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박진홍이 네 번째 감옥생활을 할 당시 서대문형무소에 기록된 수형자카드(1938년 4월8일).

영화 <항거 : 유관순 이야기>로 많이 알려진 서대문형무소 여옥사에 가면 유관순 열사를 비롯한 많은 여성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다. 그중 박진홍(1914~?)과 이효정(1913~2010)이 서로 소식을 모른 채 노동운동을 하다 일경에 체포돼 7호방에서 재회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석고상도 눈길을 끈다.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동창이기도 한 박진홍과 이효정은 1930년대 이래 혁명적 노동운동에 뛰어든 대표적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다.

안재성의 <이관술 1902~1950, 조국엔 언제나 감옥이 있었다>(사회평론, 2006)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이관술은 박진홍에게 사람을 보내 노량진에서 만나기로 했다. 1937년 7월1일이었다. (…) 너무나 오랜만에 만난, 선생과 제자이자 피를 나눈 형제보다 더 절친한 동지인 두 사람은 일반적인 접선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눈다. (…) 노량진에서 출발해 오늘날의 상도동을 지나 신림동을 거쳐 다시 신길동에서 대방동까지 걸어가며 이야기를 나눈다.”

조선공산주의운동의 전설적 인물의 하나인 이재유(1905~1944)와 함께 경성트로이카를 이끈 이관술(1902~1950), 해방정국에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겸 총무부장을 맡아 일하면서 박헌영 다음으로 대중적 인기를 누렸던 그 이관술이 이재유의 피검과 함께 진행된 6개월여의 도피생활을 마감하고 조직 재건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자마자 가장 먼저 만나고자 했던 인물이 바로 감옥에서 갓 출옥한 박진홍이었던 것이다.

동덕여고보 설립 이래 최고의 수재

명천(함북)이 낳은 수재 박진홍(1914~?)은 1928년 동덕여고보에 입학한 후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대한 연대투쟁을 시작으로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인물이다. 박진홍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명천은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칠보산으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많이 먹는 명태의 기원과 관련된 고장이다.(명천의 태씨가 잡은 고기라서 명태라고 부르게 됐다는 설이 이유원의 <임하일기>에 등장한다.)

박진홍은 15세 되던 1928년 가족과 함께 서울로 이사 온다.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똘똘한 박진홍을 공부시키고자 한 가족의 결단이었다. 용산에 정착한 박진홍은 집이 워낙 가난했던 관계로 입주 가정교사로 학자금을 마련해 천도교계 사립학교였던 동덕여고보에 입학한다.

동덕여고보 역사교사 이관술을 만난 것도 이때였다. 이관술의 영향을 받은 박진홍은 광주학생운동을 경험하면서 사회주의자가 됐고,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나선다. 동덕여고보에서 박진홍에게 영향을 준 교사 중에는 조선어학회의 한글학자 신명균(1889~1940)도 있었다. 신명균은 1940년 11월 일제의 모욕적인 창씨개명에 저항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인물이기도 하다. 이관술은 해방 이후 “그는 일생을 양심적 민족주의자로 마쳤거니와 또 내가 안 단 하나의 철저한 반일적 민족주의자였다”(<현대일보> 1946년)고 회고한 바 있다.

박진홍은 머리도 좋고, 공부도 잘하는 학생으로 유명했다. 1937년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이재유 사건’을 보도하면서 구속된 박진홍에 대해 “그의 머리가 명석함이라든지 또는 공부의 재주 있는 것이 단연 발군의 형세여서 학교성적은 동덕여고보 개교 이래 제일 가는 성적이었다”고 전하고 있다.

동덕여고보 시절 박진홍과 관련해서는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학교 교실에서 공부할 때마다 늘 선생에게 질문을 잘하기로 유명했으며, 어떤 때는 선생에게 질문해 선생으로부터 시원치 못한 답변을 들을 때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자기 자신이 일어서서 유창한 내용으로 설명까지 해 선생을 무안케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한다.”(<매일신보>, 1937년 4월30일)

“광주학생운동 1주년을 맞아 시험에 하얀 백지를 내는 백지동맹을 했어요. 그런데 가장 친하게 지내는 김백화라는 애가 시험을 써 내려갔어요. 나중에 왜 써 내려갔느냐고 하니까 양심적으로 말하지 않고 ‘너희들은 모르니까 못 써 내려갔지’,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알면 왜 못 써 내려갔겠느냐’고. ‘그래, 나는 몰라서 못 써 내려갔다 치자. 그럼 (전교 1등하는) 박진홍이는 몰라서 안 썼겠느냐’고 하고, 그렇게 한 1주일 동안 싸움 나기도 했어요.”(<독립운동가 이효정의 나의 이야기> 2009년 2월28일 EBS 특집기획)

1932년부터 5차례로 나눠 10년을 감옥에서 

박진홍은 1930년대 경성트로이카를 이끌던 이재유의 부인으로, 1944년 이후에는 유력한 서울대 초대 총장감으로 거명되던 국문학자 김태준의 부인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박진홍의 일면일 뿐 박진홍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치열했던 삶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박진홍은 동덕여고보 4학년 때인 1931년 이순금·이경선·이병희·유순희·이효정 등과 함께 교육환경 개선을 요구하는 동맹휴학을 주도한 다음 그해 6월 퇴학당한다. 이후 용산제면회사·대창직물회사에 ‘여공’으로 취업한 상황에서 학생운동과 노동운동을 벌이는가 하면 조선의 독립을 이끌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투쟁 과정에서 해방될 때까지 무려 10년의 세월을 5차례로 나눠 감옥에서 보낸다. 일제강점기 내내 감옥을 제집 드나들듯 했던 셈이다.

박진홍의 감옥생활은 열여덟이었던 1931년 12월 경성시내 각 학교의 맹휴를 이끌던 ‘경성학생알에스(RS)협의회’ 주모자로 연행되면서 시작된다. 이어 1934년 1월에는 ‘이재유 사건’으로, 1935년 1월에는 ‘용산 적노(적색노동조합) 사건’으로, 1937년 12월에는 ‘조선공산당 경성준비그룹 재건사건’으로, 1941년 8월에는 ‘경성콤그룹 사건’으로 연이어 연행된다. 박진홍이 기나긴 일제의 감옥생활을 마감한 것은 서른한 살이 된 1944년 10월이었다.

해방이후 박진홍은 자신의 치열했던 삶에 대해 “동덕 때부터 난 문학소녀였고 사회생활이란 그리 오래되지 못했지요. 10년의 감옥생활을 빼면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이라니까요.”(“여류혁명가를 찾아서” 1946년 11월15일 <독립신보>)라고 위트 있게 표현하기도 했다.

‘옥중 출산’과 ‘귀국 길 출산’의 고통도 이겨 내고

박진홍의 치열했던 삶은 이것만으로도 다 설명되지 않는다. 박진홍이 첫아이를 임신한 것은 1934년 신당동에서 조선 공산주의 독립운동의 전설적인 인물 이재유의 하우스키퍼와 레포(전달책) 역할을 할 때 그와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였다. 그런데 그 아이를 출산한 곳은 놀랍게도 일제의 감옥이었다. 일제는 임신한 상태로 체포된 박진홍을 석방시켜 주지 않았던 것이다. 옥중 출산한 아이는 박진홍의 어머니 홍씨가 키우지만, 2년 만에 사망했으니 박진홍의 심적 고통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었으리라.

1944년 10월 총 10년의 감옥생활을 마감하면서 나온 직후 박진홍은 같은 경성콤그룹 멤버였던 국문학자 김태준과 재혼한다.(이재유는 같은해 옥중에서 사망한다.) 신혼의 단꿈도 잠시 박진홍은 결혼 직후인 11월 국외 독립운동세력과의 연계를 위해 남편 김태준과 함께 무정·최창익·김두봉 등이 이끌던 조선독립동맹·조선의용군이 활약하고 있던 중국의 연안으로 출발한다.

기차로 가는 것이 위험해 걸어서 출발한 박진홍은 다음해 4월이 돼서야 연안에 도착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해방을 맞으면서 박진홍 일행은 1945년 9월 이번에는 연안을 출발해 그해 11월 서울에 도착한다.

그런데 만삭의 몸으로 출발한 탓에 이번에는 귀국 도중 중국의 열하성 란핀에서 두 번째 아이를 출산한다. 출산 때문에 귀국길을 멈출 수 없었던 사정으로 산후조리조차 할 수 없었던 박진홍은 가슴이 결리는 증상이 생기는 등 서울에 도착한 이후에도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박진홍에게는 말 그대로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한 처절한 대장정이었다.

남편을 ‘집사람’으로 부른 페미니스트 혁명가

박진홍은 사회주의자이자 페미니스트였다. <독립신보> “여류혁명가를 찾아서”(1946년 11월15일)에 실린 박진홍 인터뷰를 보면 예의 낙천적이면서도 노련한 페미니스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 남편 김태준을 ‘집사람’이라고 부르는 대목도 인상적이다.

“가정은 퍽 민주주의적이긴 합니다. 서로 다 혁명운동에 이해가 있지요. 그러나 집사람도 봉건의식이 조금은 남아 있어요. 내가 무얼 쓰면 여자가 그런 걸 다 쓴다고 적이 신기하게 여겨요. 호호호. 우리 부녀운동이 물론 봉건 도덕에 얽매여 버리는 극우적인 현상도 잘못이지만은 너무 가정을 경멸 파괴하고 남편을 투쟁 대상으로 삼는 것은 극좌적인 오류예요. 현 계단에 있어서는 부부가 단결해서 혁명의 기초가 돼야 할 줄 압니다.”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비극

박진홍은 귀국한 직후부터 전국부녀총동맹 문교부장 겸 서울시위원장, 민전 사회정책연구위원 등을 지내며 해방정국에서 통일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바쁘게 움직인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하지만 일제의 억압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이번에는 분단과 전쟁으로 이어진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박진홍을 짓누르고 만다. 먼저 두 번째 남편 김태준이 남로당 문화부장 겸 특수정보 책임자로 활동하다 1949년 1월 국군토벌대에 연행돼 같은해 11월7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만다. 남로당원이었던 박진홍은 어느 시점에 월북한 것으로 보이는데,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에 선출됐다는 기록을 끝으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다.

그가 북에서 남로당 숙청 당시 다른 인물과 함께 숙청됐는지, 아니면 전쟁 중에 사망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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