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이철부와 장수암 부부(1936년 천진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29인이 애초 독립선언식 장소 대신 서울 인사동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독립통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전달하고 한용운의 독립선언서 낭독, 만세삼창 후 경찰에 스스로 체포됐다. 투쟁기조가 ‘비폭력 저항’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오후 2시 민족대표들을 기다리던 학생과 시민 5천여명 앞 팔각정 연단에서 누군가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하는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이로부터 3·1 만세운동이 시작됐고 전국 각 지역으로 들불처럼 확산됐다.

1919년 탑골공원에서 기미독립선언서 낭독

탑골공원 독립선언서 낭독자를 두고 논란이 많았다. 그간 경신학교 출신의 해주 감리교 전도사였던 정재용이라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최근 한일 역사학자 10명이 5년간 3·1 운동 공동연구 결과, 1919년 경성지방법원 판결문 분석과 일제 순사들의 증언, 또 불교학림(동국대 전신) 학생신분으로 탑골공원에 직접 참석해 목격한 독립운동가 운암 김성숙의 생전 인터뷰 내용을 근거로 경성의전(서울의대 전신) 학생대표 한위건이 그 당사자라는 것이다. 3·1 운동 준비정황과 탑골공원 목격자 증언 등을 종합해 볼 때, 정재용보다 한위건(韓偉健)이 훨씬 유력한 건 사실이다.

한위건은 1896년 함경남도 홍원군 용원면 동촌리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평북 정주 오산학교(五山學校)를 졸업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학생대표로 3·1 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1월부터 각 전문학교 학생대표로 지도부를 구성하고 종교계와 연대·연합을 추진했다. 한위건은 보성전문의 강기덕, 연희전문의 김원벽과 함께 학생운동의 삼총사로 활약했는데, 1919년 3월5일 서울의 2차 만세시위도 이들이 주도했다. 특히 경성의전은 3·1 운동과 관련한 구금자가 조선인 학생 141명 중 32명으로 가장 많았고, 퇴학자가 79명이나 됐다. 우수한 인재들이 인술을 베풀기 위한 의학에의 열정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과 민족차별에 대한 분노와 민족해방운동을 향한 의지가 들끓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3·1 운동 후 일제의 지명수배를 받던 한위건은 서울의 비밀결사 조선민족대동단에 가입해 활동하다 중국 상해로 망명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내무위원, 임시의정원 함경도의원으로 활동할 때 이승만이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조선을 ‘위임통치’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자 강력히 비판했다. 일제 내각이 조선독립 운동자를 포섭하기 위해 초청하고 임시정부 안창호 국무총리가 일제강점의 부당성을 폭로하기 위해 파견한 여운형의 일본 방문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했다. 그 후 같은 입장의 신채호가 발간한 상해 주간신문 <신대한(新大韓)>에 참여하기도 했다.

상해 임시정부부터 신간회까지

1920년 잠시 귀국한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에서 정치경제학을 공부했다. 일본 유학 당시 조선유학생학우회 총무, 조선기독교청년회 이사를 지내면서 국내 순회강연도 다니고 독립군 자금 모집 사건으로 일시 검거된 적도 있다. 1921년 11월 미국·일본 등 열강의 나눠 먹기 질서재편을 위한 국제회담, ‘워싱턴회의’에 맞춰 조선유학생회 주최로 만세시위운동을 시도했다. 또 1924년 1월 이광수가 동아일보에 일제가 허용한 범위의 합법적 정치결사를 주장하는 ‘민족적 경륜’을 게재하자, 재동경조선인대회 명의로 동아일보사의 사죄와 논설 취소를 요구하기도 했다.

1924년 귀국한 한위건은 시대일보를 거쳐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면서 조선사정연구회 등 단체에 가입해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사회주의사상을 실천하기 위해 1926년 11월 좌파연합체인 정우회(正友會)에 가입하고 안광천과 함께 비타협적 민족주의세력과의 연합을 강조한 ‘정우회선언’을 발표했다. 한위건은 1927년 초 신간회 발기에 참가해 그해 2월15일 창립총회에서 간사로 선정됐는데, 신간회는 창립 이후 불과 10개월 만에 전국 100개 지회와 2만여명의 회원이 가입할 정도로 급성장했다. 동시에 그는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전부장을 맡았고 1928년 2월 조선공산당 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임됐다. 그러나 3차 조선공산당사건(ML당 사건)으로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이 이뤄지자 검거망을 피해 중국으로 다시 망명했다.

2차 중국 망명, 아내의 죽음, 김산과의 갈등

한위건은 1925년 가을 이덕요와 결혼했다. 함흥 자혜의원 간호원-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으로 근우회 집행위원이던 그는 미모의 여의사·페미니스트·사회주의자로 불렸다. 같이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 이덕요가 총독부의원 의사로, 한위건이 동아일보 기자로 있을 때였다. 조그만 셋집에서 살림을 시작했지만 서로 이해하고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덕요는 수필에서 이성의 전적인 사랑을 받은 후에야 사람은 비로소 참다운 삶을 맛볼 수 있다고 썼다. 그러나 그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28년 3월 남편이 중국으로 망명했기 때문이다. 이덕요도 1931년 5월 마침내 중국 망명을 결행했다. 남편과 나란히 반일혁명운동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덕요의 망명생활은 길지 못했는데, 북경에 도착한 지 얼마 안돼 몹쓸 병으로 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한위건은 사별한 아내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위건은 상해와 북경을 오가며 당 기관지 <계급투쟁>을 발간해 당 재건운동과 항일투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는 동시에 이철부(李鐵夫)라는 중국이름으로 바꾸고 1928년 봄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이후 북평 반제대동맹 내 당 세포 서기, 천진 반제대동맹 책임자, 하북성 당위원회 선전부장을 맡았다. 1931년 9·18 사변 이후 일제는 동북 3성에 열하·내몽골까지 점령하는데도 장개석 국민당은 매국정책으로 중국공산당을 탄압했다. 북경 천진의 당 지하조직이 많이 파괴됐다. 다부산자를 입고 도수 높은 안경을 낀 이철부는 학구적인 모습으로 적의 눈을 피해 가면서 지하투쟁을 전개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이철부(본명 한위건)와 <아리랑>의 김산(본명 장지락)의 가슴 아픈 갈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산이 조선공산당 붕괴에 이철부의 책임이 크다고 비판하면서 서로 대립하게 됐는데, 이철부는 일제 경찰에게 풀려난 김산을 간첩으로 지목해 갈등이 격화됐다고 한다. 그 후 김산이 이철부를 찾아가 단도를 옆에 놓고 5분 내 둘 중 하나는 죽는다고 하자, 이철부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이 자리에서 서로 진실과 화해에 접근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중국공산당 중앙의 좌경노선 비판

1933년 중공당 중앙의 왕명 좌경노선을 간파한 이철부는 하북성위에 의견서를 제출하고 “현재 당 지도자들에 의해서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므로 하루속히 7차 당대회를 열고 우리 당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북성 당위원회는 이를 보고했으나 좌경의 당 중앙은 이철부를 우경 취소주의라는 모자를 씌워 직위해제했다. 그해 이철부는 북경에서 회의 중 체포돼 남경감옥으로 이송됐는데, 당 조직과 조선혁명가들이 갖은 방법을 동원해 보석으로 석방시키는 일도 있었다.

출옥 후 이철부는 천진에 거처를 잡았다. 당 조직은 그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해 장수암이란 여성 당원을 파견해 돌보게 했다. 장수암은 북평 향산 자유원을 거쳐 천진 남개중학교 교원, 천진시 문화총동맹 당 세포 서기를 맡아 진보적 문화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철부와 장수암은 부부로 위장하고 영국 조계지인 소백루 부근에 공산당 지하연락소를 만들어 활동했다. 그러다가 사랑하게 되고 당의 승인을 얻어 진짜 부부가 됐다.

이철부는 ‘당내 문제에 관한 몇 가지 의견’ ‘당면 조직정돈에 관한 몇 가지 의견’ ‘관료주의의 엄중성에 대하여’ ‘좌경 기회주의 반동성’ 등 10편의 글을 썼다. 왕명·박고 등의 당 중앙은 이철부의 정확한 주장을 ‘투항주의’ ‘철부노선’으로 규정하고 하북성 당위원회의 당 내 투쟁을 지시해 이철부를 당에서 축출했다. 당적까지 취소되자 매우 실망했으나 장수암이 ‘광명을 내다보고 요귀를 쫓는다’는 구호를 써 붙이고 고무해 줬다. 국민당 반동과 일본 밀정들이 노리는 환경 속에서 당 조직의 지원도 없이 천진 각계층 구국회 등을 조직하고 옥중 동지들을 구출하는 사업을 계속했다.

모택동과 이철부

1935년 일제가 이른바 ‘기동방공자치정부’를 세우고 국민당 정부에 ‘화북정권 특수화’를 강박할 때 중국공산당 중앙이 8·1 선언으로 일제에 항거하고 나라를 구하자고 호소했다. 이에 호응해 12월9일 북경의 6천여명 애국학생들이 거리에서 일제 타도, 내전 중지, 국민당 타협정책 반대를 외쳤다. 같은해 12월12일 상해·남경·무한·광주에서 학생시위가 벌어졌다. 12월18일 천진에서는 이철부와 장수암이 앞장서 학생과 시민 1만여명을 이끌고 일본군 주둔지인 해광사로 행진하고 남개중학 운동장에서 항일구국대회를 열었다.

마침내 1935년 1월 중국공산당 4중전 회의 후 왕명의 좌경노선이 시정되고 1936년 봄 류소기가 천진에 와서 중앙 북방국 서기를 맡았다. 이철부를 높이 평가해 중공 하북성위 서기 겸 천진시위 서기로 임명했다. 1937년 5월 당 중앙은 7차 전국대표회의와 백색지구 사업회의를 소집했는데, 류소기·팽진과 함께 이철부가 연안에 가게 됐다. 백색지구사업과 관련한 열띤 논쟁이 벌어졌는데, 모택동은 “철부 동지의 의견서는 정확하고 철부 동지는 훌륭하다”고 평가하고 “류소기 동지는 백구의 대표이고 철부 동지는 백구의 마르크스주의자”라고 직접 결론을 지었다.

▲ 정성희 소통과혁신연구소 소장

회의 후 당 중앙은 이철부를 연안에 남겨 서북국 사업을 맡기려 했으나 건강이 악화돼 몸져눕게 됐다. 장기간의 지하투쟁에서 몸과 마음이 상하고 폐결핵에 장티푸스까지 겹쳐 1937년 7월10일 연안휴양소에서 조용히 숨을 거뒀다. 김산이 극좌파 강생에 의해 일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처형되기 1년3개월 전의 일이다. 만일 이철부가 몇 년 만 더 살았다면 극좌를 비판하고 김산의 무죄를 보증했을까?

아내이자 동지인 장수암은 교통상황이 불편해 이철부가 사망한 지 3일째 되는 날에 연안에 도착했다. 이들 혁명부부는 작별을 고하지 못한 채 영영 헤어지고 말았다. 당 중앙은 이철부 추도회를 성대하게 갖고 청량산(淸凉山)에 안장했으며, 묘비에 “조선공산당의 창시인의 한 사람이며 조선공산당 중앙위원이며 중국공산당 하북성위 서기인 이철부 동지 묘지”라고 썼다. 한국정부도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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