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1963년 사형당하기 전 모습. 아래쪽에 '간첩 황태성'이라고 쓰여 있다.

일제강점기인 1935년 5월1일 동아일보에는 김천지역 공산주의자 10여명이 검거됐고, 그중 한 명인 이인근이 갑자기 병원으로 옮겨져 30분 만에 숨을 거뒀다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한 달여 뒤인 6월27일에는 30여명이 검거되고 그해 12월까지 검거된 인원이 300명을 넘었다. 일명 ‘조선공산당 재건협의회 금천그룹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한 해 전인 1934년 발생한 이재우·이현상 등 250여명이 검거된 ‘경성트로이카’ 사건과 견줄 만큼 일제강점기 국내 조선공산당 관련 사건 중 최대 구속자를 낳은 사건이다.

이러한 김천그룹 사건 배후에는 당시 김천소비조합 조합장인 황태성이 있었다. 황태성은 1906년 4월27일 경상북도 상주군(현 상주시) 청리면 청리에서 살림살이가 넉넉한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황태성은 고향에서 상산제일학교 재학시절 3·1 운동을 겪으면서 민족문제에 어렴풋이 눈을 떴던 황태성은 1921년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하고부터는 좀 더 적극적으로 이에 참여한다. 1924년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동맹휴학투쟁을 하다 퇴학당했다. 이후 ‘서울청년회’(1921년 결성)에 참여했고, 같은해 ‘조선청년총동맹’ 결성에 힘을 모았다. 이때 그는 “첫째로는 일제로부터 독립을 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무산자계급이 주인 되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다”는 자신의 인생목표를 세우게 된다. 한편으로는 학업을 이어 가기 위해 1925년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한다.

김천으로 내려가다

그러나 이미 양적·질적으로 성장한 학생운동은 좀 더 새로운 차원의 실천적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시대적 임무를 그에게 요구했다. 그래서 그는 학업을 중단하고 경북 김천으로 내려간다. 이때 그의 나이 20세였다.

김천이 고향 상주에서 가까운 탓도 있지만 당시 일제가 건설한 경부선 역사가 세워져 교통의 중심지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김천에서 여관업을 했는데, 그곳은 김천을 오가는 독립운동가들이 하룻밤 머물다 가는 아지트로 활용됐다.

이 시기 황태성은 평생지기 박상희와 임종업을 만난다. 세인들은 이 세 명을 두고 ‘경북지역 사회주의 3인방’이라고 한다. 박정희의 친형 박상희와는 경북지역 기자단 활동을 통해서 만났다. 김천에서 황태성은 중외일보와 조선일보 김천지국 기자로 활약했고, 박상희는 조선일보 선산지국을 경영했다.

임종업은 김천에서 적색노동조합과 적색농민조합 결성에 힘쓴 사회주의 운동가였으며, 조선공산당 재건협의회인 ‘김천그룹’을 조직했다. 금릉청년회에서 황태성을 만났으며 황태성의 여동생 황경임과 결혼했다.

거듭되는 체포와 수감

1927년 5월 전국적으로 ‘민족협동전선운동’ 바람이 불자, 전국 최초로 신간회 지역조직인 김천지회를 건설했다. 같은해 조선공산당 경북위원회(경북도당) 결성에 참여하고, 조선공산당 경북책임위원 및 고려공산청년회 경북책임자와 고려공산청년회 김천 야체이카(세포)로 활동했다.

1928년 3월 상주청년회에 가입하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됐다. 8월 경기도 경찰부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검거돼 서대문형무소에 한 달간 수감됐다. 이듬해 4월 상경해 조선공산청년회를 결성하고, 이어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돼 1931년 4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출판법·보안법 위반죄로 징역 2년을 언도받고 복역했다.

1933년에는 김천소비조합위원회 전무이사로 선출돼 합법적인 직함을 얻었다. 그러나 서울의 조선공산당 재건그룹들과 연락을 취하며 ‘조선공산당 재건협의회 김천그룹’을 지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3년6월의 실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해방 직전까지는 비밀리에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참여해 전라도 책임자로 일했다.

대구 10월 인민항쟁 주역

황태성은 해방이 되자, 경북인민위원회 선전부장과 조선공산당 대구시당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는 경북지역 좌파세력을 이끌며 서상일·김창숙으로 대표되는 우파세력과 함께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를 결성했다. 신탁통치 문제가 대두되던 12월에도 대구지역 정당과 사회단체 76개가 연합해 결성한 ‘조선신탁관리반대 공통투쟁위원회’를 결성해 기획부를 맡았다. 조선공산당에서 찬탁 입장이 결정되자 공산당 내부의 혼란을 정리하기 위해 1946년 2월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공산당 중앙 및 지방 동지 연석간담회’에 경상북도 대표의 일원으로 참여해 의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했다.

대구에서는 1946년 9월 총파업이 기아투쟁과 결합하면서 ‘10월 인민항쟁’으로 확대된다. 황태성은 항쟁이 평화적으로 끝날 수 있도록 미군정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미군정은 평화 대신 군대를 동원해 진압에 나섰다. 그러고는 중재자였던 황태성에게마저 수배령을 내린다. 그는 수배를 피해 월북을 선택한다. 그는 1954년 북조선의 무역상 부상으로 선출돼 전후 복구사업의 주역으로 일했다.

김일성의 밀사로 남행

▲ 이창훈 4·9통일평화재단 사료실장

1960년 4·19 혁명 소식은 북에 머물던 통일운동가들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제 남북대결을 끝내고 그토록 염원하던 통일을 이룰 수 있는 일말의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4·19 혁명 1주년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5·16 쿠데타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쿠데타의 주인공이 다름 아닌 박정희였다. 황태성은 그동안의 노고로 몸이 쇠약해져 요양소에 머물고 있었지만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북에서는 좀 더 지켜보자고 만류했지만 황태성은 남하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61년 8월31일 서울에 도착한다. 하지만 박정희는 형의 친구이자 북이 파견한 밀사인 황태성을 1961년 10월20일 간첩혐의로 구속해 버렸다. 결국 박정희는 1963년 12월14일 황태성을 사형대에 세우고 만다. 황태성은 사형 직전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과 민족통일 만세”라고 외쳤다고 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