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규암 김약연

중국에 살고 있는 우리 동포들, 특히 조선족자치주에 살고 있는 동포들이 늘 입에 외우고 다니는 말이 하나 있다.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

“산마다 진달래”는 우리 민족의 오랜 정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진달래가 동포들 사는 마을 어귀 묏등마다 붉게 피어 있다는 의미고, “마을마다 기념비”는 일제에 항거한 가열찬 독립투쟁과 중화인민공화국을 세우기 위한 국민당과의 내전 과정에 순국한 열사들이 마을마다 수십 명에 이른다는 뜻이다.

시인 윤동주의 생가가 있는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 입구에 들어서면 ‘명동촌’이라는 커다란 돌 표지석이 있고, 건너편 산기슭에는 어김없이 ‘열사비’가 서 있다.

해마다 수천 명의 한국인들이 찾는 윤동주 생가에는 명동교회 건물과 함께 명동촌을 개척하고 명동교회와 명동학교를 세운 규암 김약연의 공덕비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명동교회는 3년 전만 하더라도 비록 낡고 쇠락했으나 방문객들에게 열려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사람들의 출입을 막고 있다.

영화 <동주>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으나 인근에 송몽규 생가 터도 복원돼 있고, 명동학교도 벽돌 건물로 다시 복원해 놓았다. 하지만 북간도의 조선 사람들에게 ‘대통령’으로 불렸던 개척자이자 민족교육의 선각자였던 규암 김약연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오늘은 그의 발자취를 찾아가 본다.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

1899년 2월18일 일단의 무리들이 가마솥이며 이부자리 따위를 이고 지고 남부여대해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너고 있었다. 함경북도 종성과 회령에서 출발한 문병규·남위언·김하규·김약연 등 네 집안 141명의 식구들이었다. 이들보다 앞서 윤하현(윤동주의 할아버지)이 먼저 도착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동설한, 북풍한설을 헤치고 이들이 마침내 도착한 곳은 북간도 화룡현 지신사 장재촌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리 잡은 이곳을 명동촌(明東村)이라 이름 붙였다. ‘동쪽을 밝히는 마을’이라는 이름에는 자신들이 떠나온 조국에 대한 그들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이들을 이끌고 온 주인공은 김약연. 그의 나이 31세였다. 약연은 이곳 장재촌에 정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규암재라는 서당을 지어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무릇 사람을 가르치고 인재를 육성하는 데는 자금이 필요한 법. 약연은 선견지명을 가지고 이주하기 전 약 5만평의 땅을 사들이고, 그중 1만평의 땅을 학전(學田)으로 만들어 후대들의 교육을 위한 재정적 기반을 마련해 놓았다.

김약연과 김하규·남위언 등은 후대들을 가르치는 한편 선비놀음으로 ‘음풍농월’하지 않고 직접 땅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명동촌을 개척해 나갔다. 약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함께 이주한 동포들의 크고 작은 일을 적극 도와줬다.

거주권과 토지소유권을 확보하는 등 행정적인 문제에서부터 먼저 살고 있던 중국인들과의 갈등을 조정하는 일도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북간도로 이주하거나 망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이주민들과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약연이 ‘간도의 대통령’이라 불린 것은 이런 일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이동휘와 안중근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도 명동촌에 머물며 독립운동을 위해 약연과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명동촌으로 들어가는 도로 왼쪽 편에는 안중근 의사가 체력단련과 사격훈련을 했다는 선바위가 우뚝 서서 그날의 진실을 증언하고 있다.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명동촌에 위치한 윤동주 시인 생가. 대문 바로 뒷 건물이 명동교회고, 그 앞에 김약연 공덕비가 자리하고 있다.

‘간도의 대통령’으로 불리다

1905년 일제와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오적의 협잡으로 외교권을 강탈당하는 ‘을사늑약’이 일어나자 뜻있는 사람들과 온 나라 백성들은 통탄해마지 않았다. 충정공 민영환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이상설은 차마 죽지 못하고 국외로 망명해 중국 연길현 용정에 자리 잡고 학교를 열어 ‘서전서숙’이라 이름 지었다. 처음 모인 학생들은 모두 22명. ‘서전서숙’은 북간도에 설립된 최초의 근대식 학교였다.

서전서숙에서는 물리·수학 같은 신학문을 가르쳤으나 어디까지나 핵심은 민족의식을 키우는 것이었다. 바로 이때 김약연과 이상설이 만나게 된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떠한 대화가 오고갔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서전서숙이 1년 만에 문을 닫게 됐을 때, 교사와 교육 내용·방식 등을 명동서숙이 그대로 계승한 것으로 볼 때 긴밀한 교감이 있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1908년 4월 김약연은 자신이 직접 운영하던 규암재와 인근 서당들을 통합하고, 서전서숙을 이어받아 명동서숙을 설립한다. 명동서숙은 1년 뒤 명동학교로 개칭한다. 교장으로는 당연히 김약연이 추대됐다. 명동학교는 2년 후 여학생 46명을 포함해 전교생이 160명으로 늘어나게 된다. 당시로서는 놀라운 성장이 아닐 수 없다.

교장으로 부임한 약연은 좋은 교사를 모시기 위해 수소문한 끝에 마침 용정에 와있던 정재면을 만나게 된다. 정재면은 신민회라는 독립운동단체 소속의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였다. 안창호가 세운 대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한 적도 있는 정재면은 명동서숙의 교감으로 부임하면서 신학문과 민족교육의 대를 세웠고, 훗날 김약연이 기독교에 입교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명동학교는 국내외의 저명한 학자들을 교사로 초빙했는데 그 면면을 보면 역사학자 황의돈, 한글학자 장지영, 윤리에 박태환, 법학자 김철, 수학에 최기학 등이 있다. 또 경술국치 직후인 1911년에는 이동휘의 딸인 이의순과 우봉운 등을 초빙해 여학생부를 설치함으로써 북간도 지역에서 최초로 근대적 여성교육을 시작한 학교가 됐다.

명동학교에서는 시험문제나 작문시간에 ‘애국’이나 ‘독립’이라는 내용이 들어가지 않으면 점수를 주지 않을 정도로 투철한 민족의식 교육을 실시했다. 명동학교는 17년 동안 약 1천여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들은 독립운동을 비롯한 각 방면에서 적극적인 활동을 했다.

이처럼 근대적 민족교육기관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명동학교는 북간도의 지경을 넘어 연해주와 국내에서도 학생들이 찾아드는 민족교육의 명문으로 자라났다.

보재 이상설과의 만남

1919년 3월1일 국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번져 나가자 북간도에서도 같은달 13일 만세운동이 일어났고, 끝내는 유혈사태로 번져 갔다. 명동학교 학생들은 브라스밴드를 앞세우고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독립군이 처음으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승전보를 울림으로써 북간도 지역은 독립군 부대의 명실상부한 중심이 됐다. 이 모든 투쟁들에서 명동학교 출신들이 맹활약했음은 불문가지다.

같은해에는 조선 최초의 ‘은행강도사건’인 ‘15만원 탈취사건’이 일어났다. 최봉설·윤준희·임국정·한상호·김준·박숭세 등 철혈광복군 소속 대원들은 ‘적의 돈을 빼앗아 총을 사자!’는 구호 밑에 조선은행 용정출장소를 습격해 15만원이라는 거금을 탈취하는 데 성공한다. 이들 중 다수는 명동학교 출신이었다. 당시 15만원은 총 수천 정을 살 수 있는 어마어마한 거금이었다.

이 거사는 조선은행 회령지점 전홍섭의 제보로 성공할 수 있었으나 거사 27일 만에 주역들이 검거되고 탈취한 자금도 도로 뺏기고 만다. 여기에는 엄인섭이라는 변절자의 밀고가 결정적 계기가 됐다. 수천 년 전이나 오늘이나 일의 성패는 결국 내부 단결에 있다는 교훈을 알려 준 사건이라 해야 할 것이다.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연속 패퇴한 일본군은 그에 대한 보복으로 소위 ‘간도대토벌’에 나서 어린아이에서 여인들과 노인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조선사람들을 학살했다. 짐승도 눈을 감을 천인공노할 만행의 와중에 명동학교도 일본군에 의해 불에 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독립운동사에 길이 남을 명동학교 출신들의 활약

‘간도대토벌’ 이후 일제의 탄압과 김약연의 투옥, 대흉년으로 인한 재정난 등이 겹치면서 명동학교는 1925년 끝내 자기의 운명을 마치게 된다. 명동학교가 문을 닫은 뒤 김약연은 평양신학교에 진학해 목사가 되고, 용정으로 자리를 옮겨 기독교신앙에 기초한 독립운동을 이어 나가게 된다.

활동 무대를 용정으로 옮긴 후 김약연은 은진중학교를 설립하고 이사장으로 취임한다. 이곳에서 그는 훗날 한국의 진보적 신학자인 김재준 목사와 강원룡을 만나게 된다. 후세 사가들은 오늘날 한국기독교장로회의 뿌리가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은진중학교는 훗날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앞장선 민중신학자 안병무·문동환(문익환 목사의 동생)·이상철 등을 배출했다.

규암 김약연(金躍淵)은 1868년 9월12일 함경북도 회령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했고, 특히 맹자(孟子)에 심취했다. 하여 그의 스승 남종구는 “약연은 <맹자>를 만독(萬讀)해서 이제는 눈 감고도 줄줄 욀 수 있으니 틀림없는 맹판(孟板)이야!” 하고 감탄했을 정도라고 한다. 훗날 유학에서 기독교로 전향한 것도 독립운동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무엇도 거칠 게 없다는 그의 신념의 소산이었으리라.

김약연은 은진중학교 이사장으로 재임하던 1942년 10월29일 용정 자택에서 “내 모든 행동이 곧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마지막 숨을 거뒀다. 향년 75세. 그에게는 1977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역사는 올바로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바로 기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 있다. 일제 식민지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전쟁과 분단, 독재의 시대를 살아온 우리들에게는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구절이 아닐 수 없다.

정용일 ㈔평화의길 대외협력위원장

역사를 사는 것은 당대의 몫이겠으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후대의 담당이다. 도적이 매를 드는 격으로 친일매국노들이 오히려 큰소리치는 거꾸로 된 세상에서 역사의 숨은 보석을 찾아내고 정당하게 자리매김하며 후세에 물려주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없다는 것이 오늘 일본의 경제침략을 보면서 느끼는 모두의 소회이리라.

언젠가 명동촌을 찾게 될 독자들이 있다면 김약연의 공덕비 앞에 옷깃 여미고 머리 숙여 한생을 동포들의 권익과 민족교육에 헌신한 그의 삶에 오늘의 우리를 비춰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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