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20일 오전 서울지하철 영등포역 앞에서 모인 탐방단. <연윤정 기자>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노동운동가였던 이재유가 다시 조명받고 있다. 1930년대 노동자 투쟁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에 나섰던 이재유. 일제는 그를 두려워했고 그를 잡는 데 혈안이 됐으며 그를 잡은 뒤엔 끝내 죽음에 이르게 했다. 이념과 사상을 이유로 오랫동안 역사의 뒤편에 자리했던 이재유는 지금의 한국 노동운동이 나아갈 길에 어떤 시사점을 줄까.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와 소통과혁신연구소는 지난 20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일대에서 ‘이재유 등 1930년대 노동운동가들의 넋을 찾아서’ 주제의 역사탐방에 나섰다. 지하철 1호선 영등포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은 섬유·화학·금속 등 서울지역 주요공장이 위치했던 곳이다. 1930년대 이재유 등이 이끈 경성트로이카가 연대파업을 지원했던 곳이기도 하다.

이날 자리는 세운사 회원과 보건의료노조 조합원 등 18명이 참가했다. 이재유를 비롯한 일제강점기 노동운동사 연구자인 김경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와 <한국노동운동사 100년의 기록>을 펴낸 이원보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이사장도 함께했다. 안내는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장이 맡았다. 정 소장은 백두산 역사평화기행, 한국노동운동 역사탐방을 진행해 왔다.

일제 병참기지화 위해 영등포 일대에 공단 조성

“이 앞쪽 일대가 일제하 공장지대가 있던 곳입니다.”

영등포역 앞 광장에 모인 탐방단은 정성희 소장이 가리킨 곳을 쳐다봤다. 영등포역에서 길 건너편 왼쪽은 신세계백화점이, 오른쪽엔 상점들이 들어서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가 경인선이죠. 영등포역은 인천에서 여기까지 경인선이 연결된 마지막 역이었어요. 나중에 용산까지 연결됐죠.”

정 소장에 따르면 영등포역 일대는 1920년대까지는 논밭, 채소밭 지대였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 뒤 대륙침략을 위한 병참기지로 삼기 위해 이 일대에 공단을 조성했다.

“미리 나눠드린 당시 지도를 보시면요. 저 자리에 경찰서가 있었고, 그 옆에 우체국이 있었어요. 그 뒤엔 우시장이 있었고요.”

‘대경성공장지대약도’란 제목의 지도에는 1930년대 영등포 공장지대가 잘 나타나 있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을 비롯한 그 일대엔 경성방직·종영방직 등 방직회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근처엔 용산공작소도 있었어요. 여기에선 철도차량 부품을 제조해서 용산(차량기지)에서 열차수리를 했죠.”

하지만 100년 가까이 지난 지금 그 일대 공장들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딱 한 곳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일제 때 공장 중 유일하게 남은 곳이 신세계백화점 자리의 경성방직입니다. 사무동이 보존돼 있어요. 이동해 볼까요.”

일제하 공장 중 유일하게 남은 ‘경성방직 사무동’

영등포역에서 길 건너 도착한 경성방직 사무동. 신세계백화점 뒤편에 자리해 있다. 1936년 지은 아치형 입구에 담쟁이덩굴이 감싼 붉은색 1층 벽돌건물이다. 박원순 서울시장 시절인 2004년 12월 대한민국 국가등록문화재 135호로 지정됐다. 경성방직은 지금의 ㈜경방이다.

건물 앞에 놓인 표지판에는 “한국전쟁 때 공장시설은 파괴되거나 소실돼 1952년 공장을 복구해야 했지만 본 건물은 피해를 모면했다. 벽돌조에 목조트러스로 지방가구를 짠 건물로 원형이 잘 유지된 편”이라고 소개돼 있다.

경성방직을 비롯한 서울지역 주요공장은 1930년대 노동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일제강점기 노동자 규모는 늘어났지만 처지는 비참했다.

정성희 소장에 따르면 5명 이상 공장은 1911년 252곳에서 1921년 2천384곳, 1930년 4천261곳으로 크게 늘었다. 대부분은 농림·수산업·광업 등 기초산업과 농산물 약탈과 연관된 식품가공업이나 방직 등 경공업에만 집중 투자했다. 중화학공업이나 기계공업은 미미했다.

공장노동자는 1911년 1만4천명에서 1931년 10만1천명으로 증가했다. 광산·운수·건설까지 합치면 22만명 규모에 이른다. 여성노동자도 전체의 35.3%를 차지했다. 조선인 남자 임금을 1로 본다면 일본인 남자 2.32, 조선인 여자 0.59, 일본인 여자 1.01로 차이가 컸다.

▲ 영등포역 광장 길 건너 신세계백화점 일대. 경성방직 등 일제하 공장지대가 있던 곳이다. <연윤정 기자>
▲ 영등포역 광장 길 건너 신세계백화점 일대. 경성방직 등 일제하 공장지대가 있던 곳이다. <연윤정 기자>

1930년대 엄혹한 시기 노동자 투쟁 이어져

1930년대 노동자 처지는 더 악화했다. 일제는 1931년 9월 만주사변, 1932년 1월 상해사변, 1937년 7월 중일전쟁, 1941년 12월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격을 일으켰다. 1930년 4천261곳에서 1943년 4천856곳으로 공장이 늘었다. 이 중 일제가 한반도를 병참기지화하면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증가했다.

공장노동자는 1930년 10만6천명에서 1936년 20만7천명, 같은 시기 광산노동자는 3만5천명에서 16만1천명으로 늘었다. 1943년엔 공장노동자 54만9천명을 비롯해 광산·토건·운수 등 총 200만명 규모로 추산한다. 노동시간은 하루 12~14시간. 방직공장 여성노동자 노동시간은 15~18시간이나 된다. 임금도 삭감됐다.

일제는 경찰·군대를 증강하고, 언론·출판·결사·집회의 자유를 전면 제한했다. 일제에 저항하면 사상범으로 검거·고문·구속하고, 황국신민이 돼라고 강요했다. 1938년 국가총동원법으로 강제징용하고, 태평양전쟁 이후엔 강제징병했다. 여성은 1944년 여자정신대근무령으로 군수공장과 일본군 성노예로 보내졌다.

이런 엄혹했던 시기에 노동자는 투쟁했다. 1930~1934년 5년간 노동자 투쟁건수는 891건, 7만7천명이 참가했다. 파업과 태업, 시위, 공장점거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1933년 편창제사·중앙상공회사·소화제사·고려고무회사·동명고무회사·조선견직·서울고무·종연방직·경성제사·용산공작소 영등포공장 등 서울의 주요 기업에서 연쇄적으로 파업이 일어났다. 이재유와 경성트로이카와 깊은 연관이 있다.

일제 떨게 한 ‘신출귀몰’ 이재유, 해방 1년 전 옥사

김경일 명예교수는 그가 펴낸 <이재유, 나의 시대 나의 혁명> 개정판에서 “한국 근대사에서 1920~1930년대는 반세기 정도를 사이에 둔 1980~1999년대와 비슷한 격동의 시기였다”며 “1929년 원산총파업이나 1930년 평양 고무공장 총파업에서 보듯이 일본인 식민지배에 반대하고 식민지 민중해방을 지향하는 대중운동이 폭발적으로 고양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진보적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이 주도하는 비합법의 혁명적 노동·농민운동으로 이행했다”며 “‘당대 최고의 혁명가’ 혹은 ‘1930년대 좌익운동의 신화’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이재유는 이런 흐름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주도함으로써 이 시기의 상징이 됐다”고 소개했다.

1905년 함경남도 삼수에서 출생한 이재유는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에 참여, 공산주의 운동가로 성장했다. 1928년 4차 조선공산당사건으로 체포돼 조선으로 호송된 뒤 3년6개월간 수형생활을 했다. 1933년 출소해 이현상·김삼룡·정태식과 ‘경성트로이카’라는 공산주의 비밀결사를 결성했다. 일제 폭압 속에서 경성재건그룹과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조직하는 등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했다.

1934년 경찰에 체포됐다가 탈출에 성공한 뒤 은신과 변장술로 번번이 검거망을 뚫어 신문 지상에서 ‘신화적 인물’로 보도되기도 됐다. 이재유는 1936년 12월 체포돼 6년형을 마쳤지만 전향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청주보호교도소로 이감돼 해방 1년 전인 1944년 10월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이재유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 신세계백화점 뒤편에 자리한 옛 경성방직 사무동 건물. <연윤정 기자>
▲ 신세계백화점 뒤편에 자리한 옛 경성방직 사무동 건물. <연윤정 기자>

“노동현장 들어가 노동자 중심 아래로부터 조직”

김경일 명예교수는 이날 경성방직 사무동 앞에서 “책과 자료로만 보던 것을 직접 와서 보니 신기하기도 하고 더 (마음에) 다가온다”며 “당시 경성방직이나 용산공작소 등은 이 일대에서 이재유 그룹이 활동했던 대표적인 사업소”라고 소개했다.

김 명예교수에 따르면 이재유 그룹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시기는 1933~1935년이다. 영등포와 용산, 동대문 공장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는 20년대와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일제가 노조를 탄압하면서 노동운동은 지하로 내려갑니다. 그 운동을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라고 합니다.”

일제강점기 사회주의·공산주의는 항일독립운동으로서 지대한 역할을 했음을 강조했다. 김 명예교수는 “우리는 불행하게도 민족주의 흐름이 개량주의·매판자본으로서 일제에 편승했다”며 “남은 게 사회주의·공산주의인 상태에서 일본 식민통치에 위협이 되는 노동운동은 동시에 민족해방운동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혁명적 노조운동에서도 코민테른·프로핀테른·태평양노동조합 등 국제선과 이재유 그룹은 운동노선에서 차이를 보였다. 위로부터 조직을 만들어 노동자를 지도한다는 국제선 조직은 일제에 의해 매번 깨지면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재유는 노동현장의 기반을 먼저 갖춘 뒤 조선공산당을 재건한다는 혁명적 노조운동 노선을 제시한다.

김 명예교수는 “이재유는 지도자 몇 명이 위에서 조직을 만들어 노동자를 포섭하는 방식이 아닌 직접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 중심으로 먼저 조직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아래로부터 혁명적 노조를 만드는 방식으로 조직했다”고 밝혔다.

분단 이후 반공주의·국가보안법 속 잊힌 존재로

탐방단은 다시 이동했다. 이번엔 영등포역 뒤편. 거기에는 1933년 들어선 기린맥주와 조선맥주가 있던 곳이다. 해방되고 일본이 철수한 뒤 기린맥주는 오비맥주로, 조선맥주는 크라운맥주로 상호를 변경했다. 크라운맥주는 1998년 하이트맥주로 사명을 바꾼다. 2011년에는 진로와 하이트맥주가 하이트진로로 사명을 통합했다.

옛 기린맥주가 있던 곳인 지금의 영등포공원에는 ‘오비맥주 주식회사 공장터’라는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표지판에는 “오비맥주 영등포공장이 1997년 이천으로 이전하면서 서울시가 영등포공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다시 1930년대 이재유와 노동운동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김경일 명예교수는 “이 시기 (사회주의·공산주의) 운동가들은 급진적이어서 민족운동으로서 생각을 안 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하지만 이재유는 혁명운동을 하더라도 조선을 위한 혁명운동이라며 (민족문제에) 민감하게 생각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우리 운동사에서 이재유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분단 이후 반공이데올로기와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작동하는 가운데 일제하 목숨을 내놓고 헌신적으로 민족해방운동을 했던 이들이 사상과 이념의 문제로 오랫동안 역사의 뒤편에 묻혀 있었다.

이원보 이사장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사 흐름에서 투쟁을 중심으로 기술하다 보니 사람이 잘 나타나지 않는 특징이 있다”며 “이것이 극복되려면 사람과 사건(투쟁)을 변증법적으로 잘 융합해서 설명해야만 운동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영등포공원 안에 있는 옛 오비맥주 공장터. 일제강점기 설립된 기린맥주 후신이다. <연윤정 기자>
▲ 영등포공원 안에 있는 옛 오비맥주 공장터. 일제강점기 설립된 기린맥주 후신이다. <연윤정 기자>

 

“이재유가 살았더라면”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준) 준비

이재유가 살았더라면. 이날 탐방과정에서 공통적으로 나온 질문이다. 그가 살았더라면 해방정국에서 크게 역할을 하며 지형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가정이다. 정성희 소장은 “이재유는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결합해서 자주적 혁명노선을 견지했다”며 “그가 살았다면 박헌영 같은 경우는 비교도 안 됐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경일 명예교수도 “이재유는 노동운동을 통해 달성하려고 했던 세계관이나 운동방식, 노동자에 대한 자세가 당시 운동가들에 비해 특이한 점이 있다”며 “그분이 (해방 이후까지) 살았더라면 양상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점 때문일까. 일제에 맞서 민족문제와 계급문제를 안고 노동운동을 펼쳤던 이재유는 그의 사후 78년이 지난 지금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고 있다. 김금수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상임고문 등을 중심으로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준비위원회’가 준비되고 있다. 오늘날 노동·사회운동가들이 이재유로부터 민족과 계급, 미래전략 과제를 찾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날 탐방에 참여한 최승회 세계노동운동사연구회 이사장은 “이재유의 활동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노동자 몫”이라며 “올해 10월26일 이재유선생기념사업회 준비위 발족을 준비하고 있다. 노동자가 그 중심이 돼야 한다. 관심을 가져 달라”고 말했다.

글·사진=연윤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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