 중이던 박진홍은 이재유의 도피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가혹한 고문을 버텼다. 그해 여름 박진홍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아이를 출산했다. 아이의 이름은 철창에 한이 맺혔다는 의미로 ‘철한’이라고 지었다. 아이는 2년 만에 죽었다.

신출귀몰한 도피와 체포, 그리고 옥사

이재유와 이관술은 농부로 변장해 중랑천 제방에 팸플릿 등 비밀서류를 모두 묻었다. 이들은 삼각산에서 하룻밤을 자고 양주군 노해면 공덕리(지금의 서울 도봉구 창동)에 수재민으로 가장해 정착했다. 일제는 이재유를 잡기 위해 경찰력을 총동원했다. 경성 5개 경찰서 3천여명의 경관을 동원해 시내와 자하문 밖·왕십리·신설리·신당리 일대를 이 잡듯 뒤지고 철도 주변까지 살폈으나 이재유의 흔적은 오리무중이었다.

그 사이 이재유는 농민의 문맹을 깨우치는 농촌지도자로 변신해 주민들의 신망과 존경을 받는 인물이 돼 있었다. 그는 경성재건그룹·트로이카그룹 등에서 활동했던 옛 활동가를 모아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했다. 그는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당 재건 운동을 위한 수단으로 정치신문을 활용했다.

정치신문 <적기> 1~3호를 1936년 10월부터 12월까지 발행·배포했다. 이재유는 <적기>를 통해 노동자들이 쟁취해야 할 목표를 제시했지만 1936년 12월25일 체포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체포소식은 5개월 뒤늦게야 ‘기사가 해금돼’ 보도될 수 있었다.

1937년 5월1일자 조선일보 호외는 “탈주 탈주 탈주 4년간 적색거두 이재유 피포, 신출귀몰! ‘칠종칠금’ 피신술 일당 50명 금일 송국” 등의 큼지막한 제목과 함께 2면에 걸쳐 소설과도 같은 이재유의 흥미진진한 탈출기와 그룹 활동 내용, 검거 경위 등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동아일보·매일신보 등 다른 신문들도 앞다퉈 호외를 뿌렸다.

서거 75주기, 한국 노동운동에 주는 교훈

신문들은 이재유 체포를 “조선공산주의운동 괴멸의 최후진” 등으로 표현했다. 그의 체포로 사실상 조선공산주의운동이 막을 내렸다고 한 것이다. 물론 일제의 시각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그만큼 그의 족적이 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이재유는 체포 후 약 4개월간의 혹독한 고문취조가 끝나고 1937년 4월23일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됐다. 1942년 징역 6년의 형기가 만료됐으나 전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는 청주보호교도소에 다시 수감됐다. 이재유는 고문 후유증과 심한 각기병으로 고생하다 해방을 10개월 앞둔 1944년 10월26일 옥사했다. 그의 나이 40세 때다.

이재유는 오늘날 일제강점기 한국 노동운동의 신화로 남아 있다. 그의 “영웅적 활동은 지하혁명운동 사상 최고의 기록을 우리 민족의 기억에 남겼다”라거나 “당대 최고의 혁명가” “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 등의 찬사를 받고 있다. 이재유 선생 서거 75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넋이 오늘의 한국 노동운동에 주는 교훈을 깊이 되새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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