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강달영(1887~1942). <국사편찬위원회>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되다

1925년 12월 초순, 강달영(姜達永, 1887~1942)은 한 통의 급전을 받았다. ‘지급상경(至急上京)’. 조선일보 지방부장 홍덕유가 보낸 전보였다. 강달영이 서울에 도착한 것은 12월12일. 신문사 간부가 지방지국장에게 보낸 업무상 연락처럼 보였으나 1925년 11~12월에 발생한 ‘신의주사건’의 뒷수습을 위한 것이었다. 그해 4월17일 비밀리에 결성된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조직이 11월 국경도시 신의주에서 발생한 한 폭행사건을 수사하던 중 우연히 드러나고 말았다. 11월29일 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유진희, 공청 책임비서 박헌영 등이 검거된 것을 시발로 검거선풍이 불었다.

강달영은 홍덕유의 안내로 서울시내에 숨어 있던 책임비서 김재봉을 만났다. 김재봉은 상황을 설명하고 강달영에게 후임 책임비서를 맡아 달라고 했다. 그 이틀 후 김재봉도 체포됐다. 강달영은 진주 일을 정리하고 1926년 1월 하순 상경했다. 그는 고위 당원이었던 홍덕유의 도움으로 광고와 영업을 담당하는 조선일보 비상근 촉탁의 합법신분을 얻었다. 강달영의 2차 조선공산당은 2월 중순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방에서 활동하던 강달영이 책임비서에 선임된 이유는 무엇일까?

1차 책임비서 김재봉은 그 이유를 세 가지로 들었다. “첫째 지방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경찰의 주목을 덜 받았다는 것, 둘째 서울에서 활동하던 사람에 비해 파벌 갈등이 적고 따라서 분파의 통일에 유리했다는 것, 셋째 의지가 굳고 ‘음모’에 능하며 경리관념이 치밀한 것” 등이었다. 뒷날 그를 취조했던 일제 경찰은 “그를 가리켜 비범한 재능을 가진 자”라고 평가했다.

진주지역 최고의 사회주의 활동가

진주에서 태어난 강달영은 17~18세 때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그는 21세가 되던 1908년까지 경남도립 낙육고등학교에서 수학한 것이 근대교육의 전부였으나 비범한 활동가였다. 그는 1919년 3월18일부터 21일간 연인원 2만8천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시위를 이끌었다. 1심에서 2년6월형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인 대구복심법원에서 3년형으로 높아졌다. 복역 중 1년6월로 감형된 강달영은 1921년 3월8일 출소했다.

강달영은 1922년 2월19일 진주노동공제회를 대표발기하고, 9월에는 진주지역 소작인 1천여명이 참여한 소작노동자대회를 개최하는 등 지역 사회운동의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1924년 4월17일 진주노동공제회 대표로 조선노농총동맹 발기인대회에 참가해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그는 1924년 당시 조선 최대의 사회주의 파벌이던 화요회 회원이 됐고, 코르뷰로(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의 후신) 국내부에도 가입해 진주지역 조직책임자가 됐다. 지방에서 활동했지만 중앙과도 연결돼 있었고 이미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고 있었다.

1923년 3월11일 진주양화직공조합 창립총회를 개최, 지역 최초의 직종 노조가 탄생했다. 200여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활발한 활동을 했는데, 진주노동공제회의 영향 아래 이뤄진 것이었다. 1923년 5월13일 강달영은 백정의 신분해방운동인 형평사 창립대회에서 ‘열렬한 축사’를 했다. 1924년 10월에는 산하조직인 운수노동조합(조합장 김재홍)이 창립됐고 11월21일 운수노조 운임 인상 문제로 동맹파업을 결행했다. 노조원들은 남강 배다리가에 모여 농성했고, 인상안이 수용돼 11월23일 파업을 끝냈다.

1924년 10월23일 ‘무산계급의 지식계발’과 ‘신사상 연구’를 목적으로 하는 동우사(同友社)가 조직됐다. 초기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대거 참여했으나 강달영과 김재홍은 이름을 내걸지 않았다. 배후에서 활동했으나 동우사 창립 1주일 뒤인 11월1일 강달영은 박태홍·김의진·박태준·김재홍과 함께 진주경찰서에 연행됐다. 강달영과 김재홍은 하루 만에 풀려났으나 나머지 인사들은 상당 기간 조사를 받았다. 당시 혐의는 이들이 비밀리에 ‘공산당’을 조직했고, 수년 전 장덕수와 오상근으로부터 자금과 서적을 지원받았다는 것이다. 모두 사실무근으로 드러났으나 지역 활동가들에 대한 당국의 감시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하게 한다.

파괴된 당 조직의 정비

2차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된 강달영 앞에 놓인 과제는 엄중했다. 우선 당 조직을 정비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926년 1월 현재 수감 중인 사람은 22명이었다. 공산당원이 9명이고, 공청 회원이 12명, 그 외 1명이었다. 공산당원은 총수 178명 가운데 5%, 공청 회원은 정회원 284명 중 5%에 해당했다. 비율은 낮았지만 고위 간부가 다수 포함돼 있어서 타격이 컸다.

공산당과 공청의 중앙기관을 재구성해야 했다.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으로는 책임비서 강달영 외에 이준태·홍남표·이봉수·김철수·권오설·전정관이 선임됐다. 고려공청 중앙집행위원이었던 권오설은 신의주 사건으로 이미 신분이 노출돼 지하로 잠적한 상태였다. 그는 공청 책임비서도 겸했다. 하급조직도 정비했다. 강달영이 코민테른에 제출할 목적으로 작성한 ‘조선공산당 현황에 관한 보고’에 따르면, 1926년 3월 현재 당 야체이카(세포단체)는 29개였다. 정당원은 146명이고, 후보당원은 119명이었다. 25세 이하의 열성적인 사회주의자는 공청에 소속됐는데 정회원과 후보회원을 합해 527명이었다. 숫자가 많지 않지만 이들이 단순한 사회주의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직업적 혁명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쉽게 볼 수 없다. 이들은 대부분 3·1 운동 이후 전국에서 우후죽순처럼 솟아나고 있던 노동자·농민단체, 청년단체, 사상단체 속에서 지도적 활동을 하고 있었다.

1926년 3월31일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조선공산당의 가입승인이 났다.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던 조동호·조봉암 등의 활동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강달영은 코민테른과 긴밀히 연락했고, 활동을 위한 예산 지원도 요청했다. 강달영이 작성한 ‘조선공산당 예산안’에 따르면 1926년 4월부터 이듬해 3월 말까지 1년 동안의 자금 총액은 36만3천800원이었다.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에 의하면 이를 2002년 현재 수준의 구매력으로 환산하면 100억원 안팎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강달영이 지녔을 법한 사고의 폭과 사업 규모를 짐작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임경석 <강달영, 조선공산당 책임비서>, 2002).

유연한 민족통일전선과 6·10 만세시위운동

강달영의 2차 조선공산당은 1차 당에 비해 민족통일전선에 대한 사고가 상당히 유연해졌다. 강달영은 노농총동맹 상무집행위원의 직함으로 민족주의 세력들과 접촉했다. 1926년 3월10일 그는 천도교 권동진파(권동진), 사회운동자파(강달영), 기독교파(유억겸·박동완·오상준), 민족주의 비타협파(신석우·안재홍) 등과 비타협적인 민족해방운동 단체 조직 문제를 논의했다. 단체 조직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지만 이들을 대화상대로 인정하고 연합을 시도한 것은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상에서 6·10 만세운동이 추진됐다.

1926년 4월25일 순종이 사망하자 강달영의 조선공산당은 이를 대대적인 반일시위운동으로 전환할 방법을 논의했다. 그렇게 해서 6·10 만세운동이 결정됐고, ‘투쟁지도특별위원회’를 조직하고 그 책임자로 당 중앙집행위원이며 공청 책임비서인 권오설을 선임했다. 그러나 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제 경찰에 의해 대한독립당 명의의 ‘격고문’ 인쇄물이 발각되면서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발전했다.

6월7일 6·10 운동의 책임자였던 권오설이 일제 경찰의 추적으로 체포됐다. 권오설은 격문 제작을 자신이 주도했다는 것을 감추지 않았으나 당과 공청의 핵심인물에 대해서는 철저히 계산된 진술로 일관했다. 조사 책임자였던 요시노 경부는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가했고, 결국 조선공산당 책임비서가 강달영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권오설은 이때의 고문후유증으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0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하고 말았다.

6·10 만세운동은 처음 예상했던 만큼은 아니었으나 수만 명의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전국에서 전개됐다. 시위운동과 2차 조선공산당 사건으로 그해 7월25일까지 2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체포됐다. 심문투쟁 덕분에 공산당 사건은 축소됐다.

정신병으로 고생하다 사망

책임비서 강달영 체포에 혈안이 된 일제에 7월 초 그의 흔적이 포착됐다. 명치정(지금의 명동)의 한 주식거래소에 그가 270원의 돈을 맡겨 놓은 것을 알게 된 것. 일본 경찰은 끈질기게 기다렸다. 7월17일 저녁 무렵 바나나 장사로 위장한 강달영이 돈을 받아 나오는 순간 일본 경찰이 덮쳤다.

강달영은 모진 고문에도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았다. 기밀문서 추적이 시작됐다. 보성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의 집에서 발견된 검은 가죽가방 속에 당의 공식보고서·예산안·선전문안·왕복문서 등 30여종의 문서가 담겨 있었다. 문서는 모두 암호로 기재돼 있었다. 강달영은 전혀 응하지 않았다. 일제는 천신만고 끝에 암호를 해독했다. 암호 해독과 함께 7월22일부터 대대적인 검거선풍이 일었다. 전국에서 49명의 당원이 체포됐다. 조선공산당은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그런 와중에도 체포를 피한 중앙집행위원 김철수는 중앙집행위원들을 보선해 조직 재건에 나선다.

▲ 임영태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조사위원

오랜 재판 과정을 거쳐 1928년 2월13일 강달영은 6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32년 9월16일 대전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했으나 그는 고문 후유증과 오랜 형무소 생활로 얻은 정신병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1942년 7월12일 힘겨운 삶을 마감했다. 출옥 후에도 경찰의 감시는 늘 강달영의 가족을 괴롭혔다. 그가 사망했을 때 외아들 강병순은 행방불명돼 생사를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동지들의 주선으로 간소하게 장례가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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