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3·1 운동 101주년이 되는 해다. 전국 규모 비폭력 저항운동인 3·1 운동은 무참히 짓밟혔지만 독립운동의 씨알이 됐다.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임시정부를 틔웠고 자신의 살과 피를 조국에 내어 준 독립운동가를 길렀다. 수천의 죽음과 수만의 넋이 조국 독립의 가시밭길에 피로 맺혔다. <매일노동뉴스>가 독립운동가들의 피어린 삶과 고귀한 넋을 되새기는 열전을 <삶과 넋>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한다.<편집자>

▲ 한용운 선생(1879~1944)


출가

만해 한용운은 조선이 기울던 1879년 8월29일 충청도 홍성 땅에서 한응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남다른 성취를 보여 아홉 살에 <통감> <서경기삼백주>를 익히고 열여덟 살에는 마을 서당에서 학동들을 가르쳤다.

그는 1892년 열네 살에 전정숙과 결혼했지만 1896년 여름, 집을 떠났다. 때는 1895년 동학농민혁명의 여파와 청일전쟁 직전의 긴장상태, 민란 등으로 목숨을 건 산행이었지만 고생 끝에 설악산 오세암에 도착했다. ‘나는 왜 중이 됐나’라는 글에서 만해는 출가의 이유를 세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의 방편을 찾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1905년 을사조약 직후 백담사에서 김연곡을 은사로 해 정식으로 출가·득도한 다음 전영제에게 계를 받아 승려가 된 뒤 만화에게서 법을 받았다. 이즈음에 불교경전은 물론 양계초 등을 보면서 근대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만해는 백담사에서는 승려의 기본을 익히고 건봉사 강원에서 수학했다. 이 두 절은 서울과 일본에 유학생을 많이 파견하는 근대적 교육에 주력하는 사찰로 근대문물에 목말랐던 만해에게 제격이었다.

측량기계를 사오다 

1908년 3월 한용운은 이학암 선사의 추천으로 일본 종무원 시찰단의 한 사람으로 1909년 5월부터 6개월간 일본 각지를 다니며 신문명을 돌아봤다. 한용운은 여느 청년처럼 신문물에 열렬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한용운이 1908년 4월 하순 현해탄을 건너 도착한 일본에는 이미 서구문물이 범람해 있었다. 1908년 4월 그는 조동종대학에 입학해 불교학을 공부하고 서양철학을 청강했다. 조선의 재래식 강원밖에 몰랐던 그는 근대적 교육 학제와 근대적인 개념 분석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일본 시찰은 조선의 불교개혁에 많은 시사점을 던졌다. 또 메이지대학에 황실 유학생으로 와 있던 최린을 만났다. 이 인연은 3·1 운동 때 종교인 대표로 해후하게 된다.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한용운은 측량기계를 사 왔다.

“흰구름처럼 떠도는 스님이 무슨 짐이 그리 많소?”

한용운의 측량기계가 들어 있는 행장을 보고 일본 승려가 웃으며 물었다.

“이 보따리에 일본을 집어넣고 갑니다. 여기 삼천세계가 다 들어 있소.”

한용운은 귀국하자마자 서울에 경성명진 측량강습소를 개설하고 소장에 취임했다. 더불어 측량기술을 강의하면서 측량학교를 세우기 위해 사찰을 찾아다녔다. 그는 이 땅의 사유토지를 정확히 측량해 일제의 수탈을 막아 내고자 했던 것이다. 측량강습은 오래 가지 못했다. 측량기 한 대로는 대규모 조직의 수탈을 막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바위에 계란 던지는 격이었다.

조선불교 개혁운동

불교인으로서 불교개혁은 만해의 화두였다. 한일병탄 후 일본은 일연종·진종 등의 국수적 불교를 조선에 수출했다. 이에 호응하듯 원종의 종정인 해인사 주지 이회광이 원종 합법화 방편으로 일본 조동종과 동맹조약을 독단으로 체결했다. 그는 불합리하고 독소적인 내용들을 공개하지 않은 채 주요 사찰을 순방하면서 동맹조약의 승인을 강요했다. 이를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이 일진회 회장인 이용구였다. 공동 종정을 노리는 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관련된 다케다 한시였다. 만해는 이회광의 매종사건에 맞서 박한영·진진응·김종래·장금봉 등과 함께 송광사·범어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고 임제종 운동을 펼친 결과 이들의 불교동맹조약을 분쇄할 수 있었다.

불교개혁을 위한 이론 작업도 병행됐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했다. 이 책은 자유와 평등주의에 입각한 불교 개혁안 실천지침서다. <조선불교유신론>은 불교개혁 의의와 방법, 개혁주체 확립, 대중화 시대를 여는 포교방법, 승려의 사회적 위상 확립, 불교계 효율적 통치, 실천이념 등 불교계 전반의 변화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만해는 <조선불교유신론>에서 우선 불교가 미신이나 불합리한 과거의 관습을 벗고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개혁주체 확립은 승려교육에서부터 출발해야 하고, 그 중심은 선법(禪法)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바로 세우기 위해 자력수행을 기반으로 한 포교방법 개발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승려의 생산성 있는 활동을 강조했다.

대중화와 관련해 1929년 <일광>지에 “산사로부터 도시로, 승려 본위로부터 신자 본위로, 은둔적·독선적 불교로부터 사회적·경제적 불교로 바꾸는 것이 현재 조선불교 갱신운동의 당면과제 중 하나다”며 뜻을 설명했다. 그리고 농촌교화는 농촌의 실제 정세를 조사하고 경제적·문화적 수준에 적응한 교화방법을 연구하고, 농촌포교에 적절한 인재를 양성하면서 조직적 실시계획을 확립해야 한다는 구체적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양산 통도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모두 열람하고 장경 위주의 편찬방법에서 벗어나 주제별로 엮은 <불교대전>을 간행했다. 이 책은 불교의 대중화와 승려교육에 크게 기여했다.

서울에 올라와 잡지 <유심>을 창간했다. 당시 출판법은 잡지에서 다룰 수 있는 내용을 종교·학술·문예로 한정했다. <유심>은 겉으로는 잡지 형태였으나 청년계몽운동을 위주로 다룬 시사종합지에 가까웠다. 그는 서울 계동 43번지에 셋방을 얻어 잡지사 간판을 걸고 혼자 잡지를 만들었다. 이 잡지는 3호로 종간됐지만 최초의 문예지 <창조>(1919년 2월)보다 앞서 나왔다.

망국의 울부짖음

“이 산중의 중놈들아, 나라를 빼앗겼는데 밥이 입으로 들어간단 말이냐?”

경술국치를 당한 1910년 8월29일 저녁, 금강산 표훈사에서 공양의 첫 숟갈을 뜨려던 승려들은 난데없는 고함소리에 숟가락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격분을 이기 못한 한용운이 저녁 공양자리에서 발우를 던진 것이었다.

“다들 공양을 들도록 하오. 용운 수좌만 대표로 공양을 삼가도 대중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이오. 쌀 것은 싸고 먹을 것은 먹는 게 대도야.”

조실 스님이 타일렀으나 한용운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 막 넘어가는 해를 향해, 지는 해를 향해 울부짖었다.

“나라가 망했다. 나라가 망했다!”

이영경 작가

만해는 나라를 빼앗긴 아픔과 근대 종단이 통감부의 승인을 받지 못한 채 분열하고 친일화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헛헛함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변화된 상황에 맞춰 새롭게 나아가기 위해 그는 망명을 결심했다. 이곳에는 국내에서 활동이 어려워진 독립운동가들이 옮겨와 교포 사회를 기반으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만주에 정착한 이상설이 세운 서전서숙과 이시영·상용·동녕 등의 독립기지를 비롯, 무장 독립운동과 교육사업 등의 저항조직이 속속 출현하고 있었다. 한용운은 경의선을 타고 안동·봉천쪽의 남만을 향했다. 부설되지 않는 철도와 며칠 전 완성된 철교를 건너 장작림 군벌의 험준한 산악지대와 도로로 걸어가야 했다. 독립군의 훈련장과 군관학교 방문해 격려하고 격려받으면서 만해는 기운을 얻었다. 이시영의 유하현 신흥군관학교에서는 젊은 스님 한용운을 환영했다. 또 박은식·이시영을 만났고 평생의 벗이 된 김동삼·윤세복·이동하와 조우했다. 만해는 “이들과 독립운동을 협의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특히 만해는 김동삼에게 깊은 신뢰를 갖게 됐는데 둘은 ‘해방조국’의 건설에 몸과 마음을 바칠 것을 거듭 다짐했다고 한다.

그러나 만해의 누더기 승려 옷이 또 문제가 됐다. 만주 통화현 굴라재에서 일본 밀정으로 오해를 받아 독립군 청년이 발사한 총에 맞았다. 정신을 잃어버린 그를 마을로 안내한 것은 관세음보살이다. 그는 관세음보살의 가피로 기어서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수술을 받고 목숨은 건졌으나 휴유증으로 쳇머리를 흔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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