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정승종(1917~1981년) 선생.<국가보훈처 공훈록>

정승종의 예견 “일제는 1945년 3월 패망한다!”

“미국군에는 반도인이 참가하고 있어서 미국은 일본이 패배하는 그날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고, 또 <정감록>에 의하면 소화 20년(1945년) 3월에 일본은 패전하고, 경상도의 깊은 산속에서 왕이 나타나 조선은 독립한다.”(‘정승종 판결문’ 중, 국가기록원)

윗글은 정승종(1917~1981년)이 1945년 5월2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일제의 치안유지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을 당시 판결문에 등장하는 대목이다. 여기서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일제의 패망 시기를 1945년 3월로 예견했다는 사실이다. 정승종은 사이판섬에서 일본군이 ‘옥쇄’하는 등 일본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전황을 보면서 1944년 봄부터 이미 일제가 1945년 3월 패망한다는 예견을 했다고 한다. 일제의 패망 시기를 불과 5개월 차이로 맞춘 셈이다. 당시 중국 본토나 만주에서 활약하던 독립운동가들도 1945년 8월15일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으면서조차 ‘그렇게 빨리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다’고 실토했음을 감안할 때 정승종의 이런 예견은 놀라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정승종이 ‘1945년 3월 일제 패망’을 예견한 근거로 <정감록>을 들고 있는 대목도 흥미롭다. 실제로 정승종의 경우만이 아니라 1940년대 <정감록>을 돌려보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다 일제에 연행되는 사례가 여럿 확인된다. 18세기 영·정조 시대 이래 새로운 시대를 갈망하던 사람들이 비밀리에 돌려보던 <정감록>이 1940년대에도 살아남아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근거로 인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풍문’을 공유하며 조선의 독립을 열망한 보통 사람들

비록 정승종처럼 정확히 언제라고 말하지는 못했지만 ‘조만간 일제는 패망할 것’이라고 예측하는 이들은 대단히 많았다. 더군다나 1944년 초부터는 미군의 일본 본토 폭격이 시작되면서 한반도를 지나는 미군 비행기가 자주 목격됐다. 이에 따라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실제로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속 직원으로 경기도 시흥군 동면 번대방리에 살던 스물한 살의 평전영(일본식 성명강요에 따른 이름)은 1944년 7월 중순 경성역 구내에서 동료들과 잡담을 나누다 미군의 일본 기타큐슈(북구주) 폭격 이야기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이유로 ‘안녕질서에 관한 죄’로 동료 2명과 함께 징역 10월에 처해지기도 한다.

“장개석의 부하로 김일성이라는 위대한 조선 사람이 있다. 김일성은 일본인·중국인·러시아인·미국인 등 상당수의 부하를 거느리고 옛날 의적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김일성은 학력도 있고 덕망도 있다. 장개석은 소련과 연락하면서 일본에 대항하고 있다. 김일성 말에 의하면 미국 비행기는 일본 본토를 폭격하더라도 조선은 폭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조선인은 안심하고 살아도 괜찮다.”(‘평전영 등 판결문’ 중, 국가기록원)

당시는 일제의 승전소식만을 전하는 조선총독부의 매일신보나 경성방송 만을 오로지 보거나 들어야만 했다. 조선일보·동아일보조차 폐간된 상황이었다. 일부는 단파 라디오를 몰래 입수해 미국이나 중국에서 하는 방송을 듣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풍문으로 들리는 이야기를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전황을 파악하려고 했고, 불안한 마음도 달래려고 했다. 그런데 풍문은 정확한 정보를 온전히 담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평전영이 동료들에게 전한 풍문 역시 김일성을 장개석의 부하로 소개하고 있다든지, 김일성이 일본인·러시아인·미국인 등을 부하로 거느리고 있다고 했다든지 사실과는 꽤 다른 정보를 담고 있었다. 평전영이 전한 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하다 하바롭스크에 있던 동북항일연군의 김일성과 중국군 장교 출신으로 광복군에 있던 김홍일 장군에 대한 소문이 합쳐져 만들어진 ‘각색된 김일성’이었다. 당시 일제에 핍박받고 있던 식민지 조선의 민중들은 조선 독립을 이끌어 줄 영웅의 출현에 대한 열망을 이렇게 표출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패망이 가까워질수록 평전영과 같이 자신의 열망을 풍문으로 전하다 일제의 감시망에 걸려 ‘안녕질서에 관한 죄’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연행돼 조사받고 처벌받는 조선인의 수도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었다.
 

▲ 1945년 5월25일 정승종 판결문.<국가기록원>

한강철교 폭파계획을 세우고 행동한 정승종

그런데 스물아홉 살 청년노동자 정승종은 달랐다. 정승종은 단순히 풍문을 주변에 몰래 전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정승종은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조선인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고민했고, 그 결과로 얻은 결론을 대담하게 실행에 옮기고자 했다.

“우리들이 무기 없이 조선의 독립을 실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우선 교통상 중요한 철교의 파괴가 최상의 방법이다. 미국군대가 조선에 상륙해 우리들에게 무기를 주면 활동이 가능하므로 상륙의 시기를 기다릴 때까지 동지를 모아 철교를 파괴해야 한다.”(‘정승종 판결문’ 중)

정승종은 미군이 상륙할 1945년 3월에 맞춰 일본군의 신속한 이동을 저지하고 일제의 교통망을 교란시킬 목적으로 한강철교를 폭파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정승종은 한강철교 파괴를 함께 실천할 동지 규합에 나섰다. 당시 정승종은 용산에 있던 조선총독부 교통국 경성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고 있었다. 마침 평소 알고 지내던 같은 공장 노동자 풍전부환(일본식 성명강요에 따른 이름)을 1944년 9월 두 차례 만나 넌지시 자신의 생각을 밝힌다. 정승종은 1945년 3월 일제가 패망할 것임을 <정감록>을 근거로 설명하고, 이어 한강철교 폭파 필요성을 설득해 찬동을 구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정승종의 ‘담대한 계획’은 끝내 성공하지 못했다. 1945년 3월 일제에 발각되고 말았던 것이다. 정승종의 계획이 어느 시점에서 중단됐는지 일제의 ‘판결문’에도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그 목적수행을 위한 행위를 했다”고 명시한 점을 볼 때 한강철교 파괴를 위한 준비가 꽤 진척됐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가 정승종의 계획을 어떻게 감지했는지도 당시 수사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다. 정승종에게 포섭된 풍전부환이 함께 구속되지 않은 사실로 미뤄 풍전부환이 약속의 시간 1945년 3월이 왔음에도 일제가 패망하지 않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밀고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어쨌든 정승종은 1945년 5월25일 징역 2년형에 처해지지만, 자신의 예견보다 5개월이 늦은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면서 감옥에서 나와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이할 수 있었다.

가난으로 ‘노청학원’조차 계속 다닐 수 없었던 정승종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면서 한강철교 폭파라는 담대한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려 했던 정승종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정승종은 박정희가 태어난 해인 1917년 경기도 시흥군 북면 노량진리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사설 노청학원’에 입학한 정승종은 가난 때문에 2학년을 마치고 중퇴한 후 얼음배달부·직공·자전거 수선업 등을 하다 1938년에 조선총독부 교통국 경성공장에 인부로 취업했다. 1944년 6월에는 승진해 일제에 구속될 때까지 선반공으로 일했다.

정승종이 나고 자란 시기는 세계사적으로는 물론 식민지 조선에도 격동의 시기였다. 가장 큰 사건은 정승종이 태어난 지 2년 후에 벌어진 3·1 혁명이었다. 3·1 혁명은 식민지 조선사회를 크게 바꿔 놓았다. 정승종이 다닌 사설 노청학원도 3·1 혁명과 관련이 있었다. 노청학원은 3·1 혁명의 여파로 생긴 청년단체 중 하나였던 노량진청년회가 무산계급 아동을 위해 세운 사설 강습소였다. 당시 노량진 본동에는 시흥군 북면 주민들이 힘을 모아 세운 일종의 면립학교로 은로학교(1908년 개교)가 있었다. 정승종은 인근에 있던 은로학교에도 입학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정승종은 뒤늦게 입학한 노청학원조차 계속 다닐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니 집안사정이 어떠했을지는 미뤄 짐작할 수 있다.

3·1 혁명 세대의 세례를 받은 새세대 독립운동가 정승종

전국을 뒤흔든 1919년 3·1 혁명이 있은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고 해외에서는 무장투쟁이 활성화되는데, 국내에서도 청년단체와 노동단체 결성 붐이 전국적으로 일어난다. 이때 노량진에도 사회주의계 독립운동가들이 주도하는 두 개의 청년단체가 결성됐다. 용흥청년회는 화요파가 주도한 신흥청년동맹과 긴밀히 관계하고 있었고, 노량진청년회는 서울청년회 계열과 밀접히 결합돼 있었다.

정승종이 2년간 다닌 노청학원을 운영한 노량진청년회는 1920년대는 물론 1930년대 중반까지 활발히 활동한 청년단체였다. 이 과정에서 1932년 2월에는 노량진소년독서회 사건으로 전 양정고보생 김만수·김명룡·김학수 등 9명이 경찰에 연행되기도 한다. 노량진청년회는 노청학원만이 아니라 산하에 노량진소년회도 운영했는데, 노량진소년회 내에는 노량진혜성소년독서회라는 비밀독서회가 있었다.

▲ 김학규 동작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정승종이 노청학원을 다니던 시기도 이렇듯 노량진청년회가 활발한 활동을 하던 시기였다. 이때 정승종도 노량진청년회를 이끌던 3·1 혁명 세대들에게 독립정신의 세례를 강하게 받았을 것이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3·1 혁명 세대의 세례 속에 정승종과 같은 새세대 독립운동가들이 성장·발전하면서 일제의 패망 직전까지도 조국의 해방을 위해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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